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원자 인터뷰[인터뷰] 21년 전, 나는 한국 정부에 청원서를 보냈다 / 지엔니엔학살 유가족 팜반닥

21년 전, 나는 한국 정부에 청원서를 보냈다 

– 지엔니엔학살 유가족 팜반닥 인터뷰 -

 

“호치민시에 살고 있는 팜반닥에게 연락해봐. 거기도 가족이 많이 죽었어. 분명 청원을 하고 싶어할 거야.” 2019년 3월, 103인의 한국군 피해자·유가족의 청원 서명이 진행되고 있을 때 그를 알게 되었다. 1966년 11월 13일(양력), 한국군에 의해 주민 123명이 목숨을 잃은 베트남 꽝응아이성의 지엔니엔 마을 학살. 당시 사건에서 팜반닥은 어머니와 네 명의 어린 동생을 잃었다. 2019년에는 그와 인연이 닿지 못했다. 2년 뒤 그에게 전화를 했고 팜반닥은 기다렸다는듯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냈다.

 

팜반닥(올해 75세)은 2000년에 자신이 호치민시 한국 영사관에 학살 피해에 관한 청원서를 보냈는데 아무런 답변도 받지 못했다며, 본인이 모든 책임을 질테니 문재인 대통령에게 청원서를 보내게 도와달라고 했다. 전화 통화가 끝난 후 그를 꼭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목소리를 아카이브로 기록할 필요도 있었고 2019년의 베트남 피해자 청원 이야기를 그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코로나19로 호치민시가 셧다운되면서 만남은 미뤄졌다.

 

3개월의 시간이 흐른뒤 코로나19 방역 지침이 완화되면서 비로서 판반닥을 만날 수 있었다. 마침 인터뷰 당일은 지엔니엔-프억빈학살 55주기(2021년 11월 6일)를 앞두고 있었다. 팜반닥은 전화로 차마 할 수 없었던 자신의 이야기를 두 시간에 걸쳐 들려주었다. 그는 몇 번이나 울음을 참으려 애썼는데, 참지 못하고 눈물을 쏟기도 했다. 그는 힘겨울 때마다 떨리는 손으로 연신 담배를 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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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엔니엔학살 유가족 팜반닥(75세). 3년 전 뇌졸증을 앓은 그는 현재 지팡이를 짚고 겨우 걸을 수 있는 상태다.


 

[짜노]: 7월에 전화로 인사를 드렸습니다. 3개월만에 이렇게 직접 찾아뵈었네요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팜반닥]: 자네들은 잘 지냈는가. 나는 3년 전에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줄곧 집에서만 지냈어. 그런데 얼마전 코로나19에 걸리고 말았지. 옆에 있는 아내도 걸렸어. 두 사람 모두 호치민시의 열대질환 병원에 입원했는데 다행히 증세가 심하지는 않았어. 이렇게 집에 무사히 돌아와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지.

 

[짜노]: 두 분이 정말 고생이 많으셨겠어요. 올해 호치민시가 코로나19로 정말 힘겨운 시기를 보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는 아저씨 자택인가요? 전쟁 때 사이공(현 호치민시)으로 오신 후 정착했다고 들었습니다.

 

[팜반닥]: 내 집이지. 예전에는 건너편 집에 살았어. 1970년에 꽝응아이성을 떠나 사이공으로 와서 지금까지 살고 있어. 아내는 롱안성(남부 메콩델타 지역) 사람인데 사이공에서 만나 결혼했지. 1966년에 지엔니엔 학살로 가족을 모두 잃고 나는 고아가 되었어. 그후에도 혁명 세력을 돕는 일을 했지만 1969년에 부상을 당했고 1970년에는 다 그만두고 사이공으로 왔지.

 

전쟁으로 나의 모든 것이 무너졌다


[파노]1966년 학살 피해 당시 아저씨는 스무 살이었습니다. 아저씨는 그때 고향에 있지 않았어요. 사건이 있기 전, 아저씨 가족들의 이야기를 여쭤봐도 될까요?

