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여기, 타고난 이야기꾼이 있다.
/ 김학규 후원회원 인터뷰
인류의 역사에서 ‘이야기’를 빼면 무엇이 남을까? 이야기는 모든 서사의 근원이다. 서사를 만들고, 이해하고, 향유하는 능력은 인간의 본성이다. 인간은 누구나 이야기 하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어쩌면 ‘이야기꾼’이라는 직업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인류의 직업 중 하나일 지도 모르겠다.
문자가 생기고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까지, 이야기꾼은 가장 능력 있는 창작자이자 전달자였다. 1700년대 조선 후기, 이야기책이 유행하던 시절에는 시내 저잣거리에서 이야기책을 읽어주는 것을 업으로 삼은 전문 입담꾼도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전기수(傳奇叟)’라 불렀다. 단순히 글자를 읊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실린 채로 일종의 연기를 펼쳤고, 길을 가던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할 만큼 이목을 끌었다. 1960년대까지도 시골 장터에서는 구수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전기수가 있었다고 한다.
김학규 후원회원을 처음 만났을 때, “이제는 직업선택란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이야기꾼’이 아직 존재하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모인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자료를 캐내 글을 쓰고, 팟캐스트와 라디오에 출연하고, 지역 곳곳을 누비며 만남을 찾아가는 사람. 모든 특징에서 '프로 이야기꾼'의 면모가 보인다.
2021년 7월, 한베평화재단 후원회원 가입을 통해 새로이 평화의 인연을 맺게 된 김학규 회원과 이야기 나누어본다.

인터뷰를 위해 찾은 사무실에서 김학규 후원회원을 만났다. ⓒ짜미
* * * * *
Q. 안녕하세요, 처음부터 너무 훅- 들어가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하하). 재단 회원들에게 간단히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인터뷰 질문지를 받았을 때 가장 어렵겠다고 생각한 질문이 바로 이겁니다(하하). 저는 서울시 동작구에 사는 김학규라고 합니다. 대학생 때에는 민주화운동, 학생운동에 참여했습니다. 박종철과 대학 동기였고 그때 인연으로 박종철기념사업회에서 오랫동안 사무국장직을 맡았어요. 지금은 지역운동의 방법으로 사회 운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지역을 고민한다는 것이 조금 낯설지요? “지역에 바쁜 일이 있어요.”라고 하면 “어디 내려갔다 오셨는데요?”하고 묻는 경우도 종종 있더군요(하하). 동작구에서는 '역사문화연구소'라는 단체를 만들어 지역 주민 활동과 지역 네트워크 활동을 하고 있어요. 은평구에서도 '인권도시연구소'라는 단체를 운영하며 도시 수준에서의 인권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고요. 개인적으로 오마이뉴스*에 지역의 역사나 독립운동, 민주화운동과 관련한 이야기를 연재하는 활동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 [오마이뉴스] 소설가 심훈? 그의 직업은 더 있었다 / 김학규
* [오마이뉴스] 만주 장교가 '광복투쟁'? 현충원 속 기막힌 신분세탁 / 김학규
* [오마이뉴스] 사당동 89번 종점, 버스 50여대가 일시에 멈춘 사연 / 김학규 外
Q. 우와, 평생을 운동가로 사셨네요! 활동을 하며 서울 지역 곳곳을 누비는 모습도 인상적입니다.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김학규 선생님이 지금껏 활동해 오신 발자취를 찾아보았어요. 이번 만남에서 함께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참 많겠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지난 7월에 한베평화재단의 따끈따끈한 신입회원이 되셨네요. 재단 후원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어요?
아이고, 참 부끄럽게 언제 또 다 찾아보셨대(하하). 한베평화재단에서 평화기행 프로그램으로 국립서울현충원 탐방을 함께 한 인연이 직접적인 계기였지 싶어요. 작년에 제주 4.3을 주제로 현충원을 방문한 팀의 해설을 맡았는데, 그때 멤버 중 한 분이 재단의 석미화 사무처장님이었거든요. 이런 인연이 다 있지요? 그러다 올해 재단 평화기행을 함께한 직후였던가, 자꾸 제 페이스북에 한베평화재단 소식이 뜨는 거예요(하하하). 한두 번 보고 나니까 점점 더 많이, 계속 나타나더라고요? 그러다 얼마 전에는 특별법 제정을 위한 국회 간담회 소식을 접했어요. “굉장히 구체적인 변화를 만들어내려고 노력하고 있구나”, “점점 앞으로 나아가는 활동을 해왔구나” 생각이 들어서, 평화기행으로 함께한 인연도 있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싶은 마음으로 회원가입을 하게 되었지요.

김학규 후원회원은 '동작역사문화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인터뷰를 위해 찾은 소박한 사무실은 동작구에서 지역 시민 활동을 하는 네 개의 단체가 공용으로 사용하는 따듯한 공간이다.
따로, 또 같이. 지역과 사회, 평화와 인권을 고민하는 단체들이 모여있는 분위기가 참 좋았다. ⓒ짜미
Q. '역사적 사건의 영화화'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나눠볼까 해요. 1987년 6월 항쟁의 배경이 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다룬 2017년 개봉작, 영화 <1987>과 인연이 있다고 들었어요. 실화를 기반으로 만든 영화가 갖는 힘이 크지만, 그것이 갖는 한계와 위험성도 분명히 있잖아요.
