
하버드 학술대회 “50년 후: 베트남전쟁에 대한 새로운 관점들”, 한베평화재단 구수정 이사 발표
하버드 케네디 스쿨(Harvard Kennedy School)의 하버드 글로벌 베트남전쟁 연구 프로젝트(The Harvard Global Vietnam Wars Studies Initiative, GVWSI)에서 지난 10월 3-4일, 이틀에 걸쳐 학술 대회 “50년 후: 베트남전쟁에 대한 새로운 관점들(Fifty Years On: New Perspectives on the Vietnam Wars)이 진행되었습니다.
한베평화재단의 구수정 이사가 이번 학술 대회에 초청되어 ‘국제적 관점’ 섹션에서 “하나의 전쟁 두 개의 기억: 한국과 베트남(A War with Two Memories: South Korea and Vietnam)”을 주제로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학살 문제와 관련된 발표를 하였습니다.
이번 학술 대회에는 베트남전쟁과 관련된 다양한 층위의 문제가 다양한 발제자들을 통해 다뤄진 자리였고, 최근 대한민국 사법부가 국가배상소송 1-2심 판결로 그 진실과 책임을 인정한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문제가 국제적인 자리에서 다뤄진 의미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아래 버튼을 클릭하면 이번 학술 대회의 개요와 발제 요약 등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버드 케네디 스쿨 홈페이지에 공개된 이번 학술대회의 발표문 요약 자료를 한국어로 번역한 것을 공유합니다.
학술 대회 내용 보기
* 사진: 하버드 케네디 스쿨의 학술 대회 공지 화면 캡처
* * * * * *
50년 후: 베트남 전쟁에 대한 새로운 시각
GVWSI 2025 학술대회
<패널 1: 미국>
Christopher Goscha
“전쟁 이전의 전쟁: 어떻게 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국의 베트남 개입이 그 이후를 만들었는가”
미국은 1965년 린든 존슨 대통령이 베트남에 병력을 배치하기 전부터 베트남에 대해 알고 있었다. 미국의 베트남에 대한 전략적 관심은 2차 세계 대전부터 시작되었으며, 특히 태평양 전쟁의 시작과 종전 당시에 이러한 미국의 관심은 더 두드러졌다. 이 논문은 먼저 1940년대 일본의 관심이 남쪽으로 돌아서기 시작하면서 왜 미국이 베트남에 지대한 전략적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가를 살핀다. Frank Michelin이 주장했듯, 인도차이나에서 태평양 전쟁의 시작은 1940-41년으로 볼 수 있다. 이 논문은 두번째로 1945년 초에 미국 해군이 남중국해를 침략한 것을 살펴본다. William Halsey 제독과 해군 중장 John McCain (베트남 전쟁 영웅 John McCain의 아버지인)의 지휘 하에 미국은 1945년 1월 인도차이나에 대대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이 1월의 공격과 그 이후에 이어지는 일련의 공격들은 그 이후에 베트남에 오는 모든 사건들에 중요한 의의를 가지지만, 이 모든 것이 일본의 Cam Ranh Bay 해군 기지를 포함한 주요 인도차이나 보급로를 끊기 위한 시도이기도 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2차 세계대전으로부터 이어지는 이 두 사례는 그 이후에 이어질 인도차이나의 세 전쟁들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줄 수 있을 것이다.
David Biggs
“그들이 있던 곳: 인류적 관점에서 본 베트남의 땅과 환경전쟁(Ecowar)”
폭격, 빠른 기지도시 건설과 전례가 없던 네이팜과 최루탄 등의 화학무기 사용부터 에이전트 오렌지까지, 베트남은 생태계 파괴적 전쟁, 혹은 환경전쟁(Ecowar)으로 1960년대부터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최근 60년간의 많은 연구, 소송과 국제적 차원에서의 복원 노력에도 불구하고 화학무기의 개발부터 사용, 토지 몰수, 기지 폐쇄와 전후 대처 등의 지역과 개인, 그리고 인간의 관점에서의 환경전쟁에 대한 연구는 매우 적다. 베트남에서의 현장 연구와 하버드의 Matthew S. Meselson과 유전학자, 생태학자 등의 전문가와 지역단체 리더와 기록들을 기반해 필자는 토지 몰수, 기지 폐쇄와 화학무기전쟁과, 전후 오염 지역 정화 작업과 그로 인해 영향을 받은 자들의 삶을 발전시키고자 노력 중인 과학자와 운동가들의 이야기를 인류적 관점에서 보고자 한다.
Geoffrey Wawro
“베트남 전쟁은 이길 수 있었는가?: 동남아시아에서의 미국의 과도한 확장에 대한 새로운 연구”
미국이 1969년 이후로 북베트남을 침공하고 피난처를 습격하고, 병력을 추가하고, 예산을 추가 배정했더라면 Creighton Abrams의 “더 나은 전쟁”[1]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강력하게 주장되어왔다. 미국과 영국의 기록에 기반한 이 연구는, 그러한 주장들이 모든 부분에서 현실과 다르다고 주장한다. 1968년에 미국의 방위산업 예산은 이미 연방정부의 예산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였으며 GDP의 10프로에 달하는 지속이 불가능한 수준에 이르렀다. 그 결과로 미국의 인플레이션은 1965에서 67년 사이에 두 배 이상 치솟았으며 1967에서 1970년 사이에 다시 한 번 두 배 가까이 올랐다. 경제적으로 전쟁을 확장하는 현실적인 방안이 존재하지 않았다. 전쟁을 지원할 자금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워싱턴이 어디에서 군사력을 동원할 수 있었겠는가? 1968년에 미국은 이미 육군 7사단과 해병 2사단, 공군 10비행단, 두 대에서 네 대 사이의 항모전대가 베트남에 파병되어있었다. 1967년에는 베트남의 요구로 육군 9개와 해병 3개 사단으로 구성된 미국의 예비군이 육군 1개와 해병 1개 사단으로 줄어들었다. 더 많은 병력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워싱턴이 어떻게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을것인가? 1968년에 54만 명의 미군부대로는 고작 6만 명 미만의 전투부대를 형성할 수 있었는데, 이 보잘 것 없는 수의 부대마저도 몬타나 주 크기의, 숲이 우거진 나라에서 실종되었다. 10% 미만의 작전만이 적을 포착하는데 성공하였다. 베트남에서 미국의 패배는 국채 증가, 예산 적자, 인플레이션, 악화되는 의회, 반전 시위, 동남아시아 외의 지역에서의 지역 패권 경쟁과 미군의 대비 위기 등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배경적 요인들과 미국의 베트남에서의 무용성과 더해지면서 미국의 군사작전 확장은 불가능해졌다. 존슨 대통령이 1968년 대통령직 (재선출마)을 포기했을 때, 그는 이러한 현실을 인정했으며, 닉슨도 마찬가지였다. 닉슨은 겉으로는 대담한 척 보였지만 그는 재임 기간 내내 패닉에 빠진 채 예산을 안정시키고,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고 (미군) 사상자를 감소시키고, 의회와 언론과 대중을 달래기 위해 노력하기 위해 (베트남에 파병된) 미군을 철수시켰다.
<패널 2: 남베트남>
Edward Miller
“남베트남의 내전들: 메콩 강 삼각주의 주권, 공간 그리고 폭력”
최근 몇 년간, 역사학자들은 베트남에 관한 오랫동안 외면되어온 사실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베트남에서의 전쟁은, 다른 것들을 제쳐두고, 일단 베트남인들의 내전이었고, 셀 수 없는 베트남인들이 내전의 경험으로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전쟁을 내전이라고 부를 때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그렇게 이야기 하는가? 그리고 이러한 접근은 베트남 전쟁을 연구하고 생각하는 우리의 방식을 어떻게 바꾸는가? 이 논문에서 나는 내전적 성격의 전투를 단순히 남-북 간의 폭력으로 보는 것을 넘어 공간과 주권과 관련된 전쟁으로 보고자 한다. 나는 특히 이러한 시각을 1,2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내전의 성격이 가장 강했던 메콩 강 삼각주의 Bến Tre지역을 중심으로 보고자 한다. 인도차이나 전쟁들을 내전으로 보는 시각은 주요 외세들을 주변화한다는 주장에 반해, 나는 이러한 분석이 1차 전쟁에서의 프랑스, 그리고 후에는 미국의 메콩 강 주변에서 행사한 제국적 군사개입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내전은 또한 메콩 강 삼각주뿐만 아니라 나머지 베트남에서의 베트남 전쟁의 과정과 그 이후의 결과를 이해하는데에도 필수적이다.
Sean Fear
“내부에서부터의 몰락?: 남베트남의 2공화국의 흥망성쇠 1967-1975”
남베트남의 정치적 역사는 베트남 전쟁, 특히 전쟁의 마지막 단계에 있어서 많은 영미권 논의에서는 제외되어 왔다. 그러나 반공주의자들 사이에서의 사이공 정부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은 전쟁의 결과에 있어 중대한 요인 중 하나였다. 이 발표는 1967년에 시행된 야심찬 개헌을 통해 정치적 혼란에 질서를 만들고자 했던 남베트남의 “2공화국”을 평가한다. 발표는 1968년의 구정대공세 (1968 Communist Tet Offensive)를 시작으로 남베트남의 도시와 마을을 휩쓸었던 반공주의의 흐름을 살펴보며, 월남정부의 경제, 농업 그리고 정치 분야에서의 대대적인 개혁 정책을 분석한다. 1968년 이후 시기는 베트남에서의 반공주의 결성과 응집이 최고조였던 시기에 분명하며, 한동안은 전쟁의 흐름이 월남으로 넘어오는 듯 했다. 그러나 군정은 민간 정당과 기관들을 제외하고 정치적 권력을 독점하면서 호의적이었던 흐름을 스스로 버리게 되었다. 티에우의 독재정치는 정부의 정당성이 기반해있던 헌법적 질서를 배반하였으며 그로 인해 1968년 이후의 열기를 식히고, 미국의 지원 삭감을 불러왔으며, 결과적으로는 1975년 월남의 몰락을 불러왔다. 새로운 베트남어 사료들에 기반해, 이 발표는 베트남 전쟁을 종전으로 이끈 주목받지 못한 월남의 주요 인물들을 살펴본다.
Edwin Moise
“누구의 전투보병인가?”
David Prentice가 최근에 발표한 주요 저서 Unwilling to Quit (2023)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주장은 닉슨 대통령이 1969년 베트남에서 미군을 철수시켰을 때, 월남 대통령인 응우옌반티에우가 그것을 반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티에우는 월남군이 미 공군의 지원과 군수지원을 미군의 지상 부대보다 더 필요로 했다. 미국의 사상자를 줄이는 것이 미국의 여론을 얻는 것이 미국의 지원을 유지할 수 있다는 논리에서였다. 이 논문은 이러한 맥락에서 여러 부분을 살펴본다. 초창기 미군 철수의 시기에는 미군의 병력이 크게 줄어들진 않았지만, 곧 극적으로 지상전의 부담이 월남군에게 전가되기 시작했다. 1969년 후반기에는 3.3:1의 비율로, 10,083명의 월남군 사상자와 3,074 미국군 사상자가 있었다. 전쟁 기간 내내 월남군 사상자의 수가 미국군 사상자의 수보다 항상 높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그 외 인력의 비율에 비해 지상군은 비정상적으로 월남군의 수가 많고 미국군의 수가 적었다. 티에우 대통령이 잃을 수 없었던 것은 미군 지상부대가 아니라 미군 지원부대 였던 것이다.
