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길이 끝나자 여행이 시작되었다.
: 김이정(작가, 한베평화재단 후원회원) 인터뷰
에어컨 아래서 꾸벅꾸벅 졸기 바쁘던 한 여름의 강의실. 노트에 ‘휴먼졸림체’를 끄적이며 “교수님, 저는 절대로 자고 있는 게 아니라 생각 중인 겁니다.”를 어필하려 무거운 눈꺼풀과 싸운 기억이 있다. 비평 수업이었을까, 교육론 수업이었을까. 말도 안 되는 꼬불꼬불 필기 속에 한 문장이 형체를 잃지 않고 살아남았다.
“길이 끝나자 여행이 시작되었다” 헝가리 출신의 철학가, 문예이론가 루카치가 『소설의 이론』에 쓴 문장이라나. 소설의 기원으로 꼽히는 대표적인 작품, 그러니까 괴테 「파우스트」나 세르반테스 「돈 키호테」 같은 이야기도 모두 주인공이 집을 떠나면서 시작되지 않나. 결국 소설은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인 것이다. 루카치에 의하면 ‘자아’를 찾기 위한 여정은 끝이 없을 지도, 어쩌면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한베평화재단의 후원회원인 김이정 작가가 세 번째 소설집 『네 눈물을 믿지 마』를 발표했다. 앞선 소설집과 10년이라는 시간차가 있다. 힘든 시간을 버티며 어렵게 써낸 결실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이번 소설집엔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피해 역사를 소재로 삼은 단편이 두 편 포함돼 있는데 「하미 연꽃」과 「퐁니」가 그것이다. 두 편의 베트남 이야기를 비롯하여 『네 눈물을 믿지 마』 속 작품들도 모두 ‘길 떠남의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김이정 작가는 어떤 길의 끝에서, 어떤 여행을 마주한 걸까.

인터뷰를 위해 경기도 어느 카페에서 김이정 후원회원을 만났다. ⓒ짜미

김이정 작가가 싸인을 담아 소설집 <네 눈물을 믿지 마>를 짜미 활동가에게 주었다. ⓒ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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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베트남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처음은 2017년이었죠. 전 해(2016)에 『유령의 시간』으로 대산문학상을 받아 상금이 생겼고, 나를 위한 선물로 베트남에 한 달 정도 살아보고 싶었어요. 여러 나라 중 베트남을 선택한 이유는,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작가들의 모임’을 만들고 이어온 김남일 작가와 친분이 있어서 이전부터 베트남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시내씨와도 연이 있었고요. 마침 마감을 해야 하는 소설이 있기도 해서, 소설 쓰기와 휴식을 겸해 2017년 1월 1일, 베트남으로 훌쩍 떠났죠.
다낭에 머무르던 어느 날, 시내 씨가 한국 대학생들로 구성된 평화순례단과 베트남 위령비를 방문할 예정이라고 전해주었고 냉큼 “나도 같이 가자”고 했죠. 이야기로만 들었던 한국군 증오비를 실제로 보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혼자 온 여행이라 동네 지리도 겨우 익혔고, 베트남어는 한 글자도 모르던 터라 엄두도 못 내고 있었거든요. ‘기회는 이때다!’ 싶어 바로 따라갔죠. 그때 처음으로 하미마을에 갔고 너무 큰 충격을 받았어요.
Q. 하미 마을에서 어떤 경험을 하셨나요?
하미 위령비를 방문했어요. 참배를 한 후 차분히 위령비를 읽었죠. 위령비 앞면에 학살로 희생된 135명의 주민 이름이 나이순으로 써 있잖아요. 베트남은 이름으로 성별을 추측할 수 있어 대부분이 여성이었다는 것을 알았고, 노인부터 아기까지 빼곡하게 적힌 나이를 읽으며 참담함을 느꼈죠. 특히 아직 이름도 짓지 못해 그냥 ‘응우옌의 아기’라 표시할 수밖에 없었던, 그해 태어난 세 이름을 볼 때 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위령비 뒷면의 붉은 연꽃 그림을 볼 때에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연꽃은 어떤 꽃보다 기품 넘치고 우아한 꽃이잖아요, 베트남 국화이기도 하고요. 그렇게 아름다운 꽃이 커다랗고 핏빛처럼 빨갛게, 심지어 아이들이 그린 것 마냥 거칠어서 너무 당혹스러웠죠. 그때 시내 씨가 연꽃 그림은 그날의 참상을 기록한 비문을 덮으며 만든 것이라고 알려주었어요. 부끄러움, 분노, 절망감 같은 감정을 느꼈죠. 베트남전쟁이 그때까지도 끝나지 않았다는 게…. 내가 그동안 알고 있던 것들이 너무 피상적인 데 불과했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날 퐁니 위령비와 야유나무 주변도 둘러보았고요.