그렇죠, 극영화니까 아무래도 장단점이 더 분명할 수 밖에요. 영화 <1987>을 제작하는 초기 과정에 작가님이 시나리오 초안을 가지고 오셨어요. 아주 구체적인 사실관계에 입각해서 내용을 쓰셨기에 놀랐고, 몇 가지 의견이나 피드백을 주고받았어요. 그런데 막상 영화가 나오고 보니 제가 그때 본 것과는 상당히 다른 내용이더라고요. 사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는 과정이 굉장히 복잡하거든요. 대중 영화다보니 몰입을 위해 집중하고 포기하는 과정에서 초반 논의와는 이야기가 많이 달라 질 수 밖에 없었던 거예요. 예를 들어 영화에서 경찰은 정말 ‘나쁜 놈’이고 검찰은 ‘착한 놈’이잖아요?* 하정우씨가 맡은 역할이 최검사인데, 워낙 연기를 잘하셔서 그런지(하하)…. 검찰은 경찰과 달리 진실을 밝히려 애쓴 것처럼 다뤄진 게 조금 아쉽더라고요.
*영화 <1987>에서 검찰은 부검 없이 화장하려는 경찰을 막고 온갖 회유와 압박에도 부검을 하도록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그려지지만 이는 최환 당시 공안부장 검사 개인의 중요한 역할과 결정적 조치였을 뿐이다. 검찰은 자신에게 주어진 수사권마저 사실상 포기하고 경찰 자체 수사에 맡겨 박종철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을 축소‧왜곡‧조작하도록 방조하였고 이후 여러 차례 기회가 있었음에도 제대로 된 수사를 하지 않았다. / 박종철 열사 30주년 기념 발간 ‘그대 촛불로 살아 (김학규, 박종철기념사업회 사무국장)’ 中
Q. 관객 수가 무려 723만 명. 꽤 성공한 영화인 셈이지요? 흥행과 더불어 박종철, 이한열 열사의 이야기도 다시금 주목을 받았던 기억이 있는데. 실제로 관련 이슈에 대해 사람들의 관심이나 이해가 달라졌다고 체감하셨나요?
그럼요, “탁치니 억하고 죽더라”는 말은 많이 들어보았다고 해도 대부분 구체적인 배경이나 상황, 관계까지는 잘 모르니까요. 영화가 갖는 파급력과 주목도가 크다 보니 덕분에 많은 사람들에게 이 사건이 더 알려지게 되었죠. 그러면서 경‧검찰의 사과와 반성이라는 현실적인 요구도 다시금 주목 받았고요. 결국 검찰은 한 사람도 구속되지 않았고 심지어는 조사도 받지 않았거든요. 여론이 계속 몰아가니 결국 문무일 당시 검찰종장이 영화 <1987>을 관람하고 애도와 사과의 뜻을 표시했고, 이후에는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가 입원한 병원에 찾아가 과거사에 대해 사과하고 죄송하다고 전하기도 했어요. "영화가 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분명 큰 기여를 한 부분이 있지요.
그런데 또 중요한 게 “영화는 영화일 뿐” 인 것 같아요(하하). 실제 역사와는 반드시 구별해보아야 한다는 거죠. 영화를 계기로 “아 이런 것이었구나!” 하고 더 배우고 알아 가면 좋을텐데 그 이상으로는 가지 않아 문제가 되기도 하죠. 영화가 100% 사실은 아니니까요. “영화에서 그렇게 나오던데?”라고 이야기를 들으면 참 난감하죠(하하하). 사극이나 드라마도 마찬가지잖아요. 흥미 유발과 관심의 계기로는 너무 좋지만, 그것을 시작으로 해야지 끝으로 둬서는 안 되지요.

2019년 서울 용산구 민주인권기념관(옛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열린 박종철 열사 32주기 시민추모제에서
박종철 열사 아버지의 영정을 들고 대공분실 509호에서 나오는 모습(사진 왼쪽이 김학규 후원회원) ⓒ강원도민일보

2015년,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 임명철회 촉구 기자회견에서 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사무국장으로 참여한 모습.
(사진 왼쪽에서 세번째) ⓒ오마이뉴스
Q. 민주화운동을 하시다 지역 운동으로 전환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역사를 매개로 지역 활동을 하겠다고 생각하신 점도 흥미로워요.
80년대에 대학에 입학해서 한국사를 전공했는데요. 열심히 공부해서 어렵게 대학을 갔는데 “세상이 참 복잡하구나, 쉽지 않구나”만 깨달았어요. 고민이 클 때 한 선배가 저에게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지금도 생생한데, “역사는 붓으로만 쓰는 게 아니라 온 몸으로 쓰는 거야!”. 이 말을 듣고 고민 끝에 결심을 했어요. “한 10년 우리가 직접 같이 부딪히고 움직이면 사회를 바꿀 수 있지 않겠냐, 공부는 나중에 서른 즈음에 다시 시작해도 된다.”