 

[팜반닥]: 1964년, 베트남에 아주 큰 홍수가 있었어. 그때는 내가 고향에 있었지. 이듬해 1965년에 고향을 떠나 혁명 세력에 참여했어. 아버지는 농부였는데 내가 13살 때 병으로 돌아가셨고, 맏형 팜룩은 1960년에 남베트남군에 들어가서 남쪽의 롱안성에 있었어. 1966년 당시 고향에는 어머니와 네 명의 동생들만 있었지. 그때 가장 어린 동생이 일곱 살 정도밖에 되지 않았었는데……. 형 팜룩은 남베트남군에 들어갔지만 나는 생각이 달랐어. 고향의 다른 청년들과 함께 혁명 세력에 들어갔지. 그때는 그것이 우리 가족의 명예와 위신을 높이는 일이라 생각했어. 이상은 높았는데 현실은 참담했지. 아버지도 죽고 어머니와 동생들도 학살로 다 죽고, 나만 살아남았는데 부상을 당해 엄지 손가락을 잃었고 몸에 포탄 파편까지 박혔지. 어느날 내가 품었던 이상이 다 무너졌고, 나는 약해졌어……. (그가 눈물을 흘려 인터뷰가 잠시 중단되었다) 그래서 1970년에 고향을 떠나 사이공으로 왔지.

 

[짜노]: 아저씨는 고향 근처에서 유격대원과 함께 활동을 했나요? 한 집안의 두 형제가 다른 선택을 하셨네요.

 

[팜반닥]: 아니. 나는 꽝응아이성의 지휘부에서 일을 했어.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지. 나도 전투를 하긴 했지만 항상 전선에서 총을 들고 싸우지는 않았어. 한번은 지휘부가 포격을 당해서 큰 피해를 입었지. 그때 손을 다쳤고 지금도 머리 뒤쪽에 박힌 파편이 남아있어. 나는 공산 세력을 따랐고 형 팜룩은 남베트남군에 갔는데, 각자 생각이 달랐지. 당시에는 그런 일이 베트남에는 아주 흔했어. 아버지는 혁명 세력인데 아들이 남베트남군인 경우도 있었고.

 

[짜노]: 학살 피해 이후 2~3일 뒤에 아저씨가 소식을 듣고 고향 지엔니엔으로 달려왔다고 들었습니다. 당시 상황은 어땠나요. 아저씨가 전해들은 피해 관련 사실을 듣고 싶습니다.

 

[팜반닥]: 음력 10월 1일이야. 어머니와 동생들, 그리고 다른 주민들이 집에서 몇 백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쫀(Tron) 산으로 갔어. 그곳에는 남베트남군 기지가 있어서 한국군의 총격이나 포격을 피할 수 있었어. 그런데 다음날, 주민들이 다시 마을로 돌아갔어. 마을에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 한국군이 마 포격을 하고 집을 불태울까 걱정이 되었지. 집과 재산이 모두 잿더미가 될까봐 겁이 났던 사람들이 아침 일찍 마을로 돌아갔어. 우리 가족을 비롯해 마을로 들어간 사람들이 한국군에 붙잡혔지. 마을의 사당 뒤편으로 한국군이 주민들을 모았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주민들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어. 무슨 선전 같은 걸 하고 풀어줄 거라 생각했지. 그런데 그날 오후에 한국군이 주민들을 다 죽여버린 거야. 한국군이 왜 총을 쐈는지 지금도 알 수가 없어. 지금 지엔니엔 학살 위령비 뒤편에 피해자들의 무덤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피해 장소야.

 



지엔니엔 마을에서 육안으로 보이는 쫀(Tron) 산. 전쟁 당시 남베트남군 기지가 산 인근에 있었고, 주민들이 그곳으로 피난을 가기도 했다.




2019년 한베평화재단의 "베트남전쟁 아카이브 기록전: 확인중…"에서 전시한 지엔니엔 학살 관련 베트남과 한국의 문헌 자료. 

파월한국군전사와 부도에 당시 사건 관련 한국군의 작전 정황이 확인된다. 



말로 할 수 없는 그날의 기억

 


[짜노]: 학살 피해 소식을 듣고 아저씨가 마을에 왔을 때는 어떤 상황이었나요?