Phi-Van Nguyen
“비공산주의 베트남의 국가주의의 정치: 베트남 공화국(월남)의 이민자로서 유권자에 대한 통치 1949-1956”
권위자가 내전을 지나 새로운 민족국가를 세우려고 할 때 딜레마에 빠지곤 한다. 한편으로 그들은 그들의 대표하고자 하는 민족에게 자비심과 존중을 보여야 한다. 또 한편으로 그들은, 특히 인민이 누구인지 모를 때, 혹은 그들 중 누군가가 체제 전복을 시도하려고하는 것이 아닌가 고민해야한다. 이러한 문제는 특히 개인을 특정지을 수 있는 구조나 수단이 무너졌거나 상당한 수의 인구가 원적에서 벗어나 새로운 곳으로 이동했을 때 중요해진다. 월남은 어떻게 정치적 정당성과 안보 위협 사이의 아슬아슬하고 연약한 균형을 유지했는가?
<패널 3: 북베트남>
Pierre Asselin
“하노이의 문화 외교 공세: 1965-75”
이 발표는 베트남 공산주의 당국의 전쟁의 목표를 위해 1960년 후반과 19970년대 초 문화 도구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더 정확하게 이 발표는 베트남 예술가와 지식인들을 이용하여 세계무대에서 당국의 “좋은 이미지”를 만들고 “국가 구원을 위한 반미 대항”을 촉진시키고자 한 것에 집중한다. 베트남 민주공화국 (DRVN)의 문화적, 예술적 방식을 통해 외국 정부와 여론과의 관계를 성립, 발전 그리고 유지하고자 한 방식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연구는 그러한 노력의 결과보다는 그러한 정책의 의도, 이유, 그리고 현실화하는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문화와 예술을 통해 외부의 마음을 얻기 위한 노력은 한편으로는 물질적인, 정치적인 그리고 윤리적인 지지를 얻고자 함이기도 하였으며, 동시에 사이공의 정당성을 약화시키고 워싱턴을 고립시키고자 함이기도 하였다.
Dang Kim Son
“호치민의 전시 이데올로기”
이 발표는 새로운 시각에서 호치민의 전시 이데올로기를 보며, 그것이 근본적으로 전쟁보다는 평화를 향해있었다고 주장한다. 호치민에게는 인민의 평화로운 삶과 행복이 가장 중요하였으며 전쟁과 분쟁은 모든 평화로운 저항방식이 소진되었을 때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이었다. 무력충돌이 불가피하자 그는 독립과 자유는 모든 수단을 사용해서라도 지켜져야 한다고 주장했고, 동시에 외세의 철수를 위한 평화 협정이 이루어져야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원칙은 프랑스와 미국에 대한 저항운동 내내 그의 리더십의 중심에 있었다. 호치민을 전쟁을 일으키는 설계자로 보는 기존의 해석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각에서 독립에 대한 비전이 화해와 평화의 열망과 분리될 수 없었던 호치민의 비전을 보여준다.
Ho Son Dai
“응우옌찌타인 장군의 월남 전장에서의 역할 (1964-1967)”
이 발표는 응우옌찌타인(Nguyen Chi Thanh) 장군이 베트남 전쟁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연구에서 주목받지 못하였다고 주장한다. 공산당의 중앙 위원회 (Politburo)출신이자 베트남 인민 정치위원회장으로, 미국의 1964년 공습 당시, 타인은 월남 중앙사무국 총비서, 군 위원회 총비서이자 남베트남해방전선(NLF)의 정치 장교로 임명되었다. 1964년부터 67년까지 그의 주요 지시는: NLF의 중심 병력 마련, 지역 보급 체제의 건설, 반-미군 군사작전의 설립과 남부 명령체계의 개편 등이 있었다. 1967년에 구정 공세를 준비하던 중 타인은 돌연 사망하게 되었으나, 그의 지도는 1975년까지 전쟁의 방식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 타인 장군의 역할을 살펴보면서 이 연구는 역사기록의 빈 공간을 채워넣을 뿐만 아니라 베트남의 리더십이 어떻게 불균형을 회복력으로 변화시켰는지, 그리고 NLF와 PAVN(베트남 인민군)이 어떻게 미국에 대항하는 세력으로 전쟁의 흐름을 바꿔놓았는가를 보여준다.
Nguyen Manh Ha
“베트남 전쟁의 공산당의 첫 번째 서기장, 레주언(Le Duan)의 역할 (1954-1975)”
이 논문은 1954년부터 75까지 베트남의 혁명의 길에서 레주언의 역할을 살펴보면서, 그의 정책가로서의 위치뿐만 아니라 미국에 맞서기 위한 그의 군대, 정치 그리고 외교를 조율하고자 했던 그의 노력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생략) 이러한 분석과 더불어, 필자는 레주언을 정치가, 당의 수뇌부로서의 개인적인 감상을 덧붙이며 베트남의 혁명적인 리더십에 있어 레주언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주목받지 못한 레주언의 유산을 살펴보며 이 연구는 베트남전쟁의 정치력에 대한 연구에 기여하고, 정책, 전략과 개인이 전쟁의 결과를 낳는 과정에서 어떻게 교차하는가 보고자 한다.
<패널 4: 국제적 관점>
James G. Hershberg, Sergey Radchenko
“모스크바, 하노이, 그리고 베트남 전쟁의 격화: 소련(구 소련권)의 기록에서의 새로운 증거”
이 발표는 전쟁의 국제적 측면에 대한 러시아/소련권의 아카이브의 새로운 증거를 발표 및 논평하며, 특히 1966-1967년 전쟁이 격화되던 시기를 본다. 상당수의 문서는 소련-북베트남 회담(Leonid I. Brezhnev, Pham Van Dong, Vo Nguyen Giap과 Le Duc Tho 등의 인물들을 중심으로 하는)을 다룬다. 저자들은 최근 저자들의 저서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자료를 얻었으나, 일부만이 최종 논문에 실렸고, 일부는 출판된 후에야 공개되었다. 이러한 자료들을 평가함으로써 모스크바-하노이 관계의 역학의 새로운 측면을 탐구할 수 있으며, 두 국가의 군사 원조 및 외교("마리골드" 이니셔티브를 포함하여), 중국-소련 분열의 영향, 변화하는 군사 상황과 이후의 전쟁 전략 등이 포함된다.
Ku Su Jeong
“하나의 전쟁 두 개의 기억: 한국과 베트남”
이 페이퍼는 한국과 베트남에서의 분열되고 혹은 충돌하는 베트남전쟁에 대한 기억들을 살펴본다. 각 국가가 어떻게 기념관들(베트남의 증오비와 한국의 월남 참전 기념비)을 통해 전쟁을 묘사하였는가를 통해 전쟁을 바라보는 두 시각을 보여준다. 이 기념비들은 피상적이고 개인과 집단의 깊은 개인적 경험을 묵살하고 덮어버리는 공공의 기억을 드러나게 한다. 베트남의 기념비들은 베트남의 대항기억으로서, 신랄한 “망각의 폭력”에 대한 베트남의 반응이자, 민간 피해자들의 고통과 경험에 목격자가 되게 함으로써 공식 기억에 대한 저항의 운동이기도 하다. 반면, 한국의 기념비들은 공식적으로 승인된 기억을 상징하고 전쟁을 미화하며 민간피해에 대한 인정을 회피하며 한국의 “폭력의 망각”을 지속시킨다. 궁극적으로, 이 논문은 같은 전쟁에 있어서 한국과 베트남이 어떻게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이러한 대비되는 기억에서 어떠한 종류의 역사적 갈등이 생겨나는지를 살펴본다. 전쟁의 경험이 하나의 국가를 넘어설 때, 기억에 대한 논의는 초국적이여야만 한다. 한국과 베트남은 식민주의, 분단과 전쟁의 아픈 경험을 독특하게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역사적 고찰을 통해 과거를 마주하고, “고통의 연대”를 구축하는 것이 동아시아의 진정한 화해와 평화로운 미래를 위한 초석을 마련할 수 있다.
Mitsuaki Ono
“오키나와의 초국가적 차원의 반-베트남전 운동”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오키나와는 1972년까지 미군의 통치를 받았으며, 베트남 전쟁 동안 오키나와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군사 중심지로 작동하였다. 전쟁은 오키나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깊은 영향을 미쳤고, 그것은 지역 내 전쟁과 직결된 군사 점령으로부터의 해방의 목소리도 불러일으켰다. 이 논문은 젊은 오키나와 활동가, 반전 흑인 미군(GI)과 미국 반전 운동가의 세 명의 행위자가 교차하며 상호 변화하는 과정을 살펴본다. 미군의 억압적인 통치 아래 오키나와 주민들은 1950년대부터 섬을 일본으로 반환할 것을 요구해 왔으나 1960년대 후반, 일본 정부과 미국 정부가 미군 기지를 철거하지 않고 오키나와로 반환하기로 합의하자 그에 대한 항의로 오키나와 활동가들은 반환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새로운 용어와 형태로 자신들의 요구를 표현하며 단순한 반환이 아닌 군국주의와 전쟁으로부터의 해방을 촉구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1969년경 흑인 반전 GI와 미국 반전 운동가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활동가들은 미군 내 군인들이 직면한 내부 억압과 인종차별과 더불어, 군사 폭력이 베트남, 오키나와, 흑인 모두에게 끼치는 영향과 그 방식을 이해하게 되었다. 동시에, 흑인 GI들은 일본과 미국 모두에 의해 지배된 오키나와의 현대 역사를 알게 되었고, 오키나와 주민들의 군사 기지 철거 요구를 지지하게 된다. 또한, 태평양 상담소(the Pacific Counseling Service)와 같은 미국의 활동단체는 오키나와 활동가와 흑인 GI들 간의 소통 촉진을 위해 국제 네트워크를 활용하기도 하였다. 이 논문은 각기 다른 세 행위자들의 진화하는 관계를 살펴보고, 오키나와에서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이 초태평양, 초국가적 연대를 형성했다고 주장한다.
Yu Yao
“반중동맹의 위협과 베이징의 베트남 전쟁에 대한 정책: 1963-1965”
인민해방군(PLA)과 같은 중국 자료에 따르면 1963부터 1965년 사이의 베트남 전쟁에 대한 중국의 정책은 미국이 주도하는 반중 동맹에 대한 중국의 정책의 중심이 되는 부분이었다. 1962년 일련의 위기 이후, 마오쩌둥과 급진적인 중국 지도자들은 미국이 주도하고 소련과 인도가 합류한 반중 동맹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였으며, 반중동맹이 인도차이나, 대만 해협, 중앙아시아, 히말라야 등에서 중국에 안보 위협을 가하고 있다고 보았다. 마오쩌둥은 중국 공산당과 인민해방군이 전면적인 국내 동원과 중국의 우호국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 그리고 적에 대한 현명한 외교적 접근 방식을 통합하여 이들을 처리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 결과 1962년 말부터 반중 동맹이 가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전쟁 준비의 일환으로 북베트남과 파테트 라오에 대한 중국의 지원을 증가시켰으나 이러한 중국의 지원은 의도치 않은 결과를 초래하였다. 북베트남이 중국의 지원으로 무력 투쟁을 확대하면서 미국과 소련이 베트남 전쟁에 추가 개입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동시에 중국이 직면한 중-미 대결의 상황에서 지원을 제한하고자 했던 중국의 목표 역시 베이징과 하노이 사이의 갈등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었다.
