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원자 인터뷰[인터뷰] 아버지의 시간과 함께한 평화기행
[인터뷰] 아버지의 시간과 함께한 평화기행
갈까 말까?
수년간 베트남 평화기행 참가자 모집 웹자보를 받아만 보다 드디어 참가신청을 한 수미 씨. 2017년 8월 베트남 평화기행에 마지막으로 합류했다. 그는 작가다. 얼마 전 자신의 여행에세이 <시인의 마을> 최종본을 출판사에 넘겼다. 3년간의 국내 여행과 글쓰기, 사진 촬영과 편집, 출판을 위한 지원금 신청 등 한 권의 책이 나오기까지의 기나긴 ‘산통’과 막 작별한 그는 자신을 위한 선물로 베트남 평화기행을 선택했다.
왜 베트남이었을까. 그에게 베트남 평화기행은 어떠한 시간이었을까. 참가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그가 꺼낸 인사말에 모든 사람들의 귀가 열렸다. “저희 아버지는 베트남전 참전군인이세요. 올해가 아버지 떠나신지 10주기, 이번 평화기행이 끝나는 8월 25일이 공교롭게도 아버지 기일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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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어디에 사는 누구신가요?
경기도 고양시에 살아요. 학원에서 국어강사로 일하면서 틈틈이 여행기를 쓰고 있어요.
Q. 오래 전부터 <아맙>을 후원하셨어요. 지금은 <한베평화재단>의 후원회원이구요. 언제부터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 학살 문제에 관심을 가졌나요?
저의 대학 동기가 베트남에 건너가 무슨 활동가로 일한다는 단체가 <아맙>이었어요. 자주 볼 수 없으니까 술 한 잔하는 대신으로 후원을 하면서도 실제로 어떤 활동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잘 몰랐어요. ^^
그러다가 작년에 한겨레TV의 <파파이스>에서 정대협이 다녀간 베트남 나비평화기행 영상을 우연히 봤어요. 화면에 등장하는 생존자 분의 증언 장면을 보면서 깊은 인상을 받았죠. 그런데 불현 듯 돌아가신 제 아버지가 베트남전 참전군인이라는 사실이 떠올랐어요. 그리고 베트남 평화기행에 꼭 한번 가봐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되었죠.

참전군인 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함께 한 수미 씨의 베트남 평화기행
Q. 올해가 아버지 돌아가신지 10주기라고 들었어요. 베트남전쟁과 관련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아버지가 고엽제 후유증 진단을 받고 보훈병원에서 간암 투병을 하다가 돌아가셨어요. 아버지를 이천의 호국원에 모시면서 아버지가 베트남전 참전군인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죠. 우연히 알게 된 보훈 자격으로 수술비와 병원비를 보조 받았던 것에 우선 안도의 한숨을 내쉬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베트남 전쟁 당시 청년이었던 아버지가 어떤 일을 겪었고 그 뒤로 어떤 삶을 살았는지 전혀 알지도 못하고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저를 발견하게 되었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분의 삶을 찬찬히 떠올려보니, 아버지의 삶에 드리워졌을 전쟁 체험의 어두운 그림자가 보이는 것 같았어요. 그렇게 아버지라는 ‘한 사람’을 조금씩 이해해가기 시작했어요. 전쟁으로 인한 아버지의 삶, 그리고 당신의 삶이 딸인 나에게 끼친 수많은 것들에 대해서도요.
Q. 참전군인 아버지를 둔 한 사람으로서 베트남 평화기행을 참가한 소감이 어떤지 궁금해요.
베트남 평화기행에 가기 전, 병무청에 가서 아버지의 병적기록부를 떼어봤어요. 스무 살에 입대했고 이듬해 베트남에 가서 꼬박 이년을 계셨더군요. 생전에 베트남 전쟁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안 하셨지만 부상을 당해 머물렀던 베트남 어느 휴양지 마을에 관한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었어요. 바닷가였는데 그 하늘빛이며 들판에 자라던 푸른 논이 선명하게 기억난다고 하셨어요.
