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상규명 평화연대[인터뷰] 베트남에서 출간된 <1968년 2월 12일>의 비하인드 스토리, 출판사 ‘판북’을 만나다

베트남에서 출간된 <1968년 2월 12일>의 비하인드 스토리
출판사 ‘판북’을 만나다

 - 한베평화재단 인터뷰 - 




지난 6월, 고경태 작가의 <1968년 2월 12일>이 베트남어로 출간되었다. 한국에서 출간된 지 5년 만에 베트남에서도 독자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베트남어판 제목은 <1968년 2월 12일-퐁니·퐁넛 학살 사건에 대한 참혹한 기억>. 베트남어판은 한국어판보다 ‘1968’이라는 숫자가 더 커다랗게 표지를 장식하고 있다.

오랜 시간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 학살 문제에 천착해온 고경태 기자를 베트남이 주목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968년 2월 12일> 출간 이후 2016년에 열린 고경태 기록전 <한마을 이야기 퐁니·퐁넛> 소식을 베트남의 주요 언론이 보도하였고 호치민시의 전쟁증적박물관과 다낭박물관 등이 고경태 기자의 행보를 주목했다. 베트남의 이러한 관심을 징검돌로 2020년에 번역 출간된 <1968년 2월 12일>에는 한 가지 중요한 시사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이 책이 베트남에서는 최초로 출간된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 학살 문제에 관한 저서라는 점이다. 그동안 베트남에서 한국군 민간인 학살 문제를 다룬 기사, 논문, 학술지, 다큐 등은 많았지만 일반 대중이 시중에서 접할 수 있는 단행본이 발간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와 같은 의미 있는 ‘한걸음’에 숨겨진 이야기를 듣고 싶어 <1968년 2월 12일>을 출간한 판북(Phan Book) 출판사를 찾았다. 호치민시의 4군에 위치한 작은 규모의 출판사. 그러나 그들이 한 권의 책에 담아내는 열정은 남달랐고, 인터뷰에서 만난 판북 사람들이 <1968년 2월 12일>에 갖고 있는 애정은 참 깊어보였다.

* * * * * * * * * * *

Q: 정말 반갑습니다. 제가 소장하고 있는 베트남의 인문학 관련 서적 중에 판북의 책이 꽤 있더라고요. <1968년 2월 12일>을 번역 출간하고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모습을 보면서 과연 어떤 사람들이 판북에서 일하고 있는지 궁금해지기도 했어요.

응우옌(편집장): 고맙습니다. 판북은 신생 출판사입니다. 문을 연지 3년 정도 되었어요. 알고 계신 것처럼 문학, 역사 등의 인문학 관련 서적을 주로 출간하고 있어요. 역사와 관련해서는 베트남 남부의 주요 도시에 대한 전문 역사서나 화폐나 실크로드 등을 다룬 세계사 관련 서적들을 출간했습니다. 한국 관련 책으로는 고은 시인의 장편소설 <화엄경>, 이민진 작가의 장편소설 <파친코>를 출간하기도 했어요. 최근 베트남에는 세계사나 문명사를 주제로 한 역사서에 관심을 갖는 독자들이 점점 늘고 있고 저희도 그러한 독자들을 대상으로 한 새로운 저서의 발굴에 매진하고 있어요. 전 지구적인 역사에 대한 이해를 통해 기존의 베트남 역사나 문화를 새롭게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베트남 독자들의 욕구가 점점 커지고 있다고 저희는 보고 있어요.


Q: 어떠한 과정을 통해 <1968년 2월 12일>을 번역 출간하게 되었나요? 출간을 결정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응우옌: 처음에는 고경태 작가 측이 베트남의 유명 출판사인 째(Tre) 출판사와 출간 논의를 했었어요. 이후 째 출판사가 고경태 작가에게 판북을 소개해줬고요. 베트남에서는 이런 책이 출간된 적이 없는데, 홍보와 마케팅에 적극적인 신생 출판사 판북이 출간을 하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째 출판사의 제안을 받기도 했습니다. <1968년 2월 12일>에 대한 대략적인 내용을 듣자마자 눈이 번뜩였어요. 베트남 중부의 한 작은 마을에 불과한 퐁니·퐁넛에서 일어난 한국군 민간인 학살 사건이 한국의 현대사뿐만 아니라 세계사와 어떻게 연동되는지를 보여준 부분이 매우 흥미로웠어요. 작가가 깊은 애정을 갖고 학살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상세히 다루었을 뿐만 아니라 그 사건이 국경을 넘어 어떻게 정치적, 역사적으로 확장될 수 있는 지를 보여준 부분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세계사를 다룬 인문학 서적의 발굴에 매진하고 있었던 최근 판북과의 행보와도 잘 맞아 떨어지는 책이라고 생각했고요.

판북 출판사 편집장 응우옌빈응우옌. 기자 출신의 그는 저명한 문필가로도 활동했다.


Q: <1968년 2월 12일>이 민감한 내용을 다루고 있어 부담이 되지는 않았나요? 베트남은 책의 출판 허가 과정이 까다롭다고 들었거든요.