<패널 5: 전장에서의 경험, 갈등과 기억>
Nathalie Huynh Chau Nguyen
“제복을 입은 남베트남의 여성들”
1957년에 찍힌 흐릿한 사진에는 Bui Ngoc Thuy이 남베트남의 Cu Chi 상공에서 낙하를 마친 후 그녀 앞에 펼쳐진 낙하산을 들고 있는 모습이 찍혀있다. 북베트남에서 온 난민인 그녀는 1955년, 19세의 나이로 베트남 공화국군(RVNAF)에 입대하였다. 그녀는 공수 사단에서 7년간 복무했으며, 1950년대에 낙하산 자격증을 취득한 열 명의 여성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1975년에 이르러서는 RVNAF에 6,000명의 여성이 복무하고 있었다. 이 논문은 구술사와 자료를 바탕으로 RVNAF 여성 군인의 경험을 살펴본다. 이 여성들의 이야기는 딸, 자매, 아내, 어머니로서의 역할과 그들의 군 복무를 해내기 위한 협상뿐만 아니라 근대성과 전통 사이의 긴장과 갈등을 드러내주기도 한다. 그들의 삶은 남베트남 사회의 축소판이었다. 또한, 이 연구는 1975년 이후 여성들이 겪은 전후 수용소 생활과 재교육, 그리고 그들이 해외에서 새로운 삶을 재건하는 방식을 보여주고자 한다.
Xiaobing Li
“묻혀진 기억: 전해지지 않은 베트남 전쟁의 중국인 병사들의 이야기. 1965-1971”
베트남 전쟁 당시, 1965년부터 1971년 사이에 중국은 미국에 대항하고자 베트남과 라오스에 43만 명의 중국군을 파견하였지만, 중국과 베트남 정부 모두 하노이 측에 외국의 개입이 있었음을 공식적으로 부인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이 끝난 후 수 년 동안, 중국 참전군인들은 베트남 전쟁의 경험에 대해 이야기할 수조차 없었고, 베트남 전쟁은 중국에서 '잊혀진 전쟁'이 되었다. 저자는 1990년대부터 2020년대 사이, 회고록을 수집하고 중국의 참전군인들을 인터뷰하였다. 최근의 구술들은 사실적 공백을 메우는 것뿐만 아니라 전쟁을 전세계적 역사로 보는 연구에 기여하고,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였다. 각각의 참전군인들은 각자의 전쟁 경험의 특정 측면을 이야기한다. 구술사에서 드러나는 세부 사항들은 새로운 주제와 중요성을 발견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 논문은 첫째, 중국 공산당이 정치적 교리와 군대 내 당 제도를 통해 중국 인민군(PLA)을 장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두번쨰로, PLA는 외국 전쟁을 통해 민간인을 군인으로 전환하는 자체적인 방법을 가지고 있었다. 셋째, 중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은 중국의 안보 및 외교적 목표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와 전쟁을 통해 엮이면서, 냉전시기에 1960년대 주변부에 머물러있던 중국의 위치는 1970년대 초에 이르러서 중국은 중앙부에 위치하게 되었으며, 체제 속에서 생존할 수 있는 유리한 국제적 여건을 조성하는데 성공하였다. 그 후 30년도 되지 않아 중국은 가장 가난한 제3세계 국가 중 하나에서 세계 경제 강국으로 변모하였다.
Ron Milam
“베트남의 미국 전투병이 귀국하다”
이 논문은 베트남에서 전투를 경험하고, ARVN(남베트남군) 동맹국들과 함께 복무하면서 수백만 명의 "적" 병사들을 살해한 후, 그들의 복무에 대해서 다소 무관심한 국가로 돌아간 약 60만 명의 미군 병사들의 문제를 다룬다. 학문과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 후기(1970-1971)에 직접 복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저자는 복무 후 병사들의 민간인 생활로의 복잡한 적응과 참전 군인로서의 지위에 대해 다룰 것이다. 저자는 재향군인회 (VACOR) 산하의 특별 정부 직원(SGE)으로 일하면서 노숙, 에이전트 오렌지의 부작용, 군용 소각장으로 인한 청각과 호흡기 질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그리고 최근에 진단받게 된 도덕적 부상과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 개인적인 경험을 가지고 있다. 저자의 이러한 모든 정신적 및 신체적 문제들은 베트남에서의 군인, 선원, 공군 및 해병대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현재 생존하고 있는 베트남 전쟁 참전군인의 수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재향군인회는 복무한 약 270만 명 중 85만 명이 여전히 생존해 있다고 추정하고있다.
Lộ Khắc Tâm
“북베트남 군인으로서 전장에서의 실제 경험”
이 발표는 북베트남 군인으로 미국과의 전투에 참전한 저자 본인이 겪은 이전에 공유되지 않은 개인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1965년 Chu Prong과 Ia Drang Valley에서의 미군과의 첫 대치부터 East Sa Thay(1966년)와 North Kon Tum(1967년)에서 벌어진 전투까지, 저자는 경험이 없던 신병에서 중대, 대대 및 상급 부대의 노련한 지휘관으로 승진하였다. 그의 증언은 전장에서의 전략, 정치적 이념 교육, 전사자와 부상자의 처우 등 전쟁의 실제 현실을 조명하며 공식 역사에서 거의 포착되지 않는 목소리를 담고 있다. 이 발표는 개인 군인의 관점을 조명하며 베트남 전쟁에 대한 인간 중심적 시각을 통해 개인적인 경험과 전장에서의 현실이 베트남에서 어떻게 집단 대항을 만들어나갔는가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제공한다.
<패널 6: 젠더와 문화>
Heather Marie Stur
“전투를 보는 것: 베트남 전쟁에서의 미국 여성”
1950년대부터 1975년까지 미국 여성들은 군대, 적십자사 혹은 정부 기관을 통해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였다. 약 7,500명의 여성이 군 복무를 했고, 25,000명 이상의 여성이 민간인 자격으로 베트남을 방문하였다. 소수의 여성이 미국의 전투 병력 이전에 베트남에서 1975년까지 머물렀지만, 군인 혹은 민간인 자격으로 복무한 대부분의 미국 여성은 지상군이 처음 배치된 1965년부터 마지막 미군 전투 병력이 출발한 1973년 사이에 베트남에서 머물렀다. 여성들은 보병이나 전방 부대에 배치되지는 않았지만 미군 병사들과의 업무를 통해 전쟁의 트라우마를 경험하였다. 특히, 간호사나 적십자사 노동자들은 전투가 군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보았지만, 트라우마를 입은 군인을 돌봐야하는 직업의 특성상 본인들의 정신적, 정서적 부상을 뒤로 제쳐두어야 하는 경우가 잦았다. 베트남 전쟁의 경험은 일반적으로 남성의 관점에서 이야기되는데, 이는 남성만 전투 부대에서 복무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성들 또한 남성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전투를 “보았다.” 간호사들은 전쟁과 전투가 젊은 남성의 신체를 어떻게 파괴하는지 보았다. 적십자사 노동자들은 전쟁이 어떻게 베트남의 가족들을 망가뜨리는지를 목격했다. 여성 육군 부대 요원들은 전사한 미군둘의 유품을 포장해 가족들에게 보내는 일을 맡기도 했다. 베트남 전쟁 당시 참전한 미국 여성들의 경험을 살펴보는 것은 군 전투 부대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의 '전투를 보는' 모습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보여준다. 전쟁 트라우마와 외상 후 스트레스는 복무한 남성에게만 국한되지 않았으며, 미국 여성들은 복무 후 수십 년 동안 그들의 전쟁 트라우마를 겪어야만 했다.
Jane Griffith
“베트남민족해방전선(NLF) 속 베트남 여성들”
저자의 연구는 전쟁을 승리로 이끈 NLF의 여성 간부단의 역할을 기록한다. 미국의 전쟁에 대한 견해는 주로 전쟁과 남성 학자들에 의해 쓰여진다. 저자의 여성 간의 연구는 이러한 베트남 전쟁의 역사에 존재하는 공백을 메꾼다. 저자는 1970-73년 사이에 평화주의 단체인 the American Friends (Quaker) Service Committee를 운영하며 남베트남에서 인도주의적 활동을 해왔다. 저자는 이 기간 동안 활동을 통해 얻은 명성과 신뢰를 통해 Quang Ngai 지역에서 당시 NLF에 참여한 베트남 여성들과 돈독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다. 저자가 최근에 출간한 책은 NLF 선전관이었으며 두 발을 절단하게 된 본인의 절친한 친구와 함께 집필한 회고록이다. 1973년 저자는 지역 병원에 감금되어 고문당하던 정치범들의 이야기를 비밀리에 문서화하고 촬영할 수 있었다. 그 외에도, 다른 인맥을 통해 저자는 당시 NLF 간부였던 여성과 직접적이고 긴 인연을 맺을 수 있었다. “내가 평화를 꿈 꾼 마지막 날, Dang Thuy Tram의 일기(Last Night I Dreamed of Peace, the Diary of Dang Thuy Tram)”의 영문판 출판을 위해 팀을 꾸리던 당시, 저자는 Thuy의 많은 친구들과 만났으며, 그녀의 언니들과 함께 Thuy가 살해당한 Duc Pho 지역으로 여행을 가기도 하였다. 2005년에는 저자는 UMA 보조금을 받아 Sophie Quinn-Judge와 함께 게릴라 전투병부터 외교관까지 다양한 직책을 맡은 12명의 여성과 인터뷰를 진행하기도 하였다. 이 모든 연구들은 발표 된 적이 없으며, 오늘 이 곳에서 발표될 것이다.
Ann Marie Leshkowich, Martina Thucnhi Nguyen
“전시 중 베트남 아오자이: 패션, 시민권, 그리고 민족주의 (1954-1975)”
저자들이 2025년 8월 26일부터 12월 19일까지 College of the Holy Cross에서 공동 기획 중인 전시회와 함께, 이 논문은 베트남의 민족 의상인 아오자이가 베트남 안에서, 그리고 국제 무대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탐구함으로써 전쟁에 대한 신선한 접근방식을 택한다. 저자들은 남베트남의 두 "영부인"이었던 Trần Lệ Xuân(응고딘지엠 대통령의 처제)과 Nguyễn Thị Mai Anh(응우옌반티에우 대통령의 아내)의 자기 표현방식과 정치 프로그램을 통해, 두 여성의 주체성을 풍자하거나 무시하는 지배적인 서사를 수정하고자 한다. 비판적인 젠더 중심의 분석을 통해, 우리는 두 여성의 공공 이미지 (행동, 말, 외모 그리고 특히 특정 스타일의 아오자이의 세심한 큐레이션)에 주목하며, 이 여성들이 의도적으로 스스로를 남베트남이 열망하던 국제정 근대성의 상징과 베트남 문화유산의 보존의 상징으로 만들고자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이 상징하고자 했던 이 두 가지의 것은 당시 남베트남의 지도부가 생각하기에 북베트남에 의해 공격 받는 것이기도 하였다. 또한, 이들의 공적 인물로서의 페르소나가 어떻게 각 영부인이 생각하던 (종종 비판과 논란이 되기도 하는) 베트남 사회에서의 여성의 역할과 시민적 책임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저자들의 분석은 일견 일상적이고 무해해보이는 의상이 어떻게 베트남 민족주의를 주장하고 (내전/국제전으로서의) 전쟁 당시에 문화적 정체성을 만들고자 하였는지를 보여준다.