그런데... 세상이 금방 바뀌지는 않더라고요? (하하하). 생각만큼 만만하진 않았던 거죠. 평생 해도 될까 말까 한 것이라면 더 장기적인 목표와 계획을 가지고 활동해야겠다고 판단했어요. 그렇게 지금 지역운동까지 오게 되었죠. 이것도 쉽지는 않아요, 엄청난 장기전이랄까(하하). 제가 좋아하는 것, 잘할 수 있는 것이 역사니까 이 길을 택했지요. 지역사를 보통 '향토사'라고 하는데, 서울의 경우에는 서울 전체와 관련된 것은 있어도 각 지역이나 자치구에 대한 자세한 접근은 잘 없거든요. 지역사라고 하더라도 보편적인 역사와 크게 멀리 떨어지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지역의 역사가 한반도 역사와 어떤 연관성을 가지며 상호작용을 하는 지 공부하다 보니 더 깊이 역사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죠. “동작의 역사를 알면, 동작의 현재와 미래가 보인다!” 이게 동작역사문화연구소의 모토인데요. 주민들이 지역의 역사를 매개로 지역에 대한 자부심을 갖게 되면 지방자치에도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Q. 이미 운을 떼어주신 것 같은데요, 역사를 ‘기억’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가끔 강연이나 인터뷰를 나가면 꺼내는 말이 있어요. “현재를 지배하는 사람이 과거를 지배하고, 과거를 지배하는 사람이 미래를 지배한다.” 『1984』를 쓴 조지 오웰이 한 말인데요. "역사라는 건 단순히 옛날 일을 외워서 시험 보는 문제가 아니다"라는 거예요. 현재를 지배하고 싶은 사람은 계속 권력을 유지하고 싶을 거고, 그때 제일 먼저 하는 것 중 하나가 자기의 시각에서 역사를 재해석하고 심지어 왜곡해서 나에게 유리한 스토리를 만드는 거죠. 사람들로 하여금 “우와, 이런 사람이라면 미래를 맡겨도 되겠다네!”하고 생각하게 만들죠. 그래서 “옛날이야기 그만하고 미래만 보자”는 논리가 참 황당한 거예요. 역사를 기억한다는 것은 현재 우리가 어디에 있는 지를 확인하고,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하는 지를 정확히 보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문제인 것이니까요.
Q. 역사를 자기 문제로 받아들이는 것은 결국 ‘어느 순간’에 오는 것 같기도 해요. 저도 역시 그랬고요. 그 계기와 경험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요? 역사와 사회 문제를 내 것으로 삼아야 한다는 게, 머리로는 이해되지만 마음으로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하잖아요.
시기는 다르겠지만 사람마다 역사와 자신의 연결 고리를 발견하는 계기가 주어진다고 생각해요. 자기가 이슈를 만나는 범위를 확대해나가면 더 빨리 만날 수 있겠지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다양한 시각을 살펴보고 자기 시각을 가지고 역사를 정확히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거예요. 베트남전쟁도 누가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상당히 다르게 해석되잖아요? 과거에는 국가와 민족의 관점에서 접근했지만 이제는 평화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시도가 필요하죠. 이전 같은 생각이라면 ‘전쟁은 모두에게 피해와 상처를 준다’는 생각은 중요하지 않고, 그저 ‘국익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가’만 보게 되잖아요. 그러니 당연하게 애국을 위한 행위에서 발생한 부작용이나 안타까운 결과는 불가피했던 것으로만 치부되고요. 그래서 저도 계속 평화라는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고 해석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설득하려고 연습하고 고민하고 있어요.

지난 6월, 한베평화재단의 <베트남 평화기행 in 대한민국> 프로그램으로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아
김학규 후원회원과 현장 탐방을 함께 진행하였다. 사진은 묘역에서 해설을 진행하고 있는 김학규 후원회원의 모습. ⓒ짜미
Q. 선생님의 현충원 해설을 들으면서 스토리텔링을 만들기 위해 정말 많은 자료를 찾고 준비하셨구나 싶었어요. 역사에 대한 엄청난 관심과 애정도 뿜뿜 느껴졌고요. 재단에서도 평화기행 프로그램이 있다 보니 저 또한 종종 이끔이 역할을 해요. 얼마나 어렵고 쉽지 않은 일인지 깊이 공감합니다(하하). 해설을 준비할 때에 가장 신경 쓰거나 고민하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본 원칙은 ‘정확한 사실을 전달하자’는 거예요. 한 가지 사실을 둘러싼 전후, 좌우를 전부 살펴보아야 확실한 한 마디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잘 모르는 것에 대한 질문이 들어오면 “더 찾아보겠다”고 하고 보충해서 반영하고, 나중에 찾아 전달해주기도 하고. 대충 하면 다 티가 나잖아요? (하하). 제가 주로 이야기하는 것들이 근현대사에 해당하는 이슈들이라 여러모로 민감하고 조심스러운 부분도 있어요. 민감한 이슈일수록 어떻게든 더 설득력 있게 논리적으로 만들어야 하는 데 그게 참 쉽지 않아요. 그렇다고 지나치게 타협하고 가볍게만 다루면 아쉬움이 남고요. 특히 베트남전쟁이 그렇지요.
매년 6월 6일 현충일 부근이면 굉장히 많은 관람객이 현충원을 찾아요. 지금은 코로나19 때문에 치운 것 같은데 원래는 월남전사자 묘역, 그러니까 채명신 장군 묘역 바로 앞에 큰 벤치가 있었어요. 어르신이나 참전군인 분들이 그곳에 앉아 있다가 제 해설을 듣고 화내거나 혼내는 경우도 있었죠(하하하).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아온 만큼 관점도 매우 다르잖아요. 그렇지만 당사자 분들의 입장과 생각을 아예 배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베트남전쟁의 역사를 한국 사회가 냉정하게 바라보고 평가하려면, 어쩌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럼에도 사회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시기가 비로소 찾아 왔을 때,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펼쳐 나가려면 지금부터 다양한 논의나 대화를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요. 그래서 한베평화재단의 활동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지요.
Q. 동종업계 종사자(?)로서 무한 공감을 느꼈습니다(하하). 서울현충원에서 베트남전쟁은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이야기 주제잖아요. 해설사로 재단과 함께한 <베트남 평화기행 in 대한민국> 현충원 프로그램은 어떠셨어요?
