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원자 인터뷰[인터뷰] 나와 너를 잇는 정성스러움에 대하여 / 진준엽
[인터뷰] 나와 너를 잇는 정성스러움에 대하여
- 연극인 진준엽 -
베트남전쟁 이야기를 무대에 올리고 싶은 한 연극인이 있다. 그의 이름은 진준엽. 10년 전 그는 처음 베트남에 다녀왔다. 하미학살 45주기 위령제에 참여하는 일주일간의 베트남 평화기행이었다. 당시 서른다섯 진준엽의 가슴에 ‘베트남’이라는 세 글자가 쿵 박혀버린 정말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창작공동체 <무적의 무지개> 대표로 있는 그가 걸어온 발걸음을 들여다보니 흥미롭다. 그가 참여한 연극의 대부분은 창작극이고 소수자 인권 문제를 다룬다. 그의 연극에는 소수자 당사자들이 직접 배우로 연기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래서 주목도 받았다. 당사자의 예술적 자기표현을 매우 중시하는 연출가 진준엽을 찾는 사람들의 요청과 본인의 무대에 대한 그리움과 애정 속에서, 그렇게 그는 25년째 연극 인생을 이어가고 있다.
한베평화재단을 늘 지켜보며 필요할 때면 나타나 도움을 주곤 했던 연극인 진준엽을 인터뷰했다. 최근 그는 최옥란, 정태수 열사 추모 연극 「난, 태수야!」 공연을 성황리에 마무리했고 이어지는 작품 활동으로 바쁜 여름을 보내는 중이다. 그를 잠시 멈춰 세우고 물어봤다. 당신의 마음속에 있는 베트남전쟁 이야기는 어떠한지, 그리고 연극인의 삶은 잘 이어가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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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어: 짜노 (권현우 활동가)
인터뷰이: 씨앙 (진준엽 <무적의 무지개> 대표)
[짜노] <무적의 무지개>(이하 무무)의 소개글을 보니 다양한 정체성을 지닌 사람들간의 협업과 소수자의 이야기를 강조하고 있어요. 그간 씨앙의 살아온 삶이 어땠는지, 그것이 어떻게 무무와 같은 극단의 창립과 활동으로 이어졌는지 궁금합니다.
[씨앙] <무무>를 창립한 건 2021년입니다. 대학생 때부터 연극학회에서 활동하며 연극 연출과 배우를 했었고 본의 아니게 연출을 더 많이 했어요. 졸업 후 2008년에는 인권 문화 실천 모임 <맥놀이>에서 활동하며 성소수자 이야기를 다룬 작품 「모던 이펙트」(2009년)를 연출했습니다. 이후 소수자 인권 문제를 연극을 통해 이야기하는 것을 본격적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2014년에는 제1회 <인권연극제>의 공동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기도 했어요. 그런 과정에서 <장애인문화예술판>과 인연을 맺었고 2015년에 장애인극단을 표방한 연극 「이 동네 개판이네」를 올렸는데 좋은 반응을 얻기도 했어요. 형제복지원 이야기를 무대에 올리기도 했었는데 그동안 저는 퀴어 연극과 장애인 연극을 주로 만들어왔고 그중 70%가 장애인 이야기였어요. 제 작품을 본 장애인 단체로부터 계속 의뢰가 온 것이 큰 요인이었죠.
저는 연출가로서 성장하고 경험을 쌓아가면서 다양한 집단과 개인의 비전문가들과 협업하는 연극을 계속했어요. 누군가가 봤을 때는 전문적인 극단, 생업을 건 연극인의 삶은 아니었죠. 그래서 한때에는 이러한 연극인의 삶을 계속 살아도 될까 고민한 적도 있었어요. 결국 마음을 다잡고 나 같은 연극인도 있다, 생업을 걸고 계속 해보자, 그렇게 시작한 것이 <무무>입니다. 제가 동료들과 해오던 소수자 인권 연극도 이어가고 젊은 연극인들과의 접점도 찾아가며 <무무>의 길을 열어볼 생각입니다.