숙소로 돌아왔는데 그날 보고 들은 것들이 너무 충격적이라, 원래 쓰던 글을 이어 쓸 수가 없었어요. 너무 강렬한 인상을 받아서,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우선 기록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했죠. 사실 처음에는 퐁니 마을 야유나무를 화자로 하는 이야기를 썼어요. 몇 줄 써내려가다 자료 검색 겸 인터넷을 찾아보니까 고경태 기자님이 이미 비슷한 글을 쓰셨더라고요. “아, 이건 안 되겠다” 급정거하고, 다시 하미 마을의 기억으로 돌아갔죠. 그 자리에서 <하미 연꽃>을 쓰기 시작했고, 베트남에 머무는 동안 완성했어요.
Q. 2018년과 2019년에도 연달아 하미 위령비를 방문하셨다고요. 3년 동안 하미 마을을 찾았는데, 매번 다른 경험이었나요?
2018년 호이안을 여행할 때, 베트남 가족이 운영하는 조용하고 소박한 게스트하우스에서 머물렀어요. 제법 친해진 주인아저씨가 자신이 경험한 베트남전쟁과 한국군 이야기를 들려주었죠. 어릴 적에 한국군이 태권도를 가르쳐줬대요. 제가 “하미 마을에 가보고 싶다”고 하니 흔쾌히 직접 데려다주겠다고 나서더라고요. 둘이 차를 타고 한참을 헤매다 겨우 하미 마을에 도착했어요. 심지어 처음엔 미군 학살이 있었던 위령비로 잘못 찾아 갔어요. “아, 여기가 아닌데!” 급히 깨닫고 다시 물어물어 하미로 향했죠. 가까운 동네이고, 베트남 사람이니 당연히 알 거라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던 거예요. 어렵게 하미 위령비 입구까지 갔는데, 하필 진입로가 공사 중이라 안에도 들어가지 못했어요. 아쉬운 대로 동네와 주변을 둘러보며 지형과 분위기를 파악하고 돌아오는 데에 그쳤죠.
2019년에는 권현우(짜노 활동가)씨의 연결로 베트남 중부에 거주하는 재단 회원 한 분을 소개 받아, 전부터 참석하고 싶었던 하미 학살 51주기 위령제에 참여했어요. 뒤에서 조용히 보기만 하려 했는데, 마을 분들이 배려를 참 많이 해주셨어요. 어떠한 반감도 없이 저희가 들고 간 꽃을 가장 좋은 자리에 놓게 하고, 향도 가장 먼저 피울 수 있게 해주셨죠. 뜻밖의 환대에 참 죄송하고 무거운 마음이 들었어요.

하미 위령비를 찾은 김이정 작가. 뒤로 붉은 연꽃으로 덮힌 하미 위령비 뒷면이 보인다. (왼쪽 사진) /
다른 해에 하미 위령비를 찾은 모습. 희생자 명단이 적힌 하미 위령비 앞면이 보인다. (오른쪽 사진) ⓒ김이정
Q. 위령비를 방문한 경험뿐 아니라 베트남에서 살아 본 경험도 소설을 구상하는 데 영향을 많이 주었을 것 같아요.
굉장히 좋은 시간이었죠. 저는 시끄럽고 번잡한 곳을 싫어하고, 맛집이나 관광지에도 관심이 없어서 보통 시내에서 떨어진 조용한 곳에 숙소를 잡아요. 식사도 근처 로컬 식당에서 해결하고요. 자주 가던 동네 식당에 젊은 종업원이 한 명 있었어요. 그때 베트남에서 한창 k-pop이나 한국 드라마가 유행이었나 봐요. 그 청년도 한국 문화의 열렬한 팬이었고, 제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너무 반가워하며 어떻게든 한국말 한 마디를 해보려 노력했죠. 너무 친절해서 저도 자꾸 보고 싶었고, 그 가게를 자주 찾았어요. 친하게 지내면서도 마음 한 켠은 계속 무거웠죠. 지금은 이렇게 서로 즐겁고 다정하게 만나 금방 친구가 되는데, 그 이면에 안타까운 역사가 있구나. 그걸 나도 잘 모르고 이들도 잘 모르겠지…. 복잡한 마음이 들었죠.
베트남을 처음 갔던 해에, 마침 친구들과 베트남을 여행 중이던 대학생 아들과 잠깐 만난 적이 있어요. 제가 시장에서 물건을 사면서 흥정하거나 더 싼 거를 찾으려 했더니, 아들이 “엄마, 여기서는 깎지 말고 돈을 팍팍 써야지! 그거라도 해야지 않겠어?”하더라고요(하하). 기본적인 미안함이 있나 봐요. “그래, 네 말이 맞다” 바로 수긍했죠
우리 아들이 맹호부대에서 군복무를 했거든요. 베트남전쟁 때 맹호부대가 파병을 했던 사실도 알고 있고, 그 애 역시 한국군 위령비에 가보고 싶다고 했는데 아쉽게 그때엔 기회가 안 되었네요.