이전에 고등학교 평화기행 해설로 만났을 때 재단 활동가분들이 “현충원에 월남참전탑이 있다는데 어디 있나요?”하고 물어본 적이 있어요. 당시에는 저도 잘 모르겠어서 정확한 답변을 드리지 못했는데, 이후로 검색도 하고 자료도 찾아보니까 현충원 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맞은편 동작주차문화공원에 세워진 월남참전기념탑이더라고요. 해설 때문에 현충원을 자주 찾았어도 그런 것이 있는 줄은 몰랐지요. 그런 면에서 보면 월남참전기념탑은 좋은 자리를 선택하지는 못한 것 같아요. 그 자리는 사람들의 이동이 거의 없는 곳이거든요. 저도 재단과 만나서 새로운 걸 발견하고 배운 시간으로 남았어요.
Q. 김학규 선생님의 현충원 해설을 들으며 묘지라는 특수한 공간을 살아있는 곳으로 느끼게끔 한다는 점이 매우 인상적이었어요. 보통 역사 유적지나 묘역이라는 공간은 과거 어느 시점에 멈춰서 박제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잖아요. 특히 미래와 연관 짓기는 더욱 어려운 공간이라고 생각되고요.
현충원이라는 공간도 본래 목적만 생각하면 국가주의와 애국주의를 강력하게 보여주는 아주 상징적인 공간이에요. 특히 우리 사회는 군사독재 정권 기간이 있었기에 이승만, 박정희라는 전직 대통령이 묻혀있는 권위주의의 상징적 장소이기도 하고요. 오랜 시간 동안 이런 입장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가야하는 공간’이었고, 이것에 반대하고 저항하는 사람들은 ‘절대 찾지 않는 공간’이었어요. 극명하게 대비되는 공간이었던 거죠. 저도 동작구에 89년부터 살았는데, 2011년 즈음에서야 제대로 현충원에 가보았거든요(하하).
2005년에 방북해서 '신미리 애국열사릉'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 일을 계기로 “서울현충원에는 어떤 사람들을 기리고 있을까?”라는 궁금점이 생겨 관심을 가지게 되었어요. 현충원을 방문하면 제일 많이, 크게 보이는 게 비석과 묘비잖아요. 이것만 보아도 정말 쉽게 바뀌지 않는 공간이라는 게 느껴질 거예요. 연필로 쓰고 지울 수 있는 게 아니라, 돌로 새겨서 박아버린 역사니까요.
그렇지만 가만히 두기에는 문제가 너무 많아요. 역사를 반영하고 있다고 해서 과거의 공간인 것은 아니잖아요. 우리 사회는 계속 바뀌는 데 이 공간은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들이 한 두 개가 아니라는 걸 발견했어요. 늦게 변하고, 쉽게 변하지 않을 뿐,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전사’로 표기되어 있는 5.18 계엄군의 묘를 ‘순직’으로 바꾸도록 하고, 국립서울현충원에서조차 차별 당하는 여성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함께 표기하도록 요구했지요. 처음 바꾸는 게 어렵지, 하다 보니 할 만 해요(하하). 예전에는 아무리 찔러보고, 요구하고, 항의해도 잘 안 되었는데 올해 이곳저곳 많이 바뀌었어요. 저도 현충원 관리운영측도, “문제가 있는 건 바꾸어야 하고, 바꿀 수 있는 것이구나?”라는 걸 서로 안 것이겠지요(하하).

국립서울현충원 맞은 편에 위치한 동작주차문화공원에 월남참전기념탑 ⓒ짜미
Q. 베트남전쟁 문제도, 기억과 기록을 위한 과정도, 정말 많은 고민과 논의가 필요한 데 쉽지 않아요. ‘묘안’이 절실하네요. 아무도 모르는 거겠지만 말이예요(하하하).
후원회원을 어떻게 결심하게 되었는지 앞에서 짧게만 말씀 드렸지만, 제게 가장 와 닿았던 것은 재단이 베트남의 현실을 알리려는 것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변화와 움직임을 만들어내기 위한 국내에서의 다양한 활동이에요. 국회를 움직이려는 노력까지 하고 계시잖아요. 그런 활동들을 의미 있게 살리고 더 적극적으로 펼쳤으면 좋겠는데, 여러 이해 당사자가 얽힌 문제이다 보니 많은 고민이 있을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전에 제가 활동을 하며 만난 사람들 중 한 분이 별 얘기는 안하셨지만 “나도 사실 월남전 참전했었다. 나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데 엉뚱한 사람들이 이상한 말만 하니 참 답답하다. 미워하고 분노하는 사람만 나와서 얘기하는 마당에…. 내가 월남전 갔다 왔다고 얘기 안 하는 건 할 말이 없어서 안 하는 게 아니다”고 털어놓으신 적이 있어요. 모두가 어려운 상황에서 지혜롭게 활동을 펼쳐나갈 한베평화재단을 기대하고 응원합니다.
* * * * *
인터뷰를 마치고 시간을 확인하니 어느새 저녁 일곱 시가 다 되어가고 있다. 이야기를 시작한 것이 네 시 즈음이니 거의 세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눈 셈이다. <베트남 평화기행 in 대한민국> 프로그램에서 만난 것 외에는 처음으로 단 둘이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눈 것인데,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선배와 근황을 나누고 활동에 대한 고민을 나누는 것 마냥 편안한 시간이었다.
김학규 후원회원과의 만남으로 진정한 이야기꾼은 타고난 입담으로 나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사람이 아니라, 상대방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능력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았다. 나의 의견만을 주장하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고 안전하게 이야기할 수 있도록 진심으로 공감하며 귀 기울여주는 ‘듣는’ 평화를 배우는 시간이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김학규 후원회원과 함께. ⓒ짜미
인터뷰·글 ㅣ 한베평화재단 짜미 활동가
[인터뷰] 여기, 타고난 이야기꾼이 있다.