응우옌: 사람들이 자꾸 한국군 민간인 학살 문제가 민감하다고 하니까 이 문제가 민감한 사안이 된 건 아닐까 싶어요. 실제로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알고 있고 관심도 많은 것이 사실이거든요. <1968년 2월 12일>을 처음 접했을 때 저는 정말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우선 들었고 기본적인 이유는 방금 말씀드렸어요. 그 외에도 작가가 정치적 관점에 얽매이지 않고 사라져가는 역사의 진실을 어떻게든 기록으로 남기고자 했던 마음에서 이 책을 저술했기 때문에 아카이브적 가치가 있는 저서라 독자에게 의미하는 바가 매우 풍부하다고 생각해요.

또한 베트남에는 지금까지 한국군 학살 문제를 다룬 이런 책이 없었기 때문에 베트남 독자들의 주목을 받을 것이라 생각해서 출판을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고경태 기자와 함께 피해 마을을 다니며 인터뷰 통역 및 자료 번역을 했던 뚜옌 씨가 책의 번역을 맡았는데 번역도 아주 훌륭했고 이후 책의 출간, 허가, 홍보, 마케팅 등도 아무런 문제없이 진행을 할 수 있었습니다.

Q: <1968년 2월 12일>을 만나기 전에 혹시 개인적으로 한국군 민간인 학살 문제에 대해 관심이 있었는지요.

응우옌: 저는 베트남 남중부의 닌투언이 고향인데 제 친가는 베트남전쟁 당시 다낭으로 피난을 갔던 역사가 있어요. 그런데 이때 고모가 한국군과 만나 딸을 낳았는데 한국군이 철수하면서 그 한국군도 고모와 아이를 버리고 귀국했고 이후 소식이 끊겼습니다. 아이가 13살이 되었을 때 고모가 아이와 함께 해외로 나가기 위해 밀항을 했는데 그 과정에서 아이는 죽게 되었고 훗날 고모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저는 그동안 한베평화재단의 활동이나 한국군 학살 문제와 관련된 베트남 언론 보도를 계속 주시해왔습니다.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의 역사에 관한 관심도 많아 국립문서보관소에서 관련 자료를 찾아보기도 했어요. 한국군 학살 문제는 제가 앞으로도 계속 관심을 갖고 지켜볼 중요한 사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Q: <1968년 2월 12일>을 접한 베트남 독자들의 반응이 궁금합니다. 판북에서 일하고 있는 분들은 책을 보고 어땠는지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응우옌: 다낭에 살고 있는 한 독자는 책을 읽고 나서 바로 퐁니·퐁넛 마을로 달려갔어요. 야유나무와 위령비를 시작으로 마을을 둘러봤죠. 고경태 기자가 책에 담은 마을의 풍경과 학살의 아픔을 품고 사는 주민들의 모습을 보고 싶어서였다고 하더라고요. 이 책을 읽고 한동안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독자도 있었고, 작가가 마치 학살 현장에 있었던 것처럼 생동감 있게 재현된 학살 피해자들의 이야기에 놀라워하는 반응이 참 많았습니다.

<1968년 2월 12일> 편집을 맡은 판북 출판사 에디터 후옌짱


짱: 저는 판북의 에디터로 <1968년 2월 12일> 편집 작업을 맡았어요. 이 책을 만나기 전에는 한국군 민간인 학살 문제에 대해서 잘 몰랐어요. 몇 번이고 가슴을 조아리며 고경태 작가의 책을 읽었고 어떤 날은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할 때도 있었어요. 저는 퐁룩 마을의 귀신 ‘쌔’의 이야기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베트남 사람도 아닌 한국인 기자가 생존자도 유가족도 아닌 흉가에 얽힌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들였을 노력과 진심을 생각하니 존경심이 들더군요. 쌔의 이야기를 전하며 빈랑나무와 쩌우까우에 대한 이야기를 상세히 서술하는 부분에서는 작가가 베트남의 전통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 점도 느낄 수 있었고요. 이 부분을 지금 함께 읽고 싶어요. “몇 분간이나 숨죽여 있었을까. 인기척을 내지 않으려고 조바심을 냈을까. 어쩌다가 들켰을까. 마을에 들어온 군인들을 피해 빈집 지하 방공호에 숨어 있던 쌔와 그 가족의 마지막 순간.”

캉: 저는 2018 평창올림픽 국제인문포럼에 초청되어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 행사에서 ‘미안해요 베트남’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한 활동가를 만났는데 한국군 학살 문제가 미해결 상태로 남아있는데 베트남의 한국군 학살 피해자들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후 운명처럼 고경태 기자의 <1968년 2월 12일>을 읽게 되었는데 가슴속 깊은 곳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차오르더군요. 월간지 <도시인>에 제가 서평을 기고하기도 했는데 한국 정부가 자신에게 한 번도 안부를 묻거나 인사조차 하러 오지 않았다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피해자 티엣 할머니의 이야기가 지금도 생각납니다. 제 친척 중에 디엔반에 본적을 두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책에 수록된 퐁니·퐁넛 희생자 명단 중에 제 친척과 이름이 비슷한 희생자의 이름과 마주했을 때는 만감이 교차했어요. 퐁니·퐁넛 사건이 어쩌면 나와 가까운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베트남전쟁을 다룬 역사소설 <청춘의 묘지>로 베트남 문단의 주목을 받은 청년 작가 후인쫑캉
현재 판북의 홍보팀장이다.