Q. 그렇게 한국에 돌아와서, 베트남의 자응언 소설가를 만나셨군요. 두 작가님의 인연이 깊다고 들었어요.
“2017 아시아문학창작워크숍”에서 자응언 선생을 처음 만났어요. 아시아와 국내 작가들이 만나는 자리였는데, 자응언 선생은 “화해, 할 수 있지 않을까”를 주제로 발표를 했고, 저는 베트남에서의 경험을 나누는 짧은 대담을 했죠. 행사를 계기로 많이 친해졌고 다음해 1월에 베트남을 다시 찾았어요. “이번에는 베트남을 제대로 알아보자!” 싶어서 북부 하노이부터 중부 다낭, 후에를 거쳐 남부 호찌민시까지 한 달 정도 머물렀어요. 자응언 선생 댁이 호찌민시에 있는데 그때 저를 집에 초대해주셨죠.
자응언 선생은 따듯하고 친절하게 저를 맞아주었어요. 통역도 없이 서툰 영어와 번역기에 의지해 대화를 나누었지만 가족, 전쟁, 평화, 예술에 대해 많은 교감을 나눴고요. 아, 그때 박항서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 축구팀의 첫 경기가 있었어요. 자응언 선생과 시내로 나가 오토바이 탄 응원 행렬 속에 섞여 커피를 마신 기억도 있네요(하하). 소설 『자그마한 가족』이 한국어로 번역 중이라고 들었어요. 한국에 소개된 베트남 작가가 많지 않잖아요, 특히 여성 작가는 더 드물고요. 저도 아주 큰 기대를 하고 있는 작품이라, 어서 출간되어 한국 독자들에게 알려지면 좋겠어요.

2018년 호찌민시에서 자응언 작가를 만난 김이정 작가.(오른쪽 사진) /
두 작가는 서로 자신의 작품(김이정 작가의 <유령의 시간>, 자응언 작가의 <자그마한 가족>)을 교환하였다.(왼쪽 사진) ⓒ김이정
Q. 베트남에서 완성한 <하미 연꽃>과 달리, <퐁니>는 한국에 돌아와 쓴 작품이지요?
2017년 처음 베트남을 방문했을 때도 퐁니 마을에 가보긴 했지만, 퐁니·퐁녓 학살 생존자 응우옌티탄을 처음 만난 건 2019년이에요. 직접 집에 방문하여 증언을 들을 기회가 있었죠. “1968년 2월 12일에…”하고 이야기를 시작할 때까지도 ‘내가 8살일 무렵인가?’하고 말았거든요. 이야기를 들으며 기억을 조각조각 맞춰보니 어느 순간 나와 동갑이라는 퍼즐이 딱 맞춰지더라고요. 눈물이 울컥 쏟아져 엉엉 울었어요. “난 당신과 나이가 같다”고 하니, “그럼 우리 친구네!”하곤 저를 껴안아주었죠.
대화 후에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야유나무 밑 퐁니 위령비로 향했어요. 어깨에 있던 제 손이 아래로 미끄러지며 무심코 탄의 움푹 파인 옆구리에 닿았어요. 그 순간 너무 놀라 숨이 멎었죠. 그 서늘함을 잊을 수 있을까요. 손을 그대로 둔 채 상처를 껴안고 계속 길을 따라 함께 걸었어요. 그러면서 제가 8살 때에 무얼 했는지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죠.
어릴 적 기억 속 한 장면이 생각났어요. 이웃 동네 이장 아들이 ‘월남’에 갔다 왔는데, 신기한 물건을 잔뜩 가져왔다는 거예요. 지금 생각하면 우리 동네도 아니고 옆 동네인데 그게 뭐라고 따라 갔나 모르겠지만, 친구들이 전부 간다고 하니 저도 쫓아갔죠. 그 집 마당에 동네 사람들이 한가득 모여 있었고, 이장 부부가 물건을 하나하나 꺼내 보여주자 사람들이 박수까지 쳐가며 구경했어요. 깡통 음식이나 망고 사탕 같은 것들이었죠. 아마 탄이 학살을 경험한 나이가 딱 그 무렵이었을 것 같아요. 기억들이 나란히 병치되는 순간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솟구쳤죠. 내가 철없이 트랜지스터 라디오나 탐내고 있을 때, 내 친구는 이런 끔찍한 일을 겪고 있었구나…. 베트남이 각별하게 저에게 다가와 박힌 순간이었어요.