하미 마을로 가는 버스 안에서 하미 마을에 위령비를 세우는 과정을 들으면서 정말 안타까웠어요. 하미 마을 위령비는 한국의 참전군인회에서 지원한 돈으로 세워졌는데 그 과정에서 우여곡절이 많았더라구요. 그래서인지 위령비에 참배하는 마음도 무거웠고요.
참전 군인이었던 내 아버지가 이 마을에 왔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꼭 이 마을이 아니더라도 군인으로 베트남에 온 건 사실이니까요. 참배를 마치고 나오는 오솔길의 양 옆으로 노란 들판이 펼쳐졌는데 아버지가 베트남에 있을 때 수도 없이 봤을 광경을 직접 제 눈으로 보면서 아버지와 함께하는 여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Q. 여행 이야기와 시의 만남을 다룬 여행에세이 <시인의 마을>을 쓰셨다고 들었어요. 평화기행을 하면서 떠오른 시나 문학 작품, 시인, 작가가 있었나요.
탄타오 시인의 시 ‘홍숫날 결혼식’은 예전에 아맙 소식지를 통해 알고 있던 시였어요. 결혼식 날 마을에 홍수가 나지만 신랑 신부 하객 모두 넉넉한 마음으로 결혼식을 치룹니다. 결혼식 날 홍수가 났으니 ‘홍수와 함께’ 결혼식을 할 수 밖에요. ^^ 베트남 전쟁이 30년 넘게 이어지면서 베트남 사람들의 슬로건이 되었던 ‘전쟁과 함께 살자’라는 정신과 맞아 떨어지는 마음가짐을 볼 수 있는 작품이죠.
이런 시를 쓴 탄타오 시인이 ‘시인마다 각자의 운명이 있다’고 하신 말씀이 기억납니다. 우리나라 시인 중에 작고하신 이성부 시인의 고향이 광주였는데요, 서울에서 언론인으로 일하던 시인은 518 광주 이후 절필을 합니다. 무기력과 죄책감 때문이었지요. 그러나 백두대간을 종주하면서 다시 시를 쓰게 된 시인은 시를 통해 새로운 구원을 얻게 됩니다.
베트남 전쟁에 종군기자로 참전했던 탄타오 시인도 참전 무렵 처음 시를 썼다고 들었어요. 가장 예민했을 청년기에 전쟁을 체험하면서 시를 쓰는 행위가 탄타오 시인에게 유일한 위로이자 구원이었다는 말을 들으면서 이성부 시인이 떠올랐어요.
Q. 학살 생존자 분들의 손을 꼭 붙잡고 어떤 말씀을 전하셨나요?
빈호아 마을에서 만난 생존자 도안응이아 아저씨는 학살 당시 아기였고 탄약이 스며든 빗물에 두 눈이 멀게 되었어요. 그런 아저씨를 마을 사람들이 함께 돌보면서 키웠고 지금 아저씨는 아들과 딸을 둔 가장이세요.
아저씨 집에 가서 사람들이 빙 둘러 앉아 아저씨와 구수정 선생님이 들려주시는 이야기를 듣는데 저는 아저씨 등을 보며 앉아 있었는데도 아저씨의 온화한 미소가 보이는 것 같았어요. 이야기가 끝나고 기타를 치며 노래를 들려주셨는데 왠지 그 노랫소리가 오히려 저를 위로해 주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아저씨에게 인사드릴 때 ‘제 아버지는 참전군인이셨고, 돌아가신 지 십 년이 됩니다. 아버지 대신 사과드리려고 여기에 왔어요.’라고 말씀드리니 아저씨가 환하게 웃으시면서 ‘그랬구나, 와 주어서 고맙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저에게 앞으로 하는 일마다 행운이 함께 하길 바란다고도 하셨지요.