Maya Nguyen
“베트남 전쟁에서의 아동과 청소년의 참여: 공산주의, 유교 그리고 아동기”
베트남 공산주의 투쟁에서 아동과 청소년들은 미군과 미국의 동맹국들을 상대로 스파이, 간호, 전투, 물류 지원 등의 다양한 활동을 수행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 당시 그들의 경험은 아직도 많은 경우 탐구되지 않고 있다. 이 논문에서, 저자는 과거에 베트남 공산주의 군대와 관련된 참전군인들과 진행한 32개의 인터뷰를 돌아보며, 어린 나이에 후방에서 전쟁을 지원한 사람들을 살펴본다. 구체적으로, 저자는 전쟁에 아동을 동원한 20세기 중반 베트남의 사회 구조를 조사하기 위해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유교와 같이 베트남에 존재하고 있던 문화적 틀과 얽혀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이 두 가지가 상호작용하여 아동과 청소년의 경험을 만들어냈는지를 살펴본다. 저자의 인터뷰 자료에 따르면, 아동들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으며 이념적 동기가 그들의 전쟁 동원의 동기가 되지는 않았으나, 그들이 전쟁에 참여한 원인이 계급, 정의 그리고 평등과 같은 개념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이러한 명백한 역설은 정치 간부들과 베트남 게릴라가 공산주의 이념을 아이들이 쉽게 접할 수 있고 재해석할 수 있도록 일상에 녹아 들어있으며 쉽게 적응할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전파하였기 때문이다. 이 연구는 어떻게 전쟁 속에서 아동과 청소년들이 문화적, 사회적 구조를 통해 이념적 영향을 다루는지를 보여줌으로서 전쟁, 이념과 아동기의 연구에 기여한다. 베트남 전쟁에서의 아동들의 경험에 주목하면서, 이 연구는 전쟁 속 일상 정치에 주목하고, 거대한 이념 전쟁 속에서 비정치적으로 보이는 아이들의 삶 속에서 아동들이 스스로 본인들의 역할을 만들어 나가는 그들의 주체성에 주목한다.
<패널 7: 미국에서의 베트남 전쟁>
Christian Appy
“국방부 보고서(the Pentagon Papers)가 베트남 전쟁이 끝나도록 도왔는가?”
1971년, Daniel Ellsberg가 보스턴의 연방법원에 도착했을 때, 한 기자가 7,000페이지 분량에 달하는 베트남 전쟁 관련 극비 역사를 유출한 혐의로 수감되는 것이 걱정되는지 물었다. 엘스버그는 "당신이라면 이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 감옥이라도 가지 않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이러한 답변은 또 다른 질문을 만들어낸다. 엘스버그가 유출한 국방부 극비서류가 실제로 베트남 전쟁을 종식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는가? 명확한 답은 없지만, 엘스버그의 행동은 분명 어떠한 결과를 야기했으며, 그 중 일부는 닉슨 대통령의 몰락과 같은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야기해 1973년부터 1975년까지 미국이 남베트남 정권의 붕괴를 막기 위해 직접 전쟁에 재진입할 수 있는 현실적인 가능성을 종식시켰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닉슨 행정부의 국방부 보고서 폭로에 대한 대대적인 과잉 반응이 워터게이트와 닉슨 대통령 탄핵으로 이어진 가장 중요한 계기였다는 것이다. 저자는 국방부 보고서 사건이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외교정책을 수행할 수 있는 권위에 대한 불신을 키우고, 그 전까지 전쟁에 대해 확고한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던 미국인들(국회의원들을 포함하여)이 전쟁을 반대하는 입장을 가지게 되는 데에 기여했다고 주장한다.
Jacob Ganz
“무시된 경고: 1964년 Sigma Wargames(2)와 베트남으로 가는 길”
1964년의 첫 번째 Sigma Wargame은 베트남에서 미국의 실패를 예견했지만 그것의 경고는 무시되었으며, 미국은 전쟁을 향한 비극적인 행진을 이어나갔다. 이 논문은 1964년 주요 의사결정 당시에 진행되었던 Sigma Wargames에 집중하며 존슨 행정부가 전쟁을 접근하는 방식에서 간과된 여러 통찰들을 살펴본다. (Wargames 중 하나였던) 시그마 I-64에는 국가안보보좌관 McGeorge Bundy, 합동참모본부 의장 Earle Wheeler, CIA 국장 John McCone, 공군총장 Curtis LeMay나 Maxwell Taylor 장군 등 존슨 행정부의 주요 인사들이 대거 속해있었다. 이러한 주요 인사들의 존재 하에, 시그마 게임은 존슨 행정부의 예측과는 달리 전쟁의 격화가 1968년에 이르러서는 500,000이상의 미군을 필요로 하고 국내외적으로 항의를 일으켜 장기적으로 미국에게 곤경을 가져올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이러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주요 인사결정자들에게 영향을 거의 끼치지 못했고, 존슨 대통령이 이러한 예측을 보고 받았는지조차도 의심스러운 상황이다. 시그마 게임은 그것의 국제적인 시각에서도 두각을 드러내는데, 당시 인사결정자들은 미국의 전쟁참여가 국제적으로 어떻게 비추어질지를 고민하였고, 이는 호치민의 극적인 유엔 방문으로 극에 달했다. 실제로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전쟁의 국제사회의 의견에 대한 강조와 국제적인 분노와 항의를 불러일으 킬 수 있다는 시그마 게임의 예측은 역사가들이 인정하는 것보다 시그마 게임이 미국의 의사결정에 미친 영향이 크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 논문은 이로서 베트남 전쟁으로 이어진 미국의 의사결정과 관련된 역사학의 공백을 메꿀 것이다. 시그마 I-64를 살펴봄으로써, 이 논문은 어떻게 미국의 의사결정자들이 명확한 경고를 무시하고 미국 역사상 가장 끔찍한 전쟁으로 나아갔는지를 새로운 관점에서 분석한다.
Connor Mitchell
“불협화음에서 춤추기: 1968년 구정공세와 워싱턴과 사이공 사이의 단절”
현재의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 정치/군사 지도부 역사 기록학은 항상 “어떻게” 미국의 패전이 가능했는가에 집중한다. 역사학자들은 주로 사이공,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이나 혹은 워싱턴, 그리고 존슨 대통령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이 논쟁은 사이공의 군사 지도부와 워싱턴의 정치 지도부가 결과적으로 패전의 책임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불필요하게 복잡하게 만든다. 이 논문은 대통령 총사령관과 베트남의 군사 원조 사령부 두 집단의 정보 수집과 68년 구정공세까지 이어진 두 집단의 긴장관계를 조금 더 조심스럽게 살펴보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미국이 전쟁에 참전 할 때, 대통령과 내각은 대전략적 목표와 외교 정책을 세우며, 이 정책들은 보통 하위 단위의 군사 지휘부가 전술적/전략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구정공세는 그렇게 알려진 정치적-군사적 리더십의 공생관계가 끝났음을 미국 대중에게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일관된 미국의 외교 정책에 대한 대중의 동의와 호응이 흔들리게 되었으며, 이는 결국 베트남에서의 미국의 “승리”의 희망을 꺼뜨리게 되었다. 결국, 베트남에서의 미국의 진정한 적은 미국의 정치적 지도부와 군사 지도부 간의 단절이었다.
Chester Pach
“전쟁 속 전쟁: 베트남 전쟁의 텔레비전 보도와 논쟁적인 유산”
영화 속 주인공 알리는 “난 베트남이 어디 있는지 알아. 텔레비전에 있잖아.” 라고 말한다. 세계 헤비급 복싱 챔피언과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텔레비전은 베트남 전쟁에 대한 뉴스와 이해의 주요 원천이었다. 이 논문은 미국 텔레비전 뉴스 프로그램의 전쟁 보도 방식과 케네디, 존슨, 닉슨 행정부가 편향적이고 선정적인 보도에 대응하고자 선택한 전략들을 살펴본다. “주요 전선”이 “여기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었다고 믿었던 존슨처럼, 혹은 “우리의 최악의 적이 언론”이라고 주장하던 닉슨의 말과 같이 텔레비전은 주요 전장이 되었다. 저자는 뉴욕타임즈 특파원이었던 David Halberstam이 “전쟁 속 전쟁”이라고 불렀던, 다시 말하자면 사이공 정부의 한계나 문제점과 미국의 참전 노력의 결점 등을 짚어낸 언론과 이러한 보도를 악의적이라고 여겼던 케네디, 존슨, 닉슨 행정부 사이의 갈등을 분석한다. 저자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텔레비전 보도가 그것이 편향적이거나 자극적이어서가 아니라, 논쟁적인 전쟁의 어려운 현실, 높은 비용과 불편한 진실을 보여줬기 때문에 대통령들을 곤혹스럽게 했다고 주장한다. 이 논문은 대통령 도서관과 미디어 아카이브에서의 저자의 광범위한 연구와 당시에 전쟁을 다뤘던 기자들과의 인터뷰에 기반하고 있다. “전쟁 속 전쟁”은 오래 지속되는 유산을 남겼다. 베트남에서의 무제한적인 (검열되지 않은) 보도들이 미국 내에서 전쟁에 대한 지지 기반을 악화시켰다는 믿음은 그 이후 이어진 그레나다, 파나마와 이라크에서의 미국의 군사 개입에 대한 뉴스 보도를 제한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또한, 워싱턴 포스트가 구정공세 50년 후에 “Walter Cronkite(미국의 방송기자/앵커)가 이끈 뉴스 미디어가 베트남 에서의 전쟁에서 패배했는가?”라는 질문과 같은 지속되는 오해들을 낳기도 하였다. 케네디, 존슨과 닉슨 행정부가 전쟁에 대한 뉴스보도의 신빙성을 낮추려는 노력은 선례를 남겼고 이후 세대의 정부 관계자들에게 21세기의 “가짜 뉴스”와 관련된 갈등에서 사용할 수 있는 주장을 마련해주었다. 반 세기 전의 뉴스 미디어를 둘러싼 갈등은 오늘날과도 고통스럽게 연관되어 있다.
역자 주
[1] 미국의 역사학자 Lewis Sorley가 주장하며 내새운 “a better war”(더 나은 전쟁)은 당시 군사령관이었던 Creighton Abrams가 그 전의 사령관들보다 베트남과 전쟁에 대한 더 뛰어난 이해력과 전술로 베트남전을 유리하게 이끌어 갔을 뿐만 아니라 남베트남의 전쟁 수행력을 발전시켰다고 주장한다. 그에 이어서 Sorley는 당시 미국 국회의 예산 축소가 패전의 원인이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https://warontherocks.com/2017/08/the-heroic-leader-and-the-better-war-from-vietnam-to-afghanistan/)
[2] 1962년부터 1967년사이에 미국에서 진행한 전쟁 시뮬레이션. (https://warontherocks.com/2024/09/the-wargames-that-prophesized-americas-defeat-in-vietnam/)
* 번역에 수고해주신 신스완 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하버드 학술대회 “50년 후: 베트남전쟁에 대한 새로운 관점들”, 한베평화재단 구수정 이사 발표
하버드 케네디 스쿨(Harvard Kennedy School)의 하버드 글로벌 베트남전쟁 연구 프로젝트(The Harvard Global Vietnam Wars Studies Initiative, GVWSI)에서 지난 10월 3-4일, 이틀에 걸쳐 학술 대회 “50년 후: 베트남전쟁에 대한 새로운 관점들(Fifty Years On: New Perspectives on the Vietnam Wars)이 진행되었습니다.