/ 김학규 후원회원 인터뷰
인류의 역사에서 ‘이야기’를 빼면 무엇이 남을까? 이야기는 모든 서사의 근원이다. 서사를 만들고, 이해하고, 향유하는 능력은 인간의 본성이다. 인간은 누구나 이야기 하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어쩌면 ‘이야기꾼’이라는 직업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인류의 직업 중 하나일 지도 모르겠다.
문자가 생기고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까지, 이야기꾼은 가장 능력 있는 창작자이자 전달자였다. 1700년대 조선 후기, 이야기책이 유행하던 시절에는 시내 저잣거리에서 이야기책을 읽어주는 것을 업으로 삼은 전문 입담꾼도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전기수(傳奇叟)’라 불렀다. 단순히 글자를 읊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실린 채로 일종의 연기를 펼쳤고, 길을 가던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할 만큼 이목을 끌었다. 1960년대까지도 시골 장터에서는 구수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전기수가 있었다고 한다.
김학규 후원회원을 처음 만났을 때, “이제는 직업선택란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이야기꾼’이 아직 존재하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모인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자료를 캐내 글을 쓰고, 팟캐스트와 라디오에 출연하고, 지역 곳곳을 누비며 만남을 찾아가는 사람. 모든 특징에서 '프로 이야기꾼'의 면모가 보인다.
2021년 7월, 한베평화재단 후원회원 가입을 통해 새로이 평화의 인연을 맺게 된 김학규 회원과 이야기 나누어본다.
인터뷰를 위해 찾은 사무실에서 김학규 후원회원을 만났다. ⓒ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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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안녕하세요, 처음부터 너무 훅- 들어가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하하). 재단 회원들에게 간단히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인터뷰 질문지를 받았을 때 가장 어렵겠다고 생각한 질문이 바로 이겁니다(하하). 저는 서울시 동작구에 사는 김학규라고 합니다. 대학생 때에는 민주화운동, 학생운동에 참여했습니다. 박종철과 대학 동기였고 그때 인연으로 박종철기념사업회에서 오랫동안 사무국장직을 맡았어요. 지금은 지역운동의 방법으로 사회 운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지역을 고민한다는 것이 조금 낯설지요? “지역에 바쁜 일이 있어요.”라고 하면 “어디 내려갔다 오셨는데요?”하고 묻는 경우도 종종 있더군요(하하). 동작구에서는 '역사문화연구소'라는 단체를 만들어 지역 주민 활동과 지역 네트워크 활동을 하고 있어요. 은평구에서도 '인권도시연구소'라는 단체를 운영하며 도시 수준에서의 인권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고요. 개인적으로 오마이뉴스*에 지역의 역사나 독립운동, 민주화운동과 관련한 이야기를 연재하는 활동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 [오마이뉴스] 소설가 심훈? 그의 직업은 더 있었다 / 김학규
* [오마이뉴스] 만주 장교가 '광복투쟁'? 현충원 속 기막힌 신분세탁 / 김학규
* [오마이뉴스] 사당동 89번 종점, 버스 50여대가 일시에 멈춘 사연 / 김학규 外
Q. 우와, 평생을 운동가로 사셨네요! 활동을 하며 서울 지역 곳곳을 누비는 모습도 인상적입니다.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김학규 선생님이 지금껏 활동해 오신 발자취를 찾아보았어요. 이번 만남에서 함께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참 많겠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지난 7월에 한베평화재단의 따끈따끈한 신입회원이 되셨네요. 재단 후원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어요?
아이고, 참 부끄럽게 언제 또 다 찾아보셨대(하하). 한베평화재단에서 평화기행 프로그램으로 국립서울현충원 탐방을 함께 한 인연이 직접적인 계기였지 싶어요. 작년에 제주 4.3을 주제로 현충원을 방문한 팀의 해설을 맡았는데, 그때 멤버 중 한 분이 재단의 석미화 사무처장님이었거든요. 이런 인연이 다 있지요? 그러다 올해 재단 평화기행을 함께한 직후였던가, 자꾸 제 페이스북에 한베평화재단 소식이 뜨는 거예요(하하하). 한두 번 보고 나니까 점점 더 많이, 계속 나타나더라고요? 그러다 얼마 전에는 특별법 제정을 위한 국회 간담회 소식을 접했어요. “굉장히 구체적인 변화를 만들어내려고 노력하고 있구나”, “점점 앞으로 나아가는 활동을 해왔구나” 생각이 들어서, 평화기행으로 함께한 인연도 있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싶은 마음으로 회원가입을 하게 되었지요.
김학규 후원회원은 '동작역사문화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인터뷰를 위해 찾은 소박한 사무실은 동작구에서 지역 시민 활동을 하는 네 개의 단체가 공용으로 사용하는 따듯한 공간이다.
따로, 또 같이. 지역과 사회, 평화와 인권을 고민하는 단체들이 모여있는 분위기가 참 좋았다. ⓒ짜미
Q. '역사적 사건의 영화화'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나눠볼까 해요. 1987년 6월 항쟁의 배경이 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다룬 2017년 개봉작, 영화 <1987>과 인연이 있다고 들었어요. 실화를 기반으로 만든 영화가 갖는 힘이 크지만, 그것이 갖는 한계와 위험성도 분명히 있잖아요.