Q: 원래는 고경태 작가를 베트남에 초청하여 출간회를 열 계획이었다고 들었어요.

짱: 네, 맞아요. 올해는 베트남전 종전 45주년이고 종전기념일이 있는 4월에 맞춰서 고경태 기자를 초청해 호치민시에서 출간회를 열 계획을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코로나19 때문에 연기를 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행사를 포기하고 6월에 책을 출간하게 되었죠. 너무 아쉬워요. 현재 판북은 <1968년 2월 12일>을 지속적으로 홍보할 여러 가지 방안을 구상하고 있고 독자들의 반응에도 귀를 기울이고 있어요.

Q: <1968년 2월 12일> 베트남어판 출간을 통해 베트남과 한국의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을까요.

응우옌: 과거는 단순히 지나간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어요. 과거에 일어났던 일이 여러 가지 모습으로 우리 앞에 다시금 나타나기 때문이죠. 역사에 대한 명확한 시각이 없으면 우리는 과거의 참상을 다시금 되풀이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우리가 살아날 미래를 위해서도 아픈 과거와 정면으로 마주할 필요가 있어요.

짱: 고경태 작가가 피해 마을 취재를 위해 피해자들을 찾아갔을 때, 그들이 “밥 먹고 가라”며 작가를 정겹게 맞이해줬다는 이야기가 참 뭉클했어요. 작가는 결코 편할 수 없는 식사였을텐데, 그것이 생애에 가장 맛있는 한끼였다고 했죠. 고경태 기자에게 고맙다는 인사, 존경하게 되었다는 제 마음을 전하고 싶어요. 작가 덕분에 제가 몰랐던 베트남의 과거뿐만 아니라 오늘의 모습도 알게 되었거든요.

캉: 사실 베트남 사람들은 학살과 같은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는 것을 반기지 않아요. 하지만 결코 망각될 수 없는 소중한 역사죠. 고경태 작가의 책 덕분에 많은 베트남 사람들이 그동안 몰랐던 베트남의 역사를 알게 될 것 같아요. 지인들에게 이 책을 꼭 권하고 싶어요.

* * * * * * * * * * *

문을 열고 판북 출판사로 처음 들어갔을 때, 사람들의 반짝이는 눈빛을 보고 한베평화재단이 환영 받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사무실을 떠날 때도 모든 직원들이 반갑게 인사를 건네주었다.

편집장 응우옌 씨는 자기 주관이 분명한 사람이었고, 감정 표현은 가급적 절제하는 시니컬한 면모가 있었다. 그의 목소리가 가장 뜨거울 때는 학살 피해자들의 증언을 다양한 방식으로 재구성한 고경태 기자의 노력을 칭찬할 때였다. 아마도 응우옌 씨가 전직 기자 출신에 저명한 작가로 활동한 경력이 있었기에 고경태 작가의 저서에 더 많은 것을 느끼지 않았을까 싶었다.

짱 씨는 5년간 학생들에게 문학을 가르친 교사 출신의 에디터였다. 그는 인터뷰에서 퐁룩 마을의 쌔 이야기에서 받은 감동을 언급하며 눈물을 글썽였을 정도로 <1968년 2월 12일>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작가 후인쫑캉은 <1968년 2월 12일>에 대한 그의 서평을 보고 개인적으로 꼭 한번 만나야겠다 싶었는데 그를 판북 출판사 인터뷰 자리에서 만나게 되어 깜짝 놀랐다. 내가 주변의 베트남 작가들에게도 <1968년 2월 12일>을 적극 추천해달라 당부하니 그는 “이미 제가 아는 모든 작가들에게 이야기를 했어요”라며 빙그레 웃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판북으로 부터 책 선물을 받았다
고경태 작가의 <1968년 2월 12일>과 이민진의 <파친코> 베트남어판


<1968년 2월 12일>이 베트남에서 좋은 번역자와 출판사를 만나 베트남어로 새롭게 태어났음을 느낄 수 있었다. 폭발적인 반응은 아니더라도 입소문을 타고 수많은 베트남 사람들에게 그 이야기가 전해질 것이다. 인터뷰 다음날, 베트남 최대 일간지 뚜오이째 신문에 고경태 기자 인터뷰 기사가 크게 실렸고 꽝남성 신문에는 이례적으로 칼럼이 게재되었다. 잊을만하면 다시금 나타나는 퐁니·퐁넛, 1968년, 한국군, 베트남전쟁... 요즘 고경태 기자는 <1968년 2월 12일> 한국어 개정판을 준비하고 있다.

고경태 작가와 <1968년 2월 12일> 베트남어판. (출처: 판북 페이스북 페이지)



인터뷰·글 짜노(권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