Q. 베트남전쟁을 소재로 글을 쓸 수밖에 없는 운명은 아니었을까 생각이 드네요(하하). 그래도 직접 증언을 듣고 현장을 가본 경험이 있어도, 그 이야기를 내 작품으로, 특히 소설로 쓰는 건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 같아요.
베트남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가 너무 강렬했어요. 영화나 소설 속 베트남전쟁이 아닌, 날 것 그대로의 역사를 현지에서 맞닥뜨린 충격이 컸죠. 역사 문제에 관심도 많고 베트남의 입장에 설 준비도 되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모르는 게 너무 많구나’ 반성이 들었죠. 동시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처럼 피상적으로 알고 있거나 그마저도 모르고 있을까 싶었고요.
<2017 아시아문학창작워크숍>에서 자응언 선생과 대담할 때, “베트남과의 교류에 앞서 사과가 필요하고, 작가로서 할 수 있는 사과의 방법은 소설을 쓰는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그래서 <하미 연꽃>에 이어 <퐁니>까지 작품을 쓰게 되었죠. 사실을 알리고 싶다는 마음에 ‘재현’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었어요. 새로운 전망을 제시한다거나 뾰족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런 이야기가 있다는 것은 남겨야 한다. 그것에 집중하다 보니 다소 세밀하고 정교한, 때로는 불편하기도 하고 읽기 힘들 수도 있는 재현을 하게 되었네요.
Q. 증언을 듣고 글로 쓰는 과정이 심적으로 힘들지 않았나요? 활동가들도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는 과정에서 깊은 고민과 갈등을 자주 경험하거든요.
글을 쓸 때는 무척 힘들었죠. 묘사가 굉장히 적나라하잖아요. 지금까지 이렇게 사실 묘사와 재현에 가까운 방식으로 소설을 쓴 적이 없어요. 진저리나게 끔찍하고 쓰기 싫은 장면들도 물론 있었죠. 그럴 때에는 더 오랜 시간이 필요했어요. 감정적으로 거리감이 좀 생기면 그제야 글을 썼고요. 어렵게 소설을 완성하긴 했는데, 끝내고 나니까 더 읽기 싫더라고요. 사실 다른 작품은 종종 다시 읽곤 하는데, <하미 연꽃>과 <퐁니>는 손이 잘 안가요. 증언과 몇 가지 자료에 기반을 두고 상상력을 더해 소설을 썼어요. 그러니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내용이 ‘사실’이라 할 순 없어요. 그렇게 읽는 사람들을 경계하기도 하고요. 그럼에도 진실을 알리려 애쓰긴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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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퐁니 마을에서 만난 친구 응우옌티탄과 함께.(왼쪽 사진) /
퐁니·퐁녓 학살 위령비 앞에서.(오른쪽 사진) ⓒ김이정
Q. 베트남 피해자인 ‘나’의 시점으로 내용이 전개되는 <퐁니>와는 달리, <하미 연꽃>에는 세 명의 화자(베트남 피해자, 한국 참전군인과 그의 딸)가 등장합니다. 특히 참전군인을 하나의 집단으로 묶어 표현하지 않고, 다양한 상황과 입장으로 표현한 점이 인상 깊었어요. 복합적이고 다층적이면서 동시에 지극히 개별적이기도 한 참전군인의 정체성을 담으려 많이 고민하신 것 같다고 느꼈고요.
베트남전쟁 이후 평생 트라우마를 겪는 참전군인 이야기는 제 전작인 <유령의 시간>에도 등장해요. 참전군인의 삶에 대해 이전부터 고민이 있었어요. 저는 전쟁 속에서는 어느 한쪽의 피해자만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전쟁이라는 것 자체가 누구든 원치 않는 피해나 가해의 상황에 놓이도록 만들잖아요. 그런 인식 위에서 참전군인의 입장을 헤아려 본 거예요. 군대라는 상명하복의 체계에서, 더군다나 일반 사병들은 명령을 거부하기 쉽지 않았겠죠. 가끔 언론에 비춰지는 태극기 시위 속 참전 군인을 볼 때는 “안 그러셨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기도 해요. 하지만 동시에 그게 상처의 다른 표현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죠. 기본적으로 전쟁은 그 시간을 산 모두에게 트라우마를 남길 수밖에 없으니까요.
‘서하사’라는 가공의 인물을 만들어 등장시키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어요. 현재적 의미를 고민하다보니 그의 딸도 등장했죠. 아, 그런데 최근에 2쇄를 찍고 보니 큰 오류가 있더라고요? 서하사의 딸이 ‘아들’이라고 표기된 곳이 한 군데 있어요. 이런 결정적인 오타를 뒤늦게 발견하다니…. 새로 책을 찍기 전에 잡지 못한 게 너무 안타까워요.