그렇죠, 극영화니까 아무래도 장단점이 더 분명할 수 밖에요. 영화 <1987>을 제작하는 초기 과정에 작가님이 시나리오 초안을 가지고 오셨어요. 아주 구체적인 사실관계에 입각해서 내용을 쓰셨기에 놀랐고, 몇 가지 의견이나 피드백을 주고받았어요. 그런데 막상 영화가 나오고 보니 제가 그때 본 것과는 상당히 다른 내용이더라고요. 사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는 과정이 굉장히 복잡하거든요. 대중 영화다보니 몰입을 위해 집중하고 포기하는 과정에서 초반 논의와는 이야기가 많이 달라 질 수 밖에 없었던 거예요. 예를 들어 영화에서 경찰은 정말 ‘나쁜 놈’이고 검찰은 ‘착한 놈’이잖아요?* 하정우씨가 맡은 역할이 최검사인데, 워낙 연기를 잘하셔서 그런지(하하)…. 검찰은 경찰과 달리 진실을 밝히려 애쓴 것처럼 다뤄진 게 조금 아쉽더라고요.
*영화 <1987>에서 검찰은 부검 없이 화장하려는 경찰을 막고 온갖 회유와 압박에도 부검을 하도록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그려지지만 이는 최환 당시 공안부장 검사 개인의 중요한 역할과 결정적 조치였을 뿐이다. 검찰은 자신에게 주어진 수사권마저 사실상 포기하고 경찰 자체 수사에 맡겨 박종철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을 축소‧왜곡‧조작하도록 방조하였고 이후 여러 차례 기회가 있었음에도 제대로 된 수사를 하지 않았다. / 박종철 열사 30주년 기념 발간 ‘그대 촛불로 살아 (김학규, 박종철기념사업회 사무국장)’ 中
Q. 관객 수가 무려 723만 명. 꽤 성공한 영화인 셈이지요? 흥행과 더불어 박종철, 이한열 열사의 이야기도 다시금 주목을 받았던 기억이 있는데. 실제로 관련 이슈에 대해 사람들의 관심이나 이해가 달라졌다고 체감하셨나요?
그럼요, “탁치니 억하고 죽더라”는 말은 많이 들어보았다고 해도 대부분 구체적인 배경이나 상황, 관계까지는 잘 모르니까요. 영화가 갖는 파급력과 주목도가 크다 보니 덕분에 많은 사람들에게 이 사건이 더 알려지게 되었죠. 그러면서 경‧검찰의 사과와 반성이라는 현실적인 요구도 다시금 주목 받았고요. 결국 검찰은 한 사람도 구속되지 않았고 심지어는 조사도 받지 않았거든요. 여론이 계속 몰아가니 결국 문무일 당시 검찰종장이 영화 <1987>을 관람하고 애도와 사과의 뜻을 표시했고, 이후에는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가 입원한 병원에 찾아가 과거사에 대해 사과하고 죄송하다고 전하기도 했어요. "영화가 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분명 큰 기여를 한 부분이 있지요.
그런데 또 중요한 게 “영화는 영화일 뿐” 인 것 같아요(하하). 실제 역사와는 반드시 구별해보아야 한다는 거죠. 영화를 계기로 “아 이런 것이었구나!” 하고 더 배우고 알아 가면 좋을텐데 그 이상으로는 가지 않아 문제가 되기도 하죠. 영화가 100% 사실은 아니니까요. “영화에서 그렇게 나오던데?”라고 이야기를 들으면 참 난감하죠(하하하). 사극이나 드라마도 마찬가지잖아요. 흥미 유발과 관심의 계기로는 너무 좋지만, 그것을 시작으로 해야지 끝으로 둬서는 안 되지요.
2019년 서울 용산구 민주인권기념관(옛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열린 박종철 열사 32주기 시민추모제에서
박종철 열사 아버지의 영정을 들고 대공분실 509호에서 나오는 모습(사진 왼쪽이 김학규 후원회원) ⓒ강원도민일보
2015년,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 임명철회 촉구 기자회견에서 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사무국장으로 참여한 모습.
(사진 왼쪽에서 세번째) ⓒ오마이뉴스
Q. 민주화운동을 하시다 지역 운동으로 전환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역사를 매개로 지역 활동을 하겠다고 생각하신 점도 흥미로워요.
80년대에 대학에 입학해서 한국사를 전공했는데요. 열심히 공부해서 어렵게 대학을 갔는데 “세상이 참 복잡하구나, 쉽지 않구나”만 깨달았어요. 고민이 클 때 한 선배가 저에게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지금도 생생한데, “역사는 붓으로만 쓰는 게 아니라 온 몸으로 쓰는 거야!”. 이 말을 듣고 고민 끝에 결심을 했어요. “한 10년 우리가 직접 같이 부딪히고 움직이면 사회를 바꿀 수 있지 않겠냐, 공부는 나중에 서른 즈음에 다시 시작해도 된다.”