한베평화재단의 구수정 이사가 이번 학술 대회에 초청되어 ‘국제적 관점’ 섹션에서 “하나의 전쟁 두 개의 기억: 한국과 베트남(A War with Two Memories: South Korea and Vietnam)”을 주제로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학살 문제와 관련된 발표를 하였습니다.
이번 학술 대회에는 베트남전쟁과 관련된 다양한 층위의 문제가 다양한 발제자들을 통해 다뤄진 자리였고, 최근 대한민국 사법부가 국가배상소송 1-2심 판결로 그 진실과 책임을 인정한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문제가 국제적인 자리에서 다뤄진 의미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아래 버튼을 클릭하면 이번 학술 대회의 개요와 발제 요약 등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버드 케네디 스쿨 홈페이지에 공개된 이번 학술대회의 발표문 요약 자료를 한국어로 번역한 것을 공유합니다.
학술 대회 내용 보기
* 사진: 하버드 케네디 스쿨의 학술 대회 공지 화면 캡처
* * * * * *
50년 후: 베트남 전쟁에 대한 새로운 시각
GVWSI 2025 학술대회
<패널 1: 미국>
Christopher Goscha
“전쟁 이전의 전쟁: 어떻게 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국의 베트남 개입이 그 이후를 만들었는가”
미국은 1965년 린든 존슨 대통령이 베트남에 병력을 배치하기 전부터 베트남에 대해 알고 있었다. 미국의 베트남에 대한 전략적 관심은 2차 세계 대전부터 시작되었으며, 특히 태평양 전쟁의 시작과 종전 당시에 이러한 미국의 관심은 더 두드러졌다. 이 논문은 먼저 1940년대 일본의 관심이 남쪽으로 돌아서기 시작하면서 왜 미국이 베트남에 지대한 전략적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가를 살핀다. Frank Michelin이 주장했듯, 인도차이나에서 태평양 전쟁의 시작은 1940-41년으로 볼 수 있다. 이 논문은 두번째로 1945년 초에 미국 해군이 남중국해를 침략한 것을 살펴본다. William Halsey 제독과 해군 중장 John McCain (베트남 전쟁 영웅 John McCain의 아버지인)의 지휘 하에 미국은 1945년 1월 인도차이나에 대대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이 1월의 공격과 그 이후에 이어지는 일련의 공격들은 그 이후에 베트남에 오는 모든 사건들에 중요한 의의를 가지지만, 이 모든 것이 일본의 Cam Ranh Bay 해군 기지를 포함한 주요 인도차이나 보급로를 끊기 위한 시도이기도 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2차 세계대전으로부터 이어지는 이 두 사례는 그 이후에 이어질 인도차이나의 세 전쟁들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줄 수 있을 것이다.
David Biggs
“그들이 있던 곳: 인류적 관점에서 본 베트남의 땅과 환경전쟁(Ecowar)”
폭격, 빠른 기지도시 건설과 전례가 없던 네이팜과 최루탄 등의 화학무기 사용부터 에이전트 오렌지까지, 베트남은 생태계 파괴적 전쟁, 혹은 환경전쟁(Ecowar)으로 1960년대부터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최근 60년간의 많은 연구, 소송과 국제적 차원에서의 복원 노력에도 불구하고 화학무기의 개발부터 사용, 토지 몰수, 기지 폐쇄와 전후 대처 등의 지역과 개인, 그리고 인간의 관점에서의 환경전쟁에 대한 연구는 매우 적다. 베트남에서의 현장 연구와 하버드의 Matthew S. Meselson과 유전학자, 생태학자 등의 전문가와 지역단체 리더와 기록들을 기반해 필자는 토지 몰수, 기지 폐쇄와 화학무기전쟁과, 전후 오염 지역 정화 작업과 그로 인해 영향을 받은 자들의 삶을 발전시키고자 노력 중인 과학자와 운동가들의 이야기를 인류적 관점에서 보고자 한다.
Geoffrey Wawro
“베트남 전쟁은 이길 수 있었는가?: 동남아시아에서의 미국의 과도한 확장에 대한 새로운 연구”
미국이 1969년 이후로 북베트남을 침공하고 피난처를 습격하고, 병력을 추가하고, 예산을 추가 배정했더라면 Creighton Abrams의 “더 나은 전쟁”[1]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강력하게 주장되어왔다. 미국과 영국의 기록에 기반한 이 연구는, 그러한 주장들이 모든 부분에서 현실과 다르다고 주장한다. 1968년에 미국의 방위산업 예산은 이미 연방정부의 예산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였으며 GDP의 10프로에 달하는 지속이 불가능한 수준에 이르렀다. 그 결과로 미국의 인플레이션은 1965에서 67년 사이에 두 배 이상 치솟았으며 1967에서 1970년 사이에 다시 한 번 두 배 가까이 올랐다. 경제적으로 전쟁을 확장하는 현실적인 방안이 존재하지 않았다. 전쟁을 지원할 자금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워싱턴이 어디에서 군사력을 동원할 수 있었겠는가? 1968년에 미국은 이미 육군 7사단과 해병 2사단, 공군 10비행단, 두 대에서 네 대 사이의 항모전대가 베트남에 파병되어있었다. 1967년에는 베트남의 요구로 육군 9개와 해병 3개 사단으로 구성된 미국의 예비군이 육군 1개와 해병 1개 사단으로 줄어들었다. 더 많은 병력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워싱턴이 어떻게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을것인가? 1968년에 54만 명의 미군부대로는 고작 6만 명 미만의 전투부대를 형성할 수 있었는데, 이 보잘 것 없는 수의 부대마저도 몬타나 주 크기의, 숲이 우거진 나라에서 실종되었다. 10% 미만의 작전만이 적을 포착하는데 성공하였다. 베트남에서 미국의 패배는 국채 증가, 예산 적자, 인플레이션, 악화되는 의회, 반전 시위, 동남아시아 외의 지역에서의 지역 패권 경쟁과 미군의 대비 위기 등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배경적 요인들과 미국의 베트남에서의 무용성과 더해지면서 미국의 군사작전 확장은 불가능해졌다. 존슨 대통령이 1968년 대통령직 (재선출마)을 포기했을 때, 그는 이러한 현실을 인정했으며, 닉슨도 마찬가지였다. 닉슨은 겉으로는 대담한 척 보였지만 그는 재임 기간 내내 패닉에 빠진 채 예산을 안정시키고,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고 (미군) 사상자를 감소시키고, 의회와 언론과 대중을 달래기 위해 노력하기 위해 (베트남에 파병된) 미군을 철수시켰다.
<패널 2: 남베트남>
Edward Miller
“남베트남의 내전들: 메콩 강 삼각주의 주권, 공간 그리고 폭력”
최근 몇 년간, 역사학자들은 베트남에 관한 오랫동안 외면되어온 사실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베트남에서의 전쟁은, 다른 것들을 제쳐두고, 일단 베트남인들의 내전이었고, 셀 수 없는 베트남인들이 내전의 경험으로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전쟁을 내전이라고 부를 때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그렇게 이야기 하는가? 그리고 이러한 접근은 베트남 전쟁을 연구하고 생각하는 우리의 방식을 어떻게 바꾸는가? 이 논문에서 나는 내전적 성격의 전투를 단순히 남-북 간의 폭력으로 보는 것을 넘어 공간과 주권과 관련된 전쟁으로 보고자 한다. 나는 특히 이러한 시각을 1,2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내전의 성격이 가장 강했던 메콩 강 삼각주의 Bến Tre지역을 중심으로 보고자 한다. 인도차이나 전쟁들을 내전으로 보는 시각은 주요 외세들을 주변화한다는 주장에 반해, 나는 이러한 분석이 1차 전쟁에서의 프랑스, 그리고 후에는 미국의 메콩 강 주변에서 행사한 제국적 군사개입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내전은 또한 메콩 강 삼각주뿐만 아니라 나머지 베트남에서의 베트남 전쟁의 과정과 그 이후의 결과를 이해하는데에도 필수적이다.
Sean Fear
“내부에서부터의 몰락?: 남베트남의 2공화국의 흥망성쇠 1967-1975”
남베트남의 정치적 역사는 베트남 전쟁, 특히 전쟁의 마지막 단계에 있어서 많은 영미권 논의에서는 제외되어 왔다. 그러나 반공주의자들 사이에서의 사이공 정부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은 전쟁의 결과에 있어 중대한 요인 중 하나였다. 이 발표는 1967년에 시행된 야심찬 개헌을 통해 정치적 혼란에 질서를 만들고자 했던 남베트남의 “2공화국”을 평가한다. 발표는 1968년의 구정대공세 (1968 Communist Tet Offensive)를 시작으로 남베트남의 도시와 마을을 휩쓸었던 반공주의의 흐름을 살펴보며, 월남정부의 경제, 농업 그리고 정치 분야에서의 대대적인 개혁 정책을 분석한다. 1968년 이후 시기는 베트남에서의 반공주의 결성과 응집이 최고조였던 시기에 분명하며, 한동안은 전쟁의 흐름이 월남으로 넘어오는 듯 했다. 그러나 군정은 민간 정당과 기관들을 제외하고 정치적 권력을 독점하면서 호의적이었던 흐름을 스스로 버리게 되었다. 티에우의 독재정치는 정부의 정당성이 기반해있던 헌법적 질서를 배반하였으며 그로 인해 1968년 이후의 열기를 식히고, 미국의 지원 삭감을 불러왔으며, 결과적으로는 1975년 월남의 몰락을 불러왔다. 새로운 베트남어 사료들에 기반해, 이 발표는 베트남 전쟁을 종전으로 이끈 주목받지 못한 월남의 주요 인물들을 살펴본다.
Edwin Moise
“누구의 전투보병인가?”
David Prentice가 최근에 발표한 주요 저서 Unwilling to Quit (2023)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주장은 닉슨 대통령이 1969년 베트남에서 미군을 철수시켰을 때, 월남 대통령인 응우옌반티에우가 그것을 반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티에우는 월남군이 미 공군의 지원과 군수지원을 미군의 지상 부대보다 더 필요로 했다. 미국의 사상자를 줄이는 것이 미국의 여론을 얻는 것이 미국의 지원을 유지할 수 있다는 논리에서였다. 이 논문은 이러한 맥락에서 여러 부분을 살펴본다. 초창기 미군 철수의 시기에는 미군의 병력이 크게 줄어들진 않았지만, 곧 극적으로 지상전의 부담이 월남군에게 전가되기 시작했다. 1969년 후반기에는 3.3:1의 비율로, 10,083명의 월남군 사상자와 3,074 미국군 사상자가 있었다. 전쟁 기간 내내 월남군 사상자의 수가 미국군 사상자의 수보다 항상 높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그 외 인력의 비율에 비해 지상군은 비정상적으로 월남군의 수가 많고 미국군의 수가 적었다. 티에우 대통령이 잃을 수 없었던 것은 미군 지상부대가 아니라 미군 지원부대 였던 것이다.