사실 그때 저는 ‘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고 그리워요.’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차마 그 말을 꺼낼 수는 없었어요. 그런데 마치 아저씨가 그런 제 마음을 알고 계신 것 같았어요. 아저씨의 손을 잡고 있을 때 그렇게 느껴졌어요.

평화기행 마지막 날, 후에 궁중아악 가족연주단의 빈 뚜언 씨와 함께
Q. 이번 평화기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꼽는다면?
빈호아 초등학교에서 만난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잊지 못할 것 같아요.
빈호아 마을로 가는 버스 안에서 전쟁이 끝나자마자 빈호아 마을 사람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이 한국군 증오비를 세웠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래서인지 증오비에 참배하는 사람들 얼굴이 무거웠는데 장학금을 전달하러 빈호아 초등학교에 가서 아이들을 보자마자 모두들 표정이 환하게 바뀌더군요. 아주 무더운 날 청량음료와도 같은 아이들의 힘이랄까요? 특히 함께 평화기행에 참가했던 전주대 학생들이 아이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려 노는 모습을 보면서 평화기행 일정의 촘촘한 구성에 감탄했다니까요. ^^
Q. 앞으로 한베평화재단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평화기행을 다녀온 뒤, 이번 기행에 포함되지 않은 다른 마을은 어떤 곳이 있는지 찾아 봤어요. 빈딘성, 푸엔성 등 아직 방문할 곳이 많이 있더라구요. 이번에 제가 가지 못한 마을로 평화기행 일정이 잡힌다면 꼭 다시 참여하고 싶어요.
한베평화재단이 수많은 뜻 깊은 일들을 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저는 많은 사람들이 평화기행에 참여했으면 좋겠어요. 힘든 여정이지만 온몸으로 직접 체험한 기억들이 여행 이후의 삶에 작게나마 영향을 미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도 평화기행이 꾸준히 진행되기를 바랍니다. ^^
Q. 수미 님에게 베트남은? 평화란?
구수정 선생님이 전해주신 생존자 분의 말씀 중에 ‘전쟁도 격렬하지만 평화도 그만큼 격렬하구나’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저에게 평화란 우선 제 자신의 역사랄까. 내 삶을 오롯이 들여다보고 그 삶이 담긴 생활에서 찾아야 할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이번 여행에서 저와 제 아버지 삶의 일부분을 차지하는 베트남에 가서 직접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들으면서 오히려 제가 위로받는다고 느꼈습니다. 그건 아주 중요한 체험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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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기행 일정을 누구보다 진지하게 보내고 있는 수미 씨를 보면서 한 통의 편지가 생각났다. 얼마 전 한베평화재단에 도착한 후원회원의 손편지. 그분도 아버지를 참전군인으로 두었고 수미 씨처럼 중환자실에 입원한 아버지를 봐야만 했고, 베트남전 참전군인에게 나오는 몇 십 만원의 돈을 받았다. 모든 사람을 피해자로 만드는 전쟁, 아버지를 피해자이자 가해자로 만든 전쟁. 그렇게 아버지를 떠나보낸 뒤, 아버지가 내려놓고 간 삶이 자신에게 흘러오고 있음을 느낀 듯 편지에서 그분은 베트남에 대하여 ‘끝까지 가슴아파하고 미안해 하겠노라’며 글을 마무리했다.
베트남 전쟁을 다녀간 32만 명의 한국군. 그들의 상당수는 파병을 마치고 귀국한 뒤에도 마음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전쟁이라는 정글과 늪을 해메였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도 그러한 방황과 고통을 함께 감내했을 것이다. 베트남전쟁은 단순히 베트남전쟁 피해자들과 참전군인들 사이의 문제가 아니다. 한 걸음만 나아가면, 두 걸음만 나아가면 우리의 기억과 고통은 연결되어 있다. 베트남 평화기행은 이러한 고통의 연대를 위해 진실과 마주하는 소중한 징검돌로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인터뷰·글 권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