그런데... 세상이 금방 바뀌지는 않더라고요? (하하하). 생각만큼 만만하진 않았던 거죠. 평생 해도 될까 말까 한 것이라면 더 장기적인 목표와 계획을 가지고 활동해야겠다고 판단했어요. 그렇게 지금 지역운동까지 오게 되었죠. 이것도 쉽지는 않아요, 엄청난 장기전이랄까(하하). 제가 좋아하는 것, 잘할 수 있는 것이 역사니까 이 길을 택했지요. 지역사를 보통 '향토사'라고 하는데, 서울의 경우에는 서울 전체와 관련된 것은 있어도 각 지역이나 자치구에 대한 자세한 접근은 잘 없거든요. 지역사라고 하더라도 보편적인 역사와 크게 멀리 떨어지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지역의 역사가 한반도 역사와 어떤 연관성을 가지며 상호작용을 하는 지 공부하다 보니 더 깊이 역사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죠. “동작의 역사를 알면, 동작의 현재와 미래가 보인다!” 이게 동작역사문화연구소의 모토인데요. 주민들이 지역의 역사를 매개로 지역에 대한 자부심을 갖게 되면 지방자치에도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Q. 이미 운을 떼어주신 것 같은데요, 역사를 ‘기억’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가끔 강연이나 인터뷰를 나가면 꺼내는 말이 있어요. “현재를 지배하는 사람이 과거를 지배하고, 과거를 지배하는 사람이 미래를 지배한다.” 『1984』를 쓴 조지 오웰이 한 말인데요. "역사라는 건 단순히 옛날 일을 외워서 시험 보는 문제가 아니다"라는 거예요. 현재를 지배하고 싶은 사람은 계속 권력을 유지하고 싶을 거고, 그때 제일 먼저 하는 것 중 하나가 자기의 시각에서 역사를 재해석하고 심지어 왜곡해서 나에게 유리한 스토리를 만드는 거죠. 사람들로 하여금 “우와, 이런 사람이라면 미래를 맡겨도 되겠다네!”하고 생각하게 만들죠. 그래서 “옛날이야기 그만하고 미래만 보자”는 논리가 참 황당한 거예요. 역사를 기억한다는 것은 현재 우리가 어디에 있는 지를 확인하고,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하는 지를 정확히 보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문제인 것이니까요.
Q. 역사를 자기 문제로 받아들이는 것은 결국 ‘어느 순간’에 오는 것 같기도 해요. 저도 역시 그랬고요. 그 계기와 경험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요? 역사와 사회 문제를 내 것으로 삼아야 한다는 게, 머리로는 이해되지만 마음으로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하잖아요.
시기는 다르겠지만 사람마다 역사와 자신의 연결 고리를 발견하는 계기가 주어진다고 생각해요. 자기가 이슈를 만나는 범위를 확대해나가면 더 빨리 만날 수 있겠지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다양한 시각을 살펴보고 자기 시각을 가지고 역사를 정확히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거예요. 베트남전쟁도 누가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상당히 다르게 해석되잖아요? 과거에는 국가와 민족의 관점에서 접근했지만 이제는 평화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시도가 필요하죠. 이전 같은 생각이라면 ‘전쟁은 모두에게 피해와 상처를 준다’는 생각은 중요하지 않고, 그저 ‘국익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가’만 보게 되잖아요. 그러니 당연하게 애국을 위한 행위에서 발생한 부작용이나 안타까운 결과는 불가피했던 것으로만 치부되고요. 그래서 저도 계속 평화라는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고 해석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설득하려고 연습하고 고민하고 있어요.
지난 6월, 한베평화재단의 <베트남 평화기행 in 대한민국> 프로그램으로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아
김학규 후원회원과 현장 탐방을 함께 진행하였다. 사진은 묘역에서 해설을 진행하고 있는 김학규 후원회원의 모습. ⓒ짜미
Q. 선생님의 현충원 해설을 들으면서 스토리텔링을 만들기 위해 정말 많은 자료를 찾고 준비하셨구나 싶었어요. 역사에 대한 엄청난 관심과 애정도 뿜뿜 느껴졌고요. 재단에서도 평화기행 프로그램이 있다 보니 저 또한 종종 이끔이 역할을 해요. 얼마나 어렵고 쉽지 않은 일인지 깊이 공감합니다(하하). 해설을 준비할 때에 가장 신경 쓰거나 고민하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본 원칙은 ‘정확한 사실을 전달하자’는 거예요. 한 가지 사실을 둘러싼 전후, 좌우를 전부 살펴보아야 확실한 한 마디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잘 모르는 것에 대한 질문이 들어오면 “더 찾아보겠다”고 하고 보충해서 반영하고, 나중에 찾아 전달해주기도 하고. 대충 하면 다 티가 나잖아요? (하하). 제가 주로 이야기하는 것들이 근현대사에 해당하는 이슈들이라 여러모로 민감하고 조심스러운 부분도 있어요. 민감한 이슈일수록 어떻게든 더 설득력 있게 논리적으로 만들어야 하는 데 그게 참 쉽지 않아요. 그렇다고 지나치게 타협하고 가볍게만 다루면 아쉬움이 남고요. 특히 베트남전쟁이 그렇지요.
매년 6월 6일 현충일 부근이면 굉장히 많은 관람객이 현충원을 찾아요. 지금은 코로나19 때문에 치운 것 같은데 원래는 월남전사자 묘역, 그러니까 채명신 장군 묘역 바로 앞에 큰 벤치가 있었어요. 어르신이나 참전군인 분들이 그곳에 앉아 있다가 제 해설을 듣고 화내거나 혼내는 경우도 있었죠(하하하).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아온 만큼 관점도 매우 다르잖아요. 그렇지만 당사자 분들의 입장과 생각을 아예 배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베트남전쟁의 역사를 한국 사회가 냉정하게 바라보고 평가하려면, 어쩌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럼에도 사회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시기가 비로소 찾아 왔을 때,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펼쳐 나가려면 지금부터 다양한 논의나 대화를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요. 그래서 한베평화재단의 활동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지요.
Q. 동종업계 종사자(?)로서 무한 공감을 느꼈습니다(하하). 서울현충원에서 베트남전쟁은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이야기 주제잖아요. 해설사로 재단과 함께한 <베트남 평화기행 in 대한민국> 현충원 프로그램은 어떠셨어요?