Phi-Van Nguyen
“비공산주의 베트남의 국가주의의 정치: 베트남 공화국(월남)의 이민자로서 유권자에 대한 통치 1949-1956”
권위자가 내전을 지나 새로운 민족국가를 세우려고 할 때 딜레마에 빠지곤 한다. 한편으로 그들은 그들의 대표하고자 하는 민족에게 자비심과 존중을 보여야 한다. 또 한편으로 그들은, 특히 인민이 누구인지 모를 때, 혹은 그들 중 누군가가 체제 전복을 시도하려고하는 것이 아닌가 고민해야한다. 이러한 문제는 특히 개인을 특정지을 수 있는 구조나 수단이 무너졌거나 상당한 수의 인구가 원적에서 벗어나 새로운 곳으로 이동했을 때 중요해진다. 월남은 어떻게 정치적 정당성과 안보 위협 사이의 아슬아슬하고 연약한 균형을 유지했는가?
<패널 3: 북베트남>
Pierre Asselin
“하노이의 문화 외교 공세: 1965-75”
이 발표는 베트남 공산주의 당국의 전쟁의 목표를 위해 1960년 후반과 19970년대 초 문화 도구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더 정확하게 이 발표는 베트남 예술가와 지식인들을 이용하여 세계무대에서 당국의 “좋은 이미지”를 만들고 “국가 구원을 위한 반미 대항”을 촉진시키고자 한 것에 집중한다. 베트남 민주공화국 (DRVN)의 문화적, 예술적 방식을 통해 외국 정부와 여론과의 관계를 성립, 발전 그리고 유지하고자 한 방식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연구는 그러한 노력의 결과보다는 그러한 정책의 의도, 이유, 그리고 현실화하는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문화와 예술을 통해 외부의 마음을 얻기 위한 노력은 한편으로는 물질적인, 정치적인 그리고 윤리적인 지지를 얻고자 함이기도 하였으며, 동시에 사이공의 정당성을 약화시키고 워싱턴을 고립시키고자 함이기도 하였다.
Dang Kim Son
“호치민의 전시 이데올로기”
이 발표는 새로운 시각에서 호치민의 전시 이데올로기를 보며, 그것이 근본적으로 전쟁보다는 평화를 향해있었다고 주장한다. 호치민에게는 인민의 평화로운 삶과 행복이 가장 중요하였으며 전쟁과 분쟁은 모든 평화로운 저항방식이 소진되었을 때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이었다. 무력충돌이 불가피하자 그는 독립과 자유는 모든 수단을 사용해서라도 지켜져야 한다고 주장했고, 동시에 외세의 철수를 위한 평화 협정이 이루어져야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원칙은 프랑스와 미국에 대한 저항운동 내내 그의 리더십의 중심에 있었다. 호치민을 전쟁을 일으키는 설계자로 보는 기존의 해석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각에서 독립에 대한 비전이 화해와 평화의 열망과 분리될 수 없었던 호치민의 비전을 보여준다.
Ho Son Dai
“응우옌찌타인 장군의 월남 전장에서의 역할 (1964-1967)”
이 발표는 응우옌찌타인(Nguyen Chi Thanh) 장군이 베트남 전쟁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연구에서 주목받지 못하였다고 주장한다. 공산당의 중앙 위원회 (Politburo)출신이자 베트남 인민 정치위원회장으로, 미국의 1964년 공습 당시, 타인은 월남 중앙사무국 총비서, 군 위원회 총비서이자 남베트남해방전선(NLF)의 정치 장교로 임명되었다. 1964년부터 67년까지 그의 주요 지시는: NLF의 중심 병력 마련, 지역 보급 체제의 건설, 반-미군 군사작전의 설립과 남부 명령체계의 개편 등이 있었다. 1967년에 구정 공세를 준비하던 중 타인은 돌연 사망하게 되었으나, 그의 지도는 1975년까지 전쟁의 방식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 타인 장군의 역할을 살펴보면서 이 연구는 역사기록의 빈 공간을 채워넣을 뿐만 아니라 베트남의 리더십이 어떻게 불균형을 회복력으로 변화시켰는지, 그리고 NLF와 PAVN(베트남 인민군)이 어떻게 미국에 대항하는 세력으로 전쟁의 흐름을 바꿔놓았는가를 보여준다.
Nguyen Manh Ha
“베트남 전쟁의 공산당의 첫 번째 서기장, 레주언(Le Duan)의 역할 (1954-1975)”
이 논문은 1954년부터 75까지 베트남의 혁명의 길에서 레주언의 역할을 살펴보면서, 그의 정책가로서의 위치뿐만 아니라 미국에 맞서기 위한 그의 군대, 정치 그리고 외교를 조율하고자 했던 그의 노력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생략) 이러한 분석과 더불어, 필자는 레주언을 정치가, 당의 수뇌부로서의 개인적인 감상을 덧붙이며 베트남의 혁명적인 리더십에 있어 레주언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주목받지 못한 레주언의 유산을 살펴보며 이 연구는 베트남전쟁의 정치력에 대한 연구에 기여하고, 정책, 전략과 개인이 전쟁의 결과를 낳는 과정에서 어떻게 교차하는가 보고자 한다.
<패널 4: 국제적 관점>
James G. Hershberg, Sergey Radchenko
“모스크바, 하노이, 그리고 베트남 전쟁의 격화: 소련(구 소련권)의 기록에서의 새로운 증거”
이 발표는 전쟁의 국제적 측면에 대한 러시아/소련권의 아카이브의 새로운 증거를 발표 및 논평하며, 특히 1966-1967년 전쟁이 격화되던 시기를 본다. 상당수의 문서는 소련-북베트남 회담(Leonid I. Brezhnev, Pham Van Dong, Vo Nguyen Giap과 Le Duc Tho 등의 인물들을 중심으로 하는)을 다룬다. 저자들은 최근 저자들의 저서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자료를 얻었으나, 일부만이 최종 논문에 실렸고, 일부는 출판된 후에야 공개되었다. 이러한 자료들을 평가함으로써 모스크바-하노이 관계의 역학의 새로운 측면을 탐구할 수 있으며, 두 국가의 군사 원조 및 외교("마리골드" 이니셔티브를 포함하여), 중국-소련 분열의 영향, 변화하는 군사 상황과 이후의 전쟁 전략 등이 포함된다.
Ku Su Jeong
“하나의 전쟁 두 개의 기억: 한국과 베트남”
이 페이퍼는 한국과 베트남에서의 분열되고 혹은 충돌하는 베트남전쟁에 대한 기억들을 살펴본다. 각 국가가 어떻게 기념관들(베트남의 증오비와 한국의 월남 참전 기념비)을 통해 전쟁을 묘사하였는가를 통해 전쟁을 바라보는 두 시각을 보여준다. 이 기념비들은 피상적이고 개인과 집단의 깊은 개인적 경험을 묵살하고 덮어버리는 공공의 기억을 드러나게 한다. 베트남의 기념비들은 베트남의 대항기억으로서, 신랄한 “망각의 폭력”에 대한 베트남의 반응이자, 민간 피해자들의 고통과 경험에 목격자가 되게 함으로써 공식 기억에 대한 저항의 운동이기도 하다. 반면, 한국의 기념비들은 공식적으로 승인된 기억을 상징하고 전쟁을 미화하며 민간피해에 대한 인정을 회피하며 한국의 “폭력의 망각”을 지속시킨다. 궁극적으로, 이 논문은 같은 전쟁에 있어서 한국과 베트남이 어떻게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이러한 대비되는 기억에서 어떠한 종류의 역사적 갈등이 생겨나는지를 살펴본다. 전쟁의 경험이 하나의 국가를 넘어설 때, 기억에 대한 논의는 초국적이여야만 한다. 한국과 베트남은 식민주의, 분단과 전쟁의 아픈 경험을 독특하게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역사적 고찰을 통해 과거를 마주하고, “고통의 연대”를 구축하는 것이 동아시아의 진정한 화해와 평화로운 미래를 위한 초석을 마련할 수 있다.
Mitsuaki Ono
“오키나와의 초국가적 차원의 반-베트남전 운동”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오키나와는 1972년까지 미군의 통치를 받았으며, 베트남 전쟁 동안 오키나와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군사 중심지로 작동하였다. 전쟁은 오키나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깊은 영향을 미쳤고, 그것은 지역 내 전쟁과 직결된 군사 점령으로부터의 해방의 목소리도 불러일으켰다. 이 논문은 젊은 오키나와 활동가, 반전 흑인 미군(GI)과 미국 반전 운동가의 세 명의 행위자가 교차하며 상호 변화하는 과정을 살펴본다. 미군의 억압적인 통치 아래 오키나와 주민들은 1950년대부터 섬을 일본으로 반환할 것을 요구해 왔으나 1960년대 후반, 일본 정부과 미국 정부가 미군 기지를 철거하지 않고 오키나와로 반환하기로 합의하자 그에 대한 항의로 오키나와 활동가들은 반환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새로운 용어와 형태로 자신들의 요구를 표현하며 단순한 반환이 아닌 군국주의와 전쟁으로부터의 해방을 촉구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1969년경 흑인 반전 GI와 미국 반전 운동가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활동가들은 미군 내 군인들이 직면한 내부 억압과 인종차별과 더불어, 군사 폭력이 베트남, 오키나와, 흑인 모두에게 끼치는 영향과 그 방식을 이해하게 되었다. 동시에, 흑인 GI들은 일본과 미국 모두에 의해 지배된 오키나와의 현대 역사를 알게 되었고, 오키나와 주민들의 군사 기지 철거 요구를 지지하게 된다. 또한, 태평양 상담소(the Pacific Counseling Service)와 같은 미국의 활동단체는 오키나와 활동가와 흑인 GI들 간의 소통 촉진을 위해 국제 네트워크를 활용하기도 하였다. 이 논문은 각기 다른 세 행위자들의 진화하는 관계를 살펴보고, 오키나와에서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이 초태평양, 초국가적 연대를 형성했다고 주장한다.
Yu Yao
“반중동맹의 위협과 베이징의 베트남 전쟁에 대한 정책: 1963-1965”
인민해방군(PLA)과 같은 중국 자료에 따르면 1963부터 1965년 사이의 베트남 전쟁에 대한 중국의 정책은 미국이 주도하는 반중 동맹에 대한 중국의 정책의 중심이 되는 부분이었다. 1962년 일련의 위기 이후, 마오쩌둥과 급진적인 중국 지도자들은 미국이 주도하고 소련과 인도가 합류한 반중 동맹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였으며, 반중동맹이 인도차이나, 대만 해협, 중앙아시아, 히말라야 등에서 중국에 안보 위협을 가하고 있다고 보았다. 마오쩌둥은 중국 공산당과 인민해방군이 전면적인 국내 동원과 중국의 우호국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 그리고 적에 대한 현명한 외교적 접근 방식을 통합하여 이들을 처리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 결과 1962년 말부터 반중 동맹이 가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전쟁 준비의 일환으로 북베트남과 파테트 라오에 대한 중국의 지원을 증가시켰으나 이러한 중국의 지원은 의도치 않은 결과를 초래하였다. 북베트남이 중국의 지원으로 무력 투쟁을 확대하면서 미국과 소련이 베트남 전쟁에 추가 개입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동시에 중국이 직면한 중-미 대결의 상황에서 지원을 제한하고자 했던 중국의 목표 역시 베이징과 하노이 사이의 갈등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었다.