연극 「난, 태수야!」(2023.7.5~9 성북마을극장) 시작에 앞서 관객에게 인사를 하고 있는 진준엽 대표 © <무적의 무지개>
[짜노] 얼마 전 <무무>에서 최옥란, 정태수 열사 추모 연극 「난, 태수야!」를 공연했습니다.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난 두 장애인 열사의 이야기를 통해 ‘열사’를 넘어선 ‘사람’에 대한, 장애인 인권투쟁을 넘어선 시대에 대한 스토리텔링을 하려고 했던 점이 돋보였는데요.
[씨앙] 연극 「난, 태수야!」는 2021년 겨울에 낭독극을 올려 주변의 반응과 피드백을 받아 2022년 4월에 첫 공연을 올렸어요. 그때 여러 가지 이유로 사흘 밖에 공연을 하지 못했는데 다들 아쉬워했고 재공연 요청을 계속 받았어요. 계속 기회를 엿보다 올해 지원처를 확보해서 닷새간 공연을 올렸는데 사람들이 많이 와주셔서 정말 보람이 있었죠. 관객 중에는 생전에 열사들과 형, 언니, 동생하던 분들도 많이 왔어요. 연극을 보고 “옥란이를 여자로 말해줘서 좋았다”고 말해주신 분이 있었죠. 최옥란 열사는 양육권 투쟁의 어머니나 장애인 수급권 투쟁을 하는 거친 이미지로 많이 기억되었죠. 연극에서는 그의 꿈많은 어린 시절과 행복하게 살고 싶었던 인간적인 면모, 여성으로서의 모습도 많이 다뤘어요. 당사자의 입장에서 그의 삶과 당시대의 이야기를 재구성한 거였죠.
정태수 열사는 조직가로서 유명한 분이었는데 참 인간적인 분이었던 것 같아요. 그가 사람 만나는 것을 참 좋아했고 전국을 돌며 자신과 인연을 맺은 사람들을 아끼고 좋아했던 분이라 갈등이 심한 공론장에서도 ‘정태수와는 그래도 이야기가 통한다’ 그런 평이 있었다고 해요. 연극에서도 정태수 열사의 그러한 인간적인 면모를 그리는데 공을 들였어요. 최근 정권이 바뀌면서 장애인 인권이 후퇴하고 있잖아요. 연극을 본 장애인 활동가분들이 응원을 해주셨어요. 이 연극을 통해 장애인 인권 운동이 당사자의 권익만을 요구하는 이기적인 투쟁이 아니라 생존권 투쟁이라는 점이 잘 전해진 것 같다고 해주셨죠. 연극을 만들면서 저는 열사라는 분들이 우리와 격이 다른 먼 곳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다만 행복하게 살고 싶었기 때문에 싸워야 했던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짜노] 씨앙은 주로 연출을 해왔지만 연극 수업의 교사로 활동한 적도 있고 지금도 배우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본인에게 연극이란 어떤 의미가 있는 행위일까요?