 

[팜반닥]: 집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었지. 다 불타버려서 남은 게 없었어. 1966년 당시 마을에 남았던 사람들은 밭에서 채소와 야채를 군대에 판 돈으로 근근히 생계를 이어갔어. 그날 이른 아침에도 밭에 작물을 수확하러 마을로 들어왔던 가족들이 있었는데 한국군에게 붙잡혀 죽었던 거지. 수확할 것이 없어 그날 마을로 가지 않았던 사람들은 살았어. 한국군에게 죽은 주민들은 그때그때 밭작물을 팔아 살아갔던 정말 가난하고 평범한 사람들이었어. 원래는 우리 집 이웃에 한자를 쓸 줄 아는 아저씨가 있었어. 한국군이 오면 이야기는 못했지만 한자를 써서 뜻을 전했지. ’여기 주민들은 공산이 아니라 평범한 민간인이다‘ 이런 뜻을 한자로 써서 전하면 한국군이 사람들을 죽이지 않았거든. 그런데 그날은 그 아저씨가 마을에 없었어. 한국군이 주민들과 말이 통하지 않아 오해를 했던 걸까. 모르겠어.

 

[짜노]: 그럼 아저씨 가족들도 지엔니엔 마을 사당 뒤편에서 다른 주민들과 함께 목숨을 잃은 거죠?

 

[팜반닥]: 응. 마을 사당 뒤편에서 모두 죽었지. 당시는 군인들이 집에 있던 주민들을 소개해서 마을 사당에 자주 모았어. 보통은 사당 앞에 사람들을 모았는데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그런데 그날은 한국군이 사당 뒤편으로 사람들을 모았고 다 죽여버렸지. 내가 마을에 도착했을 때에는 주민들이 시신을 다 땅에 묻은 뒤였어. 운이 좋았던게 마을에 큰아버지와 사촌형이 남아 있어서 우리 가족의 시신을 수습해주었지. 마을 상황이 어땠냐구? 아이고, 말로는 그때 상황을 설명할 수가 없어. 살아남은 사람들이 전부 겁에 질려있었는데 큰아버지에게 내가 뭘 물어봐도 한국군이 무서워서 사실대로 말을 못했어. 그때는 학살 피해 이야기를 거의 듣지 못했지. 시간이 흐른 뒤 매형 레번터이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지. 그도 몇 해전 죽었는데, 만약 살았으면 여든 살이 넘었지.

 

[짜노]: 가족들의 무덤을 보셨을 때 너무도 마음이 참담하셨을 것 같습니다.

 

[팜반닥]: 아이고 세상에나, 그때 가슴이 너무 아파서… (눈물을 흘렸고 아내가 수건을 가져다 주었다.) 그때 심정을 어떻게 말로 하겠어. 모든 게 무너져 내렸어. 내가 추구했던 이상, 사상들이 다 무너졌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 이렇게 목숨을 부지하느니 차라리 죽어야겠다, 죽어버리는 게 낫겠다 싶었어.

 

[짜노]: 1970년에 사이공으로 오신 후에는 어떻게 살아갔나요?

 

[팜반닥]: 혼자 힘으로 살았지. 다행히 형 팜룩이 2,500동을 보내줬어. 꽤 큰 돈이어서 자동차 운전면허를 따서 운전사를 하면서 먹고 살았어. 운전면허증 이외에도 먹고 살려고 이런저런 자격증을 더 땄어. 그렇게 정신없이 살다가 1971년이 되어 사이공에서 처음 맞는 설 연휴였지. 가족과 고향 생각에 너무 착잡한 마음이 들어 잠을 못 잤어. 담배를 세 갑이나 피우며 밤을 꼬박 샜지. 다음 날 아침에 회사 사장을 만났는데 내 얼굴이 병자처럼 시퍼렀고 눈 주위가 까매졌다고 하더군. 나를 가엽게 여겼는지 잠시 뒤 평소에 술도 안 먹는 사장이 맥주 두 병을 사온 거야. 그때 내가 술을 마실 줄 몰랐는데 사장이 “얼른 먹고 자. 그러다 이틀 밤을 새면 병이 날 거야. 설 연휴라 아파도 병원에 못 간다고.”라며 술을 권했지. 맥주 두 병을 마시고 겨우 잠이 들었어.


2000년, 한국 영사관에 청원서를 보내다

 

[짜노]: 지난번 전화 통화 때 2000년에 아저씨가 호치민시의 한국 영사관에 청원서를 보냈다고 했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무척 놀랐어요.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팜반닥]: 2000년에 내가 한국 영사관에 청원서를 보냈어. 그때 청원서를 보낸 우편 송장을 지갑 깊숙한 곳에 넣어놨지. 여보 지갑 좀 갖다줘요.