<패널 5: 전장에서의 경험, 갈등과 기억>
Nathalie Huynh Chau Nguyen
“제복을 입은 남베트남의 여성들”
1957년에 찍힌 흐릿한 사진에는 Bui Ngoc Thuy이 남베트남의 Cu Chi 상공에서 낙하를 마친 후 그녀 앞에 펼쳐진 낙하산을 들고 있는 모습이 찍혀있다. 북베트남에서 온 난민인 그녀는 1955년, 19세의 나이로 베트남 공화국군(RVNAF)에 입대하였다. 그녀는 공수 사단에서 7년간 복무했으며, 1950년대에 낙하산 자격증을 취득한 열 명의 여성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1975년에 이르러서는 RVNAF에 6,000명의 여성이 복무하고 있었다. 이 논문은 구술사와 자료를 바탕으로 RVNAF 여성 군인의 경험을 살펴본다. 이 여성들의 이야기는 딸, 자매, 아내, 어머니로서의 역할과 그들의 군 복무를 해내기 위한 협상뿐만 아니라 근대성과 전통 사이의 긴장과 갈등을 드러내주기도 한다. 그들의 삶은 남베트남 사회의 축소판이었다. 또한, 이 연구는 1975년 이후 여성들이 겪은 전후 수용소 생활과 재교육, 그리고 그들이 해외에서 새로운 삶을 재건하는 방식을 보여주고자 한다.
Xiaobing Li
“묻혀진 기억: 전해지지 않은 베트남 전쟁의 중국인 병사들의 이야기. 1965-1971”
베트남 전쟁 당시, 1965년부터 1971년 사이에 중국은 미국에 대항하고자 베트남과 라오스에 43만 명의 중국군을 파견하였지만, 중국과 베트남 정부 모두 하노이 측에 외국의 개입이 있었음을 공식적으로 부인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이 끝난 후 수 년 동안, 중국 참전군인들은 베트남 전쟁의 경험에 대해 이야기할 수조차 없었고, 베트남 전쟁은 중국에서 '잊혀진 전쟁'이 되었다. 저자는 1990년대부터 2020년대 사이, 회고록을 수집하고 중국의 참전군인들을 인터뷰하였다. 최근의 구술들은 사실적 공백을 메우는 것뿐만 아니라 전쟁을 전세계적 역사로 보는 연구에 기여하고,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였다. 각각의 참전군인들은 각자의 전쟁 경험의 특정 측면을 이야기한다. 구술사에서 드러나는 세부 사항들은 새로운 주제와 중요성을 발견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 논문은 첫째, 중국 공산당이 정치적 교리와 군대 내 당 제도를 통해 중국 인민군(PLA)을 장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두번쨰로, PLA는 외국 전쟁을 통해 민간인을 군인으로 전환하는 자체적인 방법을 가지고 있었다. 셋째, 중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은 중국의 안보 및 외교적 목표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와 전쟁을 통해 엮이면서, 냉전시기에 1960년대 주변부에 머물러있던 중국의 위치는 1970년대 초에 이르러서 중국은 중앙부에 위치하게 되었으며, 체제 속에서 생존할 수 있는 유리한 국제적 여건을 조성하는데 성공하였다. 그 후 30년도 되지 않아 중국은 가장 가난한 제3세계 국가 중 하나에서 세계 경제 강국으로 변모하였다.
Ron Milam
“베트남의 미국 전투병이 귀국하다”
이 논문은 베트남에서 전투를 경험하고, ARVN(남베트남군) 동맹국들과 함께 복무하면서 수백만 명의 "적" 병사들을 살해한 후, 그들의 복무에 대해서 다소 무관심한 국가로 돌아간 약 60만 명의 미군 병사들의 문제를 다룬다. 학문과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 후기(1970-1971)에 직접 복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저자는 복무 후 병사들의 민간인 생활로의 복잡한 적응과 참전 군인로서의 지위에 대해 다룰 것이다. 저자는 재향군인회 (VACOR) 산하의 특별 정부 직원(SGE)으로 일하면서 노숙, 에이전트 오렌지의 부작용, 군용 소각장으로 인한 청각과 호흡기 질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그리고 최근에 진단받게 된 도덕적 부상과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 개인적인 경험을 가지고 있다. 저자의 이러한 모든 정신적 및 신체적 문제들은 베트남에서의 군인, 선원, 공군 및 해병대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현재 생존하고 있는 베트남 전쟁 참전군인의 수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재향군인회는 복무한 약 270만 명 중 85만 명이 여전히 생존해 있다고 추정하고있다.
Lộ Khắc Tâm
“북베트남 군인으로서 전장에서의 실제 경험”
이 발표는 북베트남 군인으로 미국과의 전투에 참전한 저자 본인이 겪은 이전에 공유되지 않은 개인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1965년 Chu Prong과 Ia Drang Valley에서의 미군과의 첫 대치부터 East Sa Thay(1966년)와 North Kon Tum(1967년)에서 벌어진 전투까지, 저자는 경험이 없던 신병에서 중대, 대대 및 상급 부대의 노련한 지휘관으로 승진하였다. 그의 증언은 전장에서의 전략, 정치적 이념 교육, 전사자와 부상자의 처우 등 전쟁의 실제 현실을 조명하며 공식 역사에서 거의 포착되지 않는 목소리를 담고 있다. 이 발표는 개인 군인의 관점을 조명하며 베트남 전쟁에 대한 인간 중심적 시각을 통해 개인적인 경험과 전장에서의 현실이 베트남에서 어떻게 집단 대항을 만들어나갔는가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제공한다.
<패널 6: 젠더와 문화>
Heather Marie Stur
“전투를 보는 것: 베트남 전쟁에서의 미국 여성”
1950년대부터 1975년까지 미국 여성들은 군대, 적십자사 혹은 정부 기관을 통해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였다. 약 7,500명의 여성이 군 복무를 했고, 25,000명 이상의 여성이 민간인 자격으로 베트남을 방문하였다. 소수의 여성이 미국의 전투 병력 이전에 베트남에서 1975년까지 머물렀지만, 군인 혹은 민간인 자격으로 복무한 대부분의 미국 여성은 지상군이 처음 배치된 1965년부터 마지막 미군 전투 병력이 출발한 1973년 사이에 베트남에서 머물렀다. 여성들은 보병이나 전방 부대에 배치되지는 않았지만 미군 병사들과의 업무를 통해 전쟁의 트라우마를 경험하였다. 특히, 간호사나 적십자사 노동자들은 전투가 군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보았지만, 트라우마를 입은 군인을 돌봐야하는 직업의 특성상 본인들의 정신적, 정서적 부상을 뒤로 제쳐두어야 하는 경우가 잦았다. 베트남 전쟁의 경험은 일반적으로 남성의 관점에서 이야기되는데, 이는 남성만 전투 부대에서 복무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성들 또한 남성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전투를 “보았다.” 간호사들은 전쟁과 전투가 젊은 남성의 신체를 어떻게 파괴하는지 보았다. 적십자사 노동자들은 전쟁이 어떻게 베트남의 가족들을 망가뜨리는지를 목격했다. 여성 육군 부대 요원들은 전사한 미군둘의 유품을 포장해 가족들에게 보내는 일을 맡기도 했다. 베트남 전쟁 당시 참전한 미국 여성들의 경험을 살펴보는 것은 군 전투 부대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의 '전투를 보는' 모습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보여준다. 전쟁 트라우마와 외상 후 스트레스는 복무한 남성에게만 국한되지 않았으며, 미국 여성들은 복무 후 수십 년 동안 그들의 전쟁 트라우마를 겪어야만 했다.
Jane Griffith
“베트남민족해방전선(NLF) 속 베트남 여성들”
저자의 연구는 전쟁을 승리로 이끈 NLF의 여성 간부단의 역할을 기록한다. 미국의 전쟁에 대한 견해는 주로 전쟁과 남성 학자들에 의해 쓰여진다. 저자의 여성 간의 연구는 이러한 베트남 전쟁의 역사에 존재하는 공백을 메꾼다. 저자는 1970-73년 사이에 평화주의 단체인 the American Friends (Quaker) Service Committee를 운영하며 남베트남에서 인도주의적 활동을 해왔다. 저자는 이 기간 동안 활동을 통해 얻은 명성과 신뢰를 통해 Quang Ngai 지역에서 당시 NLF에 참여한 베트남 여성들과 돈독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다. 저자가 최근에 출간한 책은 NLF 선전관이었으며 두 발을 절단하게 된 본인의 절친한 친구와 함께 집필한 회고록이다. 1973년 저자는 지역 병원에 감금되어 고문당하던 정치범들의 이야기를 비밀리에 문서화하고 촬영할 수 있었다. 그 외에도, 다른 인맥을 통해 저자는 당시 NLF 간부였던 여성과 직접적이고 긴 인연을 맺을 수 있었다. “내가 평화를 꿈 꾼 마지막 날, Dang Thuy Tram의 일기(Last Night I Dreamed of Peace, the Diary of Dang Thuy Tram)”의 영문판 출판을 위해 팀을 꾸리던 당시, 저자는 Thuy의 많은 친구들과 만났으며, 그녀의 언니들과 함께 Thuy가 살해당한 Duc Pho 지역으로 여행을 가기도 하였다. 2005년에는 저자는 UMA 보조금을 받아 Sophie Quinn-Judge와 함께 게릴라 전투병부터 외교관까지 다양한 직책을 맡은 12명의 여성과 인터뷰를 진행하기도 하였다. 이 모든 연구들은 발표 된 적이 없으며, 오늘 이 곳에서 발표될 것이다.
Ann Marie Leshkowich, Martina Thucnhi Nguyen
“전시 중 베트남 아오자이: 패션, 시민권, 그리고 민족주의 (1954-1975)”
저자들이 2025년 8월 26일부터 12월 19일까지 College of the Holy Cross에서 공동 기획 중인 전시회와 함께, 이 논문은 베트남의 민족 의상인 아오자이가 베트남 안에서, 그리고 국제 무대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탐구함으로써 전쟁에 대한 신선한 접근방식을 택한다. 저자들은 남베트남의 두 "영부인"이었던 Trần Lệ Xuân(응고딘지엠 대통령의 처제)과 Nguyễn Thị Mai Anh(응우옌반티에우 대통령의 아내)의 자기 표현방식과 정치 프로그램을 통해, 두 여성의 주체성을 풍자하거나 무시하는 지배적인 서사를 수정하고자 한다. 비판적인 젠더 중심의 분석을 통해, 우리는 두 여성의 공공 이미지 (행동, 말, 외모 그리고 특히 특정 스타일의 아오자이의 세심한 큐레이션)에 주목하며, 이 여성들이 의도적으로 스스로를 남베트남이 열망하던 국제정 근대성의 상징과 베트남 문화유산의 보존의 상징으로 만들고자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이 상징하고자 했던 이 두 가지의 것은 당시 남베트남의 지도부가 생각하기에 북베트남에 의해 공격 받는 것이기도 하였다. 또한, 이들의 공적 인물로서의 페르소나가 어떻게 각 영부인이 생각하던 (종종 비판과 논란이 되기도 하는) 베트남 사회에서의 여성의 역할과 시민적 책임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저자들의 분석은 일견 일상적이고 무해해보이는 의상이 어떻게 베트남 민족주의를 주장하고 (내전/국제전으로서의) 전쟁 당시에 문화적 정체성을 만들고자 하였는지를 보여준다.