Q. 그럼 오류 정정을 위해 반드시 3쇄를 찍어야하니, 제가 책을 더 열심히 홍보해야겠네요(하하). 소설 한 편을 쓰기까지 많은 비하인드가 있었군요.
하나 더 있는데, 사실 <하미 연꽃>의 마지막 문장 “메이, 할 이야기가 있어”는 최종 교정을 볼 때 덧붙인 것이에요. 2017년에 처음 소설을 썼고, 단행본이 나온 게 올해니까 4년 동안 끝말을 쓰지 못했네요. 초고 쓸 때는 미안하다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어요. 간단히 쓸 수 있는 말이 아니었고 어쩌면 그 말이 그분들을 더 모욕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했고요. 이번에 마지막 문장을 쓰고 보니, 이 말을 하기 위해 나에게 4년이라는 고민의 시간이 필요했나보다 싶었죠. 이제는 적어도 제 안에서 그 말이라도 할 용기가 생긴 것 아닐까요. <퐁니> 에필로그도 이번에 추가로 쓴 것이에요. 그전에는 도무지 쓸 수가 없던 것들이 이제는 가능해졌죠. 조금 더 솔직하게 내 마음을 드러낼 준비를 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네 눈물을 믿지 마』는 베트남전쟁 이야기를 담은 두 편의 단편을 포함해, 총 여덟 개의 이야기를 엮은 책이에요. 전쟁이나 폭력, 재난 속에서 겪는 상처, 상실, 트라우마를 담고 있죠. 누군가 “아름답고 행복한 이야기도 많은데 굳이 왜 힘들고 어두운 이야기를 읽어야 하느냐”고 묻더군요. 저는 그 질문에 소설의 자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인간의 여러 모습을 보여주고, 특히 <퐁니>처럼 상처가 몸으로 만져질 만큼 깊게 배인 인물들의 서사를 통해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싶었어요. 더할 수 없이 연약하고 잔인하지만, 동시에 한없이 강하고 아름다운 존재 역시 인간이니까요. 물음표가 계속 되는 데에서 새로운 걸음이 시작될 지도 모르죠.
Q. 어느덧 인터뷰 마지막 질문이네요. 언젠가부터 재단 인터뷰 마지막엔 항상 이 질문을 넣고 있어요. 굉장히 쉽게 말하는 분도 있고, 엄청난 고민 끝에 답하는 분도 있어요. 작가님에게 ‘평화’란 무엇인가요?
저도 질문을 처음 들었을 때 ‘이렇게 거창한 걸 어떻게 대답한단 말인가’하고 속으로 생각했는데(하하). 평화란 ‘생존’이다, 이렇게 답하고 싶네요. 생존의 기본이 평화이고, 생존의 최전선에 평화가 있는 것 아닐까요. 평화가 깨지는 순간 생존이 위태로워진다는 것은 수많은 전쟁을 통해 충분히 경험했잖아요. 우리 집안사도 한국 현대사와 얽혀 참 복잡했고, 팔레스타인 출신인 제 작가 친구는 지금도 가족의 안녕을 걱정하며 매일 전쟁을 치르고 있죠. 평화라는 건 막연하고 추상적인, 머나먼 존재가 아니라 우리 삶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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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시간의 대화 끝에 인터뷰를 마무리 지었다. “저 사실…” 뱉을까, 말까 한참을 망설인 말을 용기 내어 꺼냈다. 다섯 시간 전 지하철역으로 나설 때부터 고민한 것이었다. “저 사실 국어국문학과 졸업했어요. 만나본 적 없는 회원과 인터뷰 한 것도 처음이고요. 제가 낯을 많이 가리는 편이라 걱정이었고, 그럼에도 제가 인터뷰 하겠다고 나섰는데 그 이유는…(주절주절)”
(혼자 과하게) 걱정했던 인터뷰가 무사히 끝났다는 안도감과 김이정 작가가 주는 편안함 때문이었을까? 부끄러워 밝히지 않으려 했던 것 치고는 난데없는 고백을 두서없이 우다다 많이도 쏟아냈다. “오히려 제가 임자를 만난 거였네요”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김이정 작가가 웃으며 답했다. (사실 전공에서 가장 자신이 없으면서도 제일 좋아했던 수업이 ‘현대 소설’이었으며,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지만- 왠지 전공 교수님과의 상담 같은 분위기일까, 벼락치기식 인터뷰 준비가 티 날까, 조마조마 하는 마음에 밤잠을 조금 설쳤다는 말까진 그 와중에도 너무 부끄러워 밝히지 못했다.)
전쟁 없는 세계와 안전하고 따듯한 일상을 꿈꾼다는 점에서, 아픔에 깊이 공감하고 사람을 모으고 문제를 알리고 방법을 고민한다는 점에서, 소설가라는 직업과 활동가라는 직업은 닮은 점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의 방식으로 함께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기대를 해본다. 내가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밀어주기, 오류가 정정된 3쇄 『네 눈물을 믿지 마』 출간을 위해 열심히 인터뷰 기록을 남겨본다.