[씨앙] 이거 꽤 어려운 질문인데, (하하) 일단 저는 혐오를 조장하는 작품만 아니라면 인권이나 소수자 연극이 아니어도 의뢰가 오면 항상 즐겁게 작품 활동을 해왔어요. 그만큼 연극을 좋아하는 건데, 지금처럼 소수자 인권에 집중하게 된 것은 <맥놀이>에서의 경험이 컸던 것 같아요. 모임 초기 때 동료의 커밍아웃을 통해 머리로만 접했던 인권 문제를 바로 내 곁에 존재하는 문제로 느끼게 되었고 당사자성에 대한 고민도 깊게 한 계기였어요. 이후에는 제가 연출이나 기획자로 연극 무대에 오른 소수자들을 돕는 일을 계속 해왔고 그들의 예술적 자기표현을 지지하는 것에 큰 의미 부여를 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첫 번째 <인권연극제> 소식을 듣고 트랜스젠더 성노동자들이 쭈뼛쭈뼛하며 “우리도 참가해도 되나요?”라며 연락을 주었을 때에도 “그러려고 (인권연극제) 만든 겁니다!”라고 즉답을 했었거든요. 저는 소수자가 직접 연극 무대에 올라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인권적·예술적 차원에서 모두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대중들이 지금보다 더 많이 날것으로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있어요. 앞으로 그들이 능동적인 생산자로서 예술 영역에서 더 많은 역할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진실화해위원회>에 하미학살 사건 조사 개시 촉구를 외친 기자회견(2023.5.17)에서 고(故) 팜티호아의 사진을 들고 있는 진준엽(가운데) © 김창섭 <이코노미 21>
[짜노] 2013년 하미학살 위령제 45주기 베트남 평화기행 때 <맥놀이>가 참가비를 지원해 씨앙이 처음 베트남에 왔어요. 당시 씨앙이 베트남에 오게 된 과정, 그리고 지금도 기억나는 평화기행에 대한 기억이 있다면 듣고 싶습니다.
[씨앙] <맥놀이>가 모임 결성 후 방향을 잡은 이후에는 성소수자 문제에 집중했는데 그전에는 제3세계 문학도 공부했고 베트남전쟁에 대한 스터디도 했었거든요. 베트남전쟁 문제에 영향을 많이 받은 몇몇 동료들을 저는 지켜보는 정도의 입장이었어요. 그런데 막상 베트남에 직접 와보니 ‘아 이거였구나’ 싶었죠. 지금도 가장 기억이 강렬한 것은 도안응이어 아저씨(빈호아학살 피해자)와의 만남이에요. 우리는 미안한 마음으로 찾아왔는데 내내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따스히 만나주었고 기타를 치며 노래까지 들려줬잖아요. 피해자를 만나면 뭔가 증오에 가득 찬 기억의 증언을 듣겠구나 싶었는데 평화와 사랑의 기운이 가득 찬 만남 속에서 감미로운 노래까지 들으니 정말 울지도 웃지도 못하겠더라고요.
또 다른 기억은 팜티호아 할머니(하미학살 피해자)입니다. 그때 할머니가 매우 편찮으셔서 구수정 선생님 등에 업혀서 할머니가 거실에 나와 저희를 만났어요. 그 후 몇 개월 뒤 할머니가 돌아가시며 “원한은 내가 다 가져갈 게, 한국 친구들이 오면 잘해줘”라는 유언을 남기셨는데, 당시 우리와 만났을 때에도 할머니가 비슷한 이야기를 하셨던 것 같아요. 숨을 가쁘게 쉬면서도 할머니가 한국 사람들에게 보여줬던 다정함과 따뜻함이 지금도 정말 기억에 남아요. 당시 평화기행에서 돌아온 후 흥덕고등학교에서 연극 교사로 활동을 했는데 팜티호아 할머니 타계 소식을 듣고 제가 학생들에게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었고요. 얼마 전 진실화해위원회 앞에서 하미학살 사건 조사개시 촉구 기자회견이 열려 저도 참여했는데 그때 한베평화재단에서 팜티호아 할머니의 목발을 공개했었죠. 정말 가슴이 벅차올랐어요. 할머니의 유품을 한국까지 가져와 놀라웠고, 그때 등에 업혀 나왔던 할머니의 모습, 타계 소식, 사진 속에서 웃고 계시던 모습 등이 떠오르며 만감이 교차했어요.
[짜노] 베트남에 처음 다녀온 후 10년이 지난 2023년 2월에 대한민국 사법부가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사건 국가배상소송 1심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습니다. 들리는 소문에 승소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렀다고 하던데요.