30년이 넘은 팜반닥의 지갑. 그리고 2000년 호치민시 한국 영사관에 청원서를 우편으로 보내고 받은 EMS 송장.

글씨가 흐려졌지만 당시 발신인과 수신처의 주소, 발송 날짜 등의 정보가 확인된다. 




2006년, 회갑을 맞이한 판반닥의 사진.

청원서를 보낼 당시 자신의 얼굴로 이 사진을 소개해달라고 판반닥이 요청했다.

 


[팜반닥]: 한국 영사관으로 우편물을 보냈다는 내용이 보이지? 그때 정확히 어떤 일을 계기로 청원서를 보냈는 지는 기억이 안나. (주: 2000년 당시 한국은 물론 베트남 언론에서도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 학살 피해 문제가 계속 보도되었다). 2000년 어느 날 꿈에 죽은 어머니와 동생들이 나타났어.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바로 차를 몰아 변호사를 찾아갔지. 한국군 학살 피해에 대하여 보상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물어봤는데 어렵다고 하더군. 그래서 집에 돌아와서 내가 직접 청원서를 썼어. 우리 가족의 학살 피해에 한국 정부가 책임이 있고 유가족인 나는 가족을 잃었을뿐만 아니라 이후 온갖 고생을 했으니 그에 따른 지원을 해달라는 내용이었어. 청원서를 들고 직접 영사관을 찾았는데 바로 받아주지 않고 우편으로 보내라고 하더라고. 이후 청원서에 대한 답변을 못 들었는데 몇 년후에 한국 정부가 지엔니엔 마을에 학교를 지어줬어. 학교가 건립되기 전 베트남어를 아주 잘하는 어떤 한국 아가씨가 지엔니엔 마을을 자주 찾아와 도움을 줬다는 이야기도 들었지. 마을 사람들 중에는 내가 영사관에 청원서를 보내고 그 한국 아가씨가 도와준 덕분에 한국 정부가 지원을 해줬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어.

 

[짜노]: 그럼 아저씨는 결국 영사관으로부터 아무런 답변을 못 들으신 거군요.

 

[팜반닥]: 응, 답변이 없었어. 그때 내가 청원서에서 보상을 요구한 것도 아니었고 유가족인 나에게 한국 정부가 정책적으로 어떤 지원을 해달라는 거였어. 실은 내가 원했던 것보다 수준을 많이 낮춰서 요구한 거였지. 내가 바라는 것을 다 요구할 수는 없었어. 2페이지 반 정도 되는 분량이었는데 내가 직접 자필로 청원서를 썼지. 영사관에 우편물이 도착했다는 것까지 확인을 했는데, 끝내 답변을 받지는 못했어. (질문: 답변이 없어 영사관을 찾거나 전화를 하지는 않았나요?) 아니. 한국어를 모르는데 어떻게 말을 하겠어.



오늘날 호치민시 대한민국 총영사관의 모습



[짜노]: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다시 청원서를 보내려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팜반닥]: 응. 그 사람은 박정희의 딸이잖아. 박정희 군대에 내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니 최고 책임자인 그의 딸에게 요구를 하고 싶었어. 그런데 내가 글을 잘 쓰지 못하거든. 어떤 내용을 어떤 문장으로 써야하나, 이번에는 어디에 청원서를 보내야하나 망설이며 시간을 보냈는데 어느날 박근혜가 대통령에서 물러나고 감옥에 가더라고. 만약 그가 계속 대통령직에 있었더라면 청원서를 보냈을거야.

 

그래서 무엇이 해결되었나

 

잠시 인터뷰를 멈추고 팜반닥에게 2019년 베트남 피해자 청원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청원서 내용과 국방부의 답변서를 읽어주었다. 그리고 지엔니엔학살 피해자의 신분증을 전시한 2019년 베트남전쟁 아카이브 기록전 리플렛을 보여주었고 함께 전시된 다른 유가족들의 유품에 관한 이야기도 들여주었다.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팜반닥은 “그래서 뭐가 해결되었나”라고 담담히 물었다.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한 질문이었다. 당시의 일로 많은 한국 시민들이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알게 되었고 현재 한 피해자가 한국 정부를 상대로 국가배상소송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한베평화재단은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계속 노력을……. 잠시 생각에 잠긴 후 팜반닥이 입을 열었다.