이전에 고등학교 평화기행 해설로 만났을 때 재단 활동가분들이 “현충원에 월남참전탑이 있다는데 어디 있나요?”하고 물어본 적이 있어요. 당시에는 저도 잘 모르겠어서 정확한 답변을 드리지 못했는데, 이후로 검색도 하고 자료도 찾아보니까 현충원 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맞은편 동작주차문화공원에 세워진 월남참전기념탑이더라고요. 해설 때문에 현충원을 자주 찾았어도 그런 것이 있는 줄은 몰랐지요. 그런 면에서 보면 월남참전기념탑은 좋은 자리를 선택하지는 못한 것 같아요. 그 자리는 사람들의 이동이 거의 없는 곳이거든요. 저도 재단과 만나서 새로운 걸 발견하고 배운 시간으로 남았어요.
Q. 김학규 선생님의 현충원 해설을 들으며 묘지라는 특수한 공간을 살아있는 곳으로 느끼게끔 한다는 점이 매우 인상적이었어요. 보통 역사 유적지나 묘역이라는 공간은 과거 어느 시점에 멈춰서 박제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잖아요. 특히 미래와 연관 짓기는 더욱 어려운 공간이라고 생각되고요.
현충원이라는 공간도 본래 목적만 생각하면 국가주의와 애국주의를 강력하게 보여주는 아주 상징적인 공간이에요. 특히 우리 사회는 군사독재 정권 기간이 있었기에 이승만, 박정희라는 전직 대통령이 묻혀있는 권위주의의 상징적 장소이기도 하고요. 오랜 시간 동안 이런 입장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가야하는 공간’이었고, 이것에 반대하고 저항하는 사람들은 ‘절대 찾지 않는 공간’이었어요. 극명하게 대비되는 공간이었던 거죠. 저도 동작구에 89년부터 살았는데, 2011년 즈음에서야 제대로 현충원에 가보았거든요(하하).
2005년에 방북해서 '신미리 애국열사릉'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 일을 계기로 “서울현충원에는 어떤 사람들을 기리고 있을까?”라는 궁금점이 생겨 관심을 가지게 되었어요. 현충원을 방문하면 제일 많이, 크게 보이는 게 비석과 묘비잖아요. 이것만 보아도 정말 쉽게 바뀌지 않는 공간이라는 게 느껴질 거예요. 연필로 쓰고 지울 수 있는 게 아니라, 돌로 새겨서 박아버린 역사니까요.
그렇지만 가만히 두기에는 문제가 너무 많아요. 역사를 반영하고 있다고 해서 과거의 공간인 것은 아니잖아요. 우리 사회는 계속 바뀌는 데 이 공간은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들이 한 두 개가 아니라는 걸 발견했어요. 늦게 변하고, 쉽게 변하지 않을 뿐,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전사’로 표기되어 있는 5.18 계엄군의 묘를 ‘순직’으로 바꾸도록 하고, 국립서울현충원에서조차 차별 당하는 여성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함께 표기하도록 요구했지요. 처음 바꾸는 게 어렵지, 하다 보니 할 만 해요(하하). 예전에는 아무리 찔러보고, 요구하고, 항의해도 잘 안 되었는데 올해 이곳저곳 많이 바뀌었어요. 저도 현충원 관리운영측도, “문제가 있는 건 바꾸어야 하고, 바꿀 수 있는 것이구나?”라는 걸 서로 안 것이겠지요(하하).
국립서울현충원 맞은 편에 위치한 동작주차문화공원에 월남참전기념탑 ⓒ짜미
Q. 베트남전쟁 문제도, 기억과 기록을 위한 과정도, 정말 많은 고민과 논의가 필요한 데 쉽지 않아요. ‘묘안’이 절실하네요. 아무도 모르는 거겠지만 말이예요(하하하).
후원회원을 어떻게 결심하게 되었는지 앞에서 짧게만 말씀 드렸지만, 제게 가장 와 닿았던 것은 재단이 베트남의 현실을 알리려는 것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변화와 움직임을 만들어내기 위한 국내에서의 다양한 활동이에요. 국회를 움직이려는 노력까지 하고 계시잖아요. 그런 활동들을 의미 있게 살리고 더 적극적으로 펼쳤으면 좋겠는데, 여러 이해 당사자가 얽힌 문제이다 보니 많은 고민이 있을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전에 제가 활동을 하며 만난 사람들 중 한 분이 별 얘기는 안하셨지만 “나도 사실 월남전 참전했었다. 나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데 엉뚱한 사람들이 이상한 말만 하니 참 답답하다. 미워하고 분노하는 사람만 나와서 얘기하는 마당에…. 내가 월남전 갔다 왔다고 얘기 안 하는 건 할 말이 없어서 안 하는 게 아니다”고 털어놓으신 적이 있어요. 모두가 어려운 상황에서 지혜롭게 활동을 펼쳐나갈 한베평화재단을 기대하고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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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를 마치고 시간을 확인하니 어느새 저녁 일곱 시가 다 되어가고 있다. 이야기를 시작한 것이 네 시 즈음이니 거의 세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눈 셈이다. <베트남 평화기행 in 대한민국> 프로그램에서 만난 것 외에는 처음으로 단 둘이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눈 것인데,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선배와 근황을 나누고 활동에 대한 고민을 나누는 것 마냥 편안한 시간이었다.
김학규 후원회원과의 만남으로 진정한 이야기꾼은 타고난 입담으로 나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사람이 아니라, 상대방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능력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았다. 나의 의견만을 주장하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고 안전하게 이야기할 수 있도록 진심으로 공감하며 귀 기울여주는 ‘듣는’ 평화를 배우는 시간이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김학규 후원회원과 함께. ⓒ짜미
인터뷰·글 ㅣ 한베평화재단 짜미 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