[씨앙] 울었다라... 울기는 했죠. 하하. 베트남을 다녀온 2013년부터 편안한 사람들과의 술자리가 길어지면 베트남 이야기를 줄곧 했었어요. 피해자들을 만났던 이야기나 위령제 이야기를 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너무 눈물이 났었고, 그러다 보면 함께 <맥놀이>를 하다가 베트남에 가서 살고 있는 권현우(짜노) 이야기도 곁다리로 하고 그랬죠. 사실 승소는 생각도 못했어요. 저는 형제복지원 피해자의 싸움도 지켜본 적이 있어서 응우옌티탄 님이 국가배상소송을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너무 힘겨운 싸움일 거라는 생각이 강했어요. 크게 기대했다가 실망하지는 말아야겠다 정도의 심정으로 지켜봤던 것 같아요. 힘들어할 피해자 분들이나 활동가들에게 위로와 격려가 참 필요하겠다 싶었고요. 승리의 가능성이 낮다는 생각에 국가배상소송 관련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지도 않았었는데, 승소를 하자 너무 깜짝 놀라서 여기저기 자료를 검색했을 정도였어요. 한참 후에야 디딜 것 같은 순간이 생각보다 빨리 와서 기뻤고 한베평화재단 활동가들이 참 수고가 많았겠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짜노] 그동안 베트남전쟁 관련 작품을 많이 구상했을 것 같아요. <무무>가 베트남전쟁 관련 연극을 올린다면 어떤 이야기를 다루고 싶어요?
[씨앙] 하미 위령비를 세울 때 학살의 진실이 담긴 비문이 연꽃 그림 대리석으로 덮인 사건이 있었잖아요. 지금도 그 상태로 남아 있고요. 저는 하미 마을의 연꽃 이야기를 다루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처음에는 작품 속에서만이라도 연꽃을 걷어내볼까 싶었는데 동료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어요. 차라리 작품에서 당시 한국의 압력 등으로 비문이 덮힌 이야기를 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싶어요. 하미 이야기를 극본으로 써보겠다는 작가가 최근에 나타나서 조만간 내부 스터디를 진행하고 대본 작업도 해볼까 합니다.

연극 <너를 부른다>(2023.5.24~25 안산문화예술의전당 별무리 극장)에서 배우로 참여한 진준엽(맨 오른쪽) ©<종이로 만든 배>
[짜노] 극단 <종이로 만든 배>의 단원으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종이로 만든 배>의 세월호 관련 작품의 몇몇 장면에 베트남전쟁에 관한 이야기가 들어가 있다고 들었어요.
[씨앙] <종이로 만든 배>의「내 아이에게」라는 작품이 있어요. 관객으로「내 아이에게」공연을 보면서 세월호의 아픔을 위로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작품이라고 느꼈어요. 그래도 처음 2~3년 동안은 생생한 아픔이 너무 커서 위로와 극복이 쉽지 않아 보였어요. 하지만 공연은 <종이로 만든 배>에 의해 매해 멈추지 않고 올라갔고, 그때마다 우리 사회의 다른 생생한 아픔들을 끌어안았어요. 그리고 올해 저도「내 아이에게」에 배우로 동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너를 부른다」라는 작품은 작년(2022년)에 초연이 올라가고 올해 <4월연극제>에서 재연이 이뤄진 작품인데요. 세월호부터 제주 4.3, 광주 5.18, 한국전쟁 등의 이야기 외에 베트남이나 인도네시아의 학살 등을 함께 다루고 있어요. 첫해 공연에 배우로 참여하면서 우리 사회만이 아니라 끝없이 되풀이되는 인류의 잔인한 역사와 현재를 보듬고자 하는 노력이 느껴졌습니다. 무엇보다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어서 더 반갑고 고마운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올해 <종이로 만든 배>의 하일호 연출님이 베트남 평화기행을 다녀오시곤 「너를 부른다」에 베트남 이야기를 더 넣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평화기행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작품에 더 담아내야겠다고 마음먹으신 것 같았어요. 그래서 피해자 팜티호아 할머니의 이야기, 그분의 아드님 럽 아저씨의 노래, 베트남 시 등을 차용해서 장면을 더 만들어 넣으시더라고요. 그러한 주요 사건들이 갖고 있는 아픔의 끔찍함을 다루려는 것이 아니에요. 피해자나 유가족 당사자는 어쨌든 살아야 하잖아요. 기억해야 할 이들의 존재를 연극을 통해 불러주고 함께 기억하는 우리 자신에게도 힘과 위로가 되는 장면을 만드는 <종이로 만든 배>의 작업에 동참하면서 저 자신도 큰 위로를 얻었습니다.