Maya Nguyen
“베트남 전쟁에서의 아동과 청소년의 참여: 공산주의, 유교 그리고 아동기”
베트남 공산주의 투쟁에서 아동과 청소년들은 미군과 미국의 동맹국들을 상대로 스파이, 간호, 전투, 물류 지원 등의 다양한 활동을 수행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 당시 그들의 경험은 아직도 많은 경우 탐구되지 않고 있다. 이 논문에서, 저자는 과거에 베트남 공산주의 군대와 관련된 참전군인들과 진행한 32개의 인터뷰를 돌아보며, 어린 나이에 후방에서 전쟁을 지원한 사람들을 살펴본다. 구체적으로, 저자는 전쟁에 아동을 동원한 20세기 중반 베트남의 사회 구조를 조사하기 위해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유교와 같이 베트남에 존재하고 있던 문화적 틀과 얽혀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이 두 가지가 상호작용하여 아동과 청소년의 경험을 만들어냈는지를 살펴본다. 저자의 인터뷰 자료에 따르면, 아동들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으며 이념적 동기가 그들의 전쟁 동원의 동기가 되지는 않았으나, 그들이 전쟁에 참여한 원인이 계급, 정의 그리고 평등과 같은 개념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이러한 명백한 역설은 정치 간부들과 베트남 게릴라가 공산주의 이념을 아이들이 쉽게 접할 수 있고 재해석할 수 있도록 일상에 녹아 들어있으며 쉽게 적응할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전파하였기 때문이다. 이 연구는 어떻게 전쟁 속에서 아동과 청소년들이 문화적, 사회적 구조를 통해 이념적 영향을 다루는지를 보여줌으로서 전쟁, 이념과 아동기의 연구에 기여한다. 베트남 전쟁에서의 아동들의 경험에 주목하면서, 이 연구는 전쟁 속 일상 정치에 주목하고, 거대한 이념 전쟁 속에서 비정치적으로 보이는 아이들의 삶 속에서 아동들이 스스로 본인들의 역할을 만들어 나가는 그들의 주체성에 주목한다.
<패널 7: 미국에서의 베트남 전쟁>
Christian Appy
“국방부 보고서(the Pentagon Papers)가 베트남 전쟁이 끝나도록 도왔는가?”
1971년, Daniel Ellsberg가 보스턴의 연방법원에 도착했을 때, 한 기자가 7,000페이지 분량에 달하는 베트남 전쟁 관련 극비 역사를 유출한 혐의로 수감되는 것이 걱정되는지 물었다. 엘스버그는 "당신이라면 이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 감옥이라도 가지 않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이러한 답변은 또 다른 질문을 만들어낸다. 엘스버그가 유출한 국방부 극비서류가 실제로 베트남 전쟁을 종식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는가? 명확한 답은 없지만, 엘스버그의 행동은 분명 어떠한 결과를 야기했으며, 그 중 일부는 닉슨 대통령의 몰락과 같은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야기해 1973년부터 1975년까지 미국이 남베트남 정권의 붕괴를 막기 위해 직접 전쟁에 재진입할 수 있는 현실적인 가능성을 종식시켰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닉슨 행정부의 국방부 보고서 폭로에 대한 대대적인 과잉 반응이 워터게이트와 닉슨 대통령 탄핵으로 이어진 가장 중요한 계기였다는 것이다. 저자는 국방부 보고서 사건이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외교정책을 수행할 수 있는 권위에 대한 불신을 키우고, 그 전까지 전쟁에 대해 확고한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던 미국인들(국회의원들을 포함하여)이 전쟁을 반대하는 입장을 가지게 되는 데에 기여했다고 주장한다.
Jacob Ganz
“무시된 경고: 1964년 Sigma Wargames(2)와 베트남으로 가는 길”
1964년의 첫 번째 Sigma Wargame은 베트남에서 미국의 실패를 예견했지만 그것의 경고는 무시되었으며, 미국은 전쟁을 향한 비극적인 행진을 이어나갔다. 이 논문은 1964년 주요 의사결정 당시에 진행되었던 Sigma Wargames에 집중하며 존슨 행정부가 전쟁을 접근하는 방식에서 간과된 여러 통찰들을 살펴본다. (Wargames 중 하나였던) 시그마 I-64에는 국가안보보좌관 McGeorge Bundy, 합동참모본부 의장 Earle Wheeler, CIA 국장 John McCone, 공군총장 Curtis LeMay나 Maxwell Taylor 장군 등 존슨 행정부의 주요 인사들이 대거 속해있었다. 이러한 주요 인사들의 존재 하에, 시그마 게임은 존슨 행정부의 예측과는 달리 전쟁의 격화가 1968년에 이르러서는 500,000이상의 미군을 필요로 하고 국내외적으로 항의를 일으켜 장기적으로 미국에게 곤경을 가져올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이러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주요 인사결정자들에게 영향을 거의 끼치지 못했고, 존슨 대통령이 이러한 예측을 보고 받았는지조차도 의심스러운 상황이다. 시그마 게임은 그것의 국제적인 시각에서도 두각을 드러내는데, 당시 인사결정자들은 미국의 전쟁참여가 국제적으로 어떻게 비추어질지를 고민하였고, 이는 호치민의 극적인 유엔 방문으로 극에 달했다. 실제로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전쟁의 국제사회의 의견에 대한 강조와 국제적인 분노와 항의를 불러일으 킬 수 있다는 시그마 게임의 예측은 역사가들이 인정하는 것보다 시그마 게임이 미국의 의사결정에 미친 영향이 크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 논문은 이로서 베트남 전쟁으로 이어진 미국의 의사결정과 관련된 역사학의 공백을 메꿀 것이다. 시그마 I-64를 살펴봄으로써, 이 논문은 어떻게 미국의 의사결정자들이 명확한 경고를 무시하고 미국 역사상 가장 끔찍한 전쟁으로 나아갔는지를 새로운 관점에서 분석한다.
Connor Mitchell
“불협화음에서 춤추기: 1968년 구정공세와 워싱턴과 사이공 사이의 단절”
현재의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 정치/군사 지도부 역사 기록학은 항상 “어떻게” 미국의 패전이 가능했는가에 집중한다. 역사학자들은 주로 사이공,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이나 혹은 워싱턴, 그리고 존슨 대통령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이 논쟁은 사이공의 군사 지도부와 워싱턴의 정치 지도부가 결과적으로 패전의 책임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불필요하게 복잡하게 만든다. 이 논문은 대통령 총사령관과 베트남의 군사 원조 사령부 두 집단의 정보 수집과 68년 구정공세까지 이어진 두 집단의 긴장관계를 조금 더 조심스럽게 살펴보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미국이 전쟁에 참전 할 때, 대통령과 내각은 대전략적 목표와 외교 정책을 세우며, 이 정책들은 보통 하위 단위의 군사 지휘부가 전술적/전략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구정공세는 그렇게 알려진 정치적-군사적 리더십의 공생관계가 끝났음을 미국 대중에게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일관된 미국의 외교 정책에 대한 대중의 동의와 호응이 흔들리게 되었으며, 이는 결국 베트남에서의 미국의 “승리”의 희망을 꺼뜨리게 되었다. 결국, 베트남에서의 미국의 진정한 적은 미국의 정치적 지도부와 군사 지도부 간의 단절이었다.
Chester Pach
“전쟁 속 전쟁: 베트남 전쟁의 텔레비전 보도와 논쟁적인 유산”
영화 속 주인공 알리는 “난 베트남이 어디 있는지 알아. 텔레비전에 있잖아.” 라고 말한다. 세계 헤비급 복싱 챔피언과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텔레비전은 베트남 전쟁에 대한 뉴스와 이해의 주요 원천이었다. 이 논문은 미국 텔레비전 뉴스 프로그램의 전쟁 보도 방식과 케네디, 존슨, 닉슨 행정부가 편향적이고 선정적인 보도에 대응하고자 선택한 전략들을 살펴본다. “주요 전선”이 “여기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었다고 믿었던 존슨처럼, 혹은 “우리의 최악의 적이 언론”이라고 주장하던 닉슨의 말과 같이 텔레비전은 주요 전장이 되었다. 저자는 뉴욕타임즈 특파원이었던 David Halberstam이 “전쟁 속 전쟁”이라고 불렀던, 다시 말하자면 사이공 정부의 한계나 문제점과 미국의 참전 노력의 결점 등을 짚어낸 언론과 이러한 보도를 악의적이라고 여겼던 케네디, 존슨, 닉슨 행정부 사이의 갈등을 분석한다. 저자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텔레비전 보도가 그것이 편향적이거나 자극적이어서가 아니라, 논쟁적인 전쟁의 어려운 현실, 높은 비용과 불편한 진실을 보여줬기 때문에 대통령들을 곤혹스럽게 했다고 주장한다. 이 논문은 대통령 도서관과 미디어 아카이브에서의 저자의 광범위한 연구와 당시에 전쟁을 다뤘던 기자들과의 인터뷰에 기반하고 있다. “전쟁 속 전쟁”은 오래 지속되는 유산을 남겼다. 베트남에서의 무제한적인 (검열되지 않은) 보도들이 미국 내에서 전쟁에 대한 지지 기반을 악화시켰다는 믿음은 그 이후 이어진 그레나다, 파나마와 이라크에서의 미국의 군사 개입에 대한 뉴스 보도를 제한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또한, 워싱턴 포스트가 구정공세 50년 후에 “Walter Cronkite(미국의 방송기자/앵커)가 이끈 뉴스 미디어가 베트남 에서의 전쟁에서 패배했는가?”라는 질문과 같은 지속되는 오해들을 낳기도 하였다. 케네디, 존슨과 닉슨 행정부가 전쟁에 대한 뉴스보도의 신빙성을 낮추려는 노력은 선례를 남겼고 이후 세대의 정부 관계자들에게 21세기의 “가짜 뉴스”와 관련된 갈등에서 사용할 수 있는 주장을 마련해주었다. 반 세기 전의 뉴스 미디어를 둘러싼 갈등은 오늘날과도 고통스럽게 연관되어 있다.
역자 주
[1] 미국의 역사학자 Lewis Sorley가 주장하며 내새운 “a better war”(더 나은 전쟁)은 당시 군사령관이었던 Creighton Abrams가 그 전의 사령관들보다 베트남과 전쟁에 대한 더 뛰어난 이해력과 전술로 베트남전을 유리하게 이끌어 갔을 뿐만 아니라 남베트남의 전쟁 수행력을 발전시켰다고 주장한다. 그에 이어서 Sorley는 당시 미국 국회의 예산 축소가 패전의 원인이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https://warontherocks.com/2017/08/the-heroic-leader-and-the-better-war-from-vietnam-to-afghanistan/)
[2] 1962년부터 1967년사이에 미국에서 진행한 전쟁 시뮬레이션. (https://warontherocks.com/2024/09/the-wargames-that-prophesized-americas-defeat-in-vietnam/)
* 번역에 수고해주신 신스완 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