인터뷰·글 ㅣ 짜미 활동가

[인터뷰] 길이 끝나자 여행이 시작되었다.
: 김이정(작가, 한베평화재단 후원회원) 인터뷰
에어컨 아래서 꾸벅꾸벅 졸기 바쁘던 한 여름의 강의실. 노트에 ‘휴먼졸림체’를 끄적이며 “교수님, 저는 절대로 자고 있는 게 아니라 생각 중인 겁니다.”를 어필하려 무거운 눈꺼풀과 싸운 기억이 있다. 비평 수업이었을까, 교육론 수업이었을까. 말도 안 되는 꼬불꼬불 필기 속에 한 문장이 형체를 잃지 않고 살아남았다.
“길이 끝나자 여행이 시작되었다” 헝가리 출신의 철학가, 문예이론가 루카치가 『소설의 이론』에 쓴 문장이라나. 소설의 기원으로 꼽히는 대표적인 작품, 그러니까 괴테 「파우스트」나 세르반테스 「돈 키호테」 같은 이야기도 모두 주인공이 집을 떠나면서 시작되지 않나. 결국 소설은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인 것이다. 루카치에 의하면 ‘자아’를 찾기 위한 여정은 끝이 없을 지도, 어쩌면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한베평화재단의 후원회원인 김이정 작가가 세 번째 소설집 『네 눈물을 믿지 마』를 발표했다. 앞선 소설집과 10년이라는 시간차가 있다. 힘든 시간을 버티며 어렵게 써낸 결실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이번 소설집엔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피해 역사를 소재로 삼은 단편이 두 편 포함돼 있는데 「하미 연꽃」과 「퐁니」가 그것이다. 두 편의 베트남 이야기를 비롯하여 『네 눈물을 믿지 마』 속 작품들도 모두 ‘길 떠남의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김이정 작가는 어떤 길의 끝에서, 어떤 여행을 마주한 걸까.
인터뷰를 위해 경기도 어느 카페에서 김이정 후원회원을 만났다. ⓒ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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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베트남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처음은 2017년이었죠. 전 해(2016)에 『유령의 시간』으로 대산문학상을 받아 상금이 생겼고, 나를 위한 선물로 베트남에 한 달 정도 살아보고 싶었어요. 여러 나라 중 베트남을 선택한 이유는,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작가들의 모임’을 만들고 이어온 김남일 작가와 친분이 있어서 이전부터 베트남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시내씨와도 연이 있었고요. 마침 마감을 해야 하는 소설이 있기도 해서, 소설 쓰기와 휴식을 겸해 2017년 1월 1일, 베트남으로 훌쩍 떠났죠.
다낭에 머무르던 어느 날, 시내 씨가 한국 대학생들로 구성된 평화순례단과 베트남 위령비를 방문할 예정이라고 전해주었고 냉큼 “나도 같이 가자”고 했죠. 이야기로만 들었던 한국군 증오비를 실제로 보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혼자 온 여행이라 동네 지리도 겨우 익혔고, 베트남어는 한 글자도 모르던 터라 엄두도 못 내고 있었거든요. ‘기회는 이때다!’ 싶어 바로 따라갔죠. 그때 처음으로 하미마을에 갔고 너무 큰 충격을 받았어요.
Q. 하미 마을에서 어떤 경험을 하셨나요?
하미 위령비를 방문했어요. 참배를 한 후 차분히 위령비를 읽었죠. 위령비 앞면에 학살로 희생된 135명의 주민 이름이 나이순으로 써 있잖아요. 베트남은 이름으로 성별을 추측할 수 있어 대부분이 여성이었다는 것을 알았고, 노인부터 아기까지 빼곡하게 적힌 나이를 읽으며 참담함을 느꼈죠. 특히 아직 이름도 짓지 못해 그냥 ‘응우옌의 아기’라 표시할 수밖에 없었던, 그해 태어난 세 이름을 볼 때 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위령비 뒷면의 붉은 연꽃 그림을 볼 때에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연꽃은 어떤 꽃보다 기품 넘치고 우아한 꽃이잖아요, 베트남 국화이기도 하고요. 그렇게 아름다운 꽃이 커다랗고 핏빛처럼 빨갛게, 심지어 아이들이 그린 것 마냥 거칠어서 너무 당혹스러웠죠. 그때 시내 씨가 연꽃 그림은 그날의 참상을 기록한 비문을 덮으며 만든 것이라고 알려주었어요. 부끄러움, 분노, 절망감 같은 감정을 느꼈죠. 베트남전쟁이 그때까지도 끝나지 않았다는 게…. 내가 그동안 알고 있던 것들이 너무 피상적인 데 불과했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날 퐁니 위령비와 야유나무 주변도 둘러보았고요.