[짜노] 저도 활동가로서 피해자의 이야기를 전하고 재현하는 과정에서 늘 어려움을 느낍니다. 씨앙도 소수자의 이야기를 무대에 올릴 때 비슷한 어려움이 있을 것 같아요.
[씨앙] 제가 배우로서 트랜스젠더를 연기한 적이 있었는데 리얼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었어요. 그렇게 리얼함에 애쓸수록 소수자에 대한 박제된 이미지를 따라갈 수밖에 없더라고요. 그래서 소수자의 내면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굉장히 집중해서 고민하고 노력했었어요. 반면 제가 연출가로서 장애인 연기자 분들과 연극을 올릴 때에는 고민의 방식이 달라요. 장애인이 장애인을 연기하면 리얼할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은데 (비장애인에게 기대할 수 있는) 정확한 연기가 되지 않거든요. 때문에 저는 연기자의 진정성이 관객에게 전달될 수 있는 정성스러움에 집중해요. 소수자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은 늘 조심스러운 일이지만 그들의 이야기 자체가 가지고 있는 아름답고 감동적인 부분들이 있거든요. 소수자들이 갖고 있는 소박한 행복, 아픔들, 그들의 문화를 잘 전달하려면 기본적으로 정성을 다하는 마음이 중요한 것 같아요. 관객들도 그걸 알고 느끼거든요.

그에게 별칭이 왜 '씨앙'이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 그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것이 맞다며 웃는다. 이 별칭은 더러운 세상에 던지는 즉자적인 욕이자, 그러한 욕지거리에서 출발하는 작지만 소중한 꿈틀거림을 나타낸다. © <무적의 무지개>
[짜노] 마지막 질문입니다. 앞으로 씨앙과 <무무>는 어떠한 연극을 통해 사람들을 만나게 될까요?
[씨앙] 예술이 강력한 것도 있고 스며드는 것도 있겠고 여러 가지가 있잖아요. 그러한 스펙트럼 속에서 연극을 하는 나의 역할을 찾아가고 싶었어요. 모든 것을 나와 극단이 할 수는 없지만 작은 역할이나 한 부분 정도는 만들어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요. 예전에는 한 작품에 대한 작업이 시작되면 부담감이 커서 밤에 가위도 많이 눌렸어요. 내 작품을 보고 당사자 분들이 실망하거나 상처받으면 어쩌나 그런 생각이 참 많았는데 작년부터는 생각이 좀 바뀌었어요. 우리가 아는 명작들도 사실은 그 전의 수 많은 실패작을 딛고서 우리에게 오는 것이거든요. 두려워만 하기보다는 최대한 많이 다루고, 시도하고, 욕도 먹어보면 좋겠어요. 명작을 올리는 데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범작이든 졸작이든 어쨌든 이야기를 이어가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이번에 우리 극단이 여기까지 이야기를 이어가면, 다음에는 우리 혹은 다른 극단이 이어받아 또 다른 이야기를 시도해보는 거죠. 그러한 일들이 몇 차례 이어지면 언젠가는 우리가 좋은 작품을 만나게 될 거라고 저는 믿어요.
인터뷰, 글 | 짜노(권현우 활동가)
사진 |한베평화재단, 창작공동체 <무적의 무지개>, 극단 <종이로 만든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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