 

 

[팜반닥]: 2019년에 청원서를 보낸 그들의 마음과 20년 전 청원서를 보낸 내 마음이 같아. 나는 한국 정부에게 무엇을 달라고 매달리지는 않아. 나는 그저 내 아이들과 베트남의 젊은 세대들이 좀 더 편안하게 살길 바라는 마음에서 청원을 했을 뿐이야. 한국에 요청을 한게 아니라 요구였어. 나는 상이군인이지만 베트남 정부에 단 1,000동도 먼저 요청한 적이 없는 사람이야. 고향에서 상이군인으로 등록을 하라고 먼저 연락이 와서 서류를 제출했고 매달 정부가 주는 얼마의 지원금을 받을 뿐이지.

 

청원서를 제출한 일이 한국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졌다니 다행이네. 그럼, 나는 됐어. 나는 이 문제에 대해 더 요구하지는 않겠어. 하지만 한국 정부가 우리에게 사과의 말은 꼭 했으면 해. 만약 한국 정부가 피해자들와 유가족들을 조금이나마 돌봐준다면 그건 고마운 일이야. 솔직히 말하면 이제 남은 사람들이 별로 없어. 우리 누나도 몇 해전 돌아가셨고 많은 피해자, 유가족들이 이미 세상을 떠났어. 지엔니엔 마을뿐만 아니라 인근의 프억빈, 하떠이 마을을 비롯해 한국군에게 죽은 사람들이 정말 많아. 인민위원회에서 매년 위령제를 챙기고 있지만 참석하는 사람들의 숫자도 해매다 줄고 있지. 학살 피해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이제는 마을에도 점점 줄고 있어. 점점 잊혀져 가고 있어.

 



팜반닥과 아내 후인티꽁.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후인티꽁도 옆에서 이야기를 들었다.

 "너무 오래간만에 남편의 이야기를 다시 들었어. 나는 기억이 가물가물했는데 남편은 다 기억하고 있지"라며 소감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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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간의 인터뷰가 그를 지치게 한 것일까. 그는 피곤하지 않다며 더 이야기할 수 있다고 했지만 분명 어딘가 힘이 빠져보였다. 2019년 청원서 이야기를 들은 후에는 더욱 그랬다. 한 명도 아닌 103인이 집단 청원을 했음에도 그 어떤 요구도 수용하지 않은 한국 정부에 실망한 탓일까. 아니면 백 여명이나 되는 피해자·유가족들이 힘을 모아 한국 정부에 청원을 했다는 사실 자체에 그가 어떤 의미를 느꼈던 것일까.

 

마지막 질문으로 그에게 남은 여생의 소원을 물었다. 그는 학살 피해로 죽은 가족들에게 정갈한 무덤을 만들어 주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었는데 그것을 2000년에 자신의 힘으로 이루었다고 했다. 그에게 남은 일은 죽기 전에 다시 한번 무덤을 개보수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와 헤어지기 전에 그가 청원서를 보내고 받은 우체국 송장을 카메라에 담았다. 30년이 훌쩍 넘은 낡은 그의 지갑 아주 깊숙한 곳에 21년이 된 EMS 송장이 있었다. 아내 후인티꽁(71세)은 남편이 청원서를 보낸 것은 알았지만 지갑에 송장을 넣어둔 것은 오늘 처음 알았다고 했다. 송장에 찍힌 스템프의 날짜는 2000년 10월 19일. 지엔니엔학살 유가족 팜반닥의 이야기가 한국에 전해지는데 꼬박 21년이 걸렸다.

 

 



2019년, 지엔니엔·프억빈 학살 53주기 위령제

  


인터뷰, 글ㅣ권현우 (짜노) 활동가

통역, 녹취ㅣ레티미느엉

사진ㅣ한베평화재단




* 한베평화재단은 2016년부터 한국 시민들의 마음을 모아 매년 지엔니엔·프억빈 학살 위령제에 조화를 보냈습니다. 2021년 11월 6일에 있을 55주기 위령제에도 조화를 보낼 예정이며, 위령제를 앞두고 지엔니엔 마을에 위치한 띤선 초등학교 컴퓨터교실 지원사업을 조만간 완료할 예정입니다. 

태그 팜반닥, 지엔니엔, 55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