숙소로 돌아왔는데 그날 보고 들은 것들이 너무 충격적이라, 원래 쓰던 글을 이어 쓸 수가 없었어요. 너무 강렬한 인상을 받아서,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우선 기록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했죠. 사실 처음에는 퐁니 마을 야유나무를 화자로 하는 이야기를 썼어요. 몇 줄 써내려가다 자료 검색 겸 인터넷을 찾아보니까 고경태 기자님이 이미 비슷한 글을 쓰셨더라고요. “아, 이건 안 되겠다” 급정거하고, 다시 하미 마을의 기억으로 돌아갔죠. 그 자리에서 <하미 연꽃>을 쓰기 시작했고, 베트남에 머무는 동안 완성했어요.
Q. 2018년과 2019년에도 연달아 하미 위령비를 방문하셨다고요. 3년 동안 하미 마을을 찾았는데, 매번 다른 경험이었나요?
2018년 호이안을 여행할 때, 베트남 가족이 운영하는 조용하고 소박한 게스트하우스에서 머물렀어요. 제법 친해진 주인아저씨가 자신이 경험한 베트남전쟁과 한국군 이야기를 들려주었죠. 어릴 적에 한국군이 태권도를 가르쳐줬대요. 제가 “하미 마을에 가보고 싶다”고 하니 흔쾌히 직접 데려다주겠다고 나서더라고요. 둘이 차를 타고 한참을 헤매다 겨우 하미 마을에 도착했어요. 심지어 처음엔 미군 학살이 있었던 위령비로 잘못 찾아 갔어요. “아, 여기가 아닌데!” 급히 깨닫고 다시 물어물어 하미로 향했죠. 가까운 동네이고, 베트남 사람이니 당연히 알 거라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던 거예요. 어렵게 하미 위령비 입구까지 갔는데, 하필 진입로가 공사 중이라 안에도 들어가지 못했어요. 아쉬운 대로 동네와 주변을 둘러보며 지형과 분위기를 파악하고 돌아오는 데에 그쳤죠.
2019년에는 권현우(짜노 활동가)씨의 연결로 베트남 중부에 거주하는 재단 회원 한 분을 소개 받아, 전부터 참석하고 싶었던 하미 학살 51주기 위령제에 참여했어요. 뒤에서 조용히 보기만 하려 했는데, 마을 분들이 배려를 참 많이 해주셨어요. 어떠한 반감도 없이 저희가 들고 간 꽃을 가장 좋은 자리에 놓게 하고, 향도 가장 먼저 피울 수 있게 해주셨죠. 뜻밖의 환대에 참 죄송하고 무거운 마음이 들었어요.
Q. 위령비를 방문한 경험뿐 아니라 베트남에서 살아 본 경험도 소설을 구상하는 데 영향을 많이 주었을 것 같아요.
굉장히 좋은 시간이었죠. 저는 시끄럽고 번잡한 곳을 싫어하고, 맛집이나 관광지에도 관심이 없어서 보통 시내에서 떨어진 조용한 곳에 숙소를 잡아요. 식사도 근처 로컬 식당에서 해결하고요. 자주 가던 동네 식당에 젊은 종업원이 한 명 있었어요. 그때 베트남에서 한창 k-pop이나 한국 드라마가 유행이었나 봐요. 그 청년도 한국 문화의 열렬한 팬이었고, 제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너무 반가워하며 어떻게든 한국말 한 마디를 해보려 노력했죠. 너무 친절해서 저도 자꾸 보고 싶었고, 그 가게를 자주 찾았어요. 친하게 지내면서도 마음 한 켠은 계속 무거웠죠. 지금은 이렇게 서로 즐겁고 다정하게 만나 금방 친구가 되는데, 그 이면에 안타까운 역사가 있구나. 그걸 나도 잘 모르고 이들도 잘 모르겠지…. 복잡한 마음이 들었죠.
베트남을 처음 갔던 해에, 마침 친구들과 베트남을 여행 중이던 대학생 아들과 잠깐 만난 적이 있어요. 제가 시장에서 물건을 사면서 흥정하거나 더 싼 거를 찾으려 했더니, 아들이 “엄마, 여기서는 깎지 말고 돈을 팍팍 써야지! 그거라도 해야지 않겠어?”하더라고요(하하). 기본적인 미안함이 있나 봐요. “그래, 네 말이 맞다” 바로 수긍했죠
우리 아들이 맹호부대에서 군복무를 했거든요. 베트남전쟁 때 맹호부대가 파병을 했던 사실도 알고 있고, 그 애 역시 한국군 위령비에 가보고 싶다고 했는데 아쉽게 그때엔 기회가 안 되었네요.
Q. 그렇게 한국에 돌아와서, 베트남의 자응언 소설가를 만나셨군요. 두 작가님의 인연이 깊다고 들었어요.
“2017 아시아문학창작워크숍”에서 자응언 선생을 처음 만났어요. 아시아와 국내 작가들이 만나는 자리였는데, 자응언 선생은 “화해, 할 수 있지 않을까”를 주제로 발표를 했고, 저는 베트남에서의 경험을 나누는 짧은 대담을 했죠. 행사를 계기로 많이 친해졌고 다음해 1월에 베트남을 다시 찾았어요. “이번에는 베트남을 제대로 알아보자!” 싶어서 북부 하노이부터 중부 다낭, 후에를 거쳐 남부 호찌민시까지 한 달 정도 머물렀어요. 자응언 선생 댁이 호찌민시에 있는데 그때 저를 집에 초대해주셨죠.
자응언 선생은 따듯하고 친절하게 저를 맞아주었어요. 통역도 없이 서툰 영어와 번역기에 의지해 대화를 나누었지만 가족, 전쟁, 평화, 예술에 대해 많은 교감을 나눴고요. 아, 그때 박항서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 축구팀의 첫 경기가 있었어요. 자응언 선생과 시내로 나가 오토바이 탄 응원 행렬 속에 섞여 커피를 마신 기억도 있네요(하하). 소설 『자그마한 가족』이 한국어로 번역 중이라고 들었어요. 한국에 소개된 베트남 작가가 많지 않잖아요, 특히 여성 작가는 더 드물고요. 저도 아주 큰 기대를 하고 있는 작품이라, 어서 출간되어 한국 독자들에게 알려지면 좋겠어요.
Q. 베트남에서 완성한 <하미 연꽃>과 달리, <퐁니>는 한국에 돌아와 쓴 작품이지요?
2017년 처음 베트남을 방문했을 때도 퐁니 마을에 가보긴 했지만, 퐁니·퐁녓 학살 생존자 응우옌티탄을 처음 만난 건 2019년이에요. 직접 집에 방문하여 증언을 들을 기회가 있었죠. “1968년 2월 12일에…”하고 이야기를 시작할 때까지도 ‘내가 8살일 무렵인가?’하고 말았거든요. 이야기를 들으며 기억을 조각조각 맞춰보니 어느 순간 나와 동갑이라는 퍼즐이 딱 맞춰지더라고요. 눈물이 울컥 쏟아져 엉엉 울었어요. “난 당신과 나이가 같다”고 하니, “그럼 우리 친구네!”하곤 저를 껴안아주었죠.
대화 후에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야유나무 밑 퐁니 위령비로 향했어요. 어깨에 있던 제 손이 아래로 미끄러지며 무심코 탄의 움푹 파인 옆구리에 닿았어요. 그 순간 너무 놀라 숨이 멎었죠. 그 서늘함을 잊을 수 있을까요. 손을 그대로 둔 채 상처를 껴안고 계속 길을 따라 함께 걸었어요. 그러면서 제가 8살 때에 무얼 했는지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죠.
어릴 적 기억 속 한 장면이 생각났어요. 이웃 동네 이장 아들이 ‘월남’에 갔다 왔는데, 신기한 물건을 잔뜩 가져왔다는 거예요. 지금 생각하면 우리 동네도 아니고 옆 동네인데 그게 뭐라고 따라 갔나 모르겠지만, 친구들이 전부 간다고 하니 저도 쫓아갔죠. 그 집 마당에 동네 사람들이 한가득 모여 있었고, 이장 부부가 물건을 하나하나 꺼내 보여주자 사람들이 박수까지 쳐가며 구경했어요. 깡통 음식이나 망고 사탕 같은 것들이었죠. 아마 탄이 학살을 경험한 나이가 딱 그 무렵이었을 것 같아요. 기억들이 나란히 병치되는 순간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솟구쳤죠. 내가 철없이 트랜지스터 라디오나 탐내고 있을 때, 내 친구는 이런 끔찍한 일을 겪고 있었구나…. 베트남이 각별하게 저에게 다가와 박힌 순간이었어요.
Q. 베트남전쟁을 소재로 글을 쓸 수밖에 없는 운명은 아니었을까 생각이 드네요(하하). 그래도 직접 증언을 듣고 현장을 가본 경험이 있어도, 그 이야기를 내 작품으로, 특히 소설로 쓰는 건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 같아요.
베트남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가 너무 강렬했어요. 영화나 소설 속 베트남전쟁이 아닌, 날 것 그대로의 역사를 현지에서 맞닥뜨린 충격이 컸죠. 역사 문제에 관심도 많고 베트남의 입장에 설 준비도 되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모르는 게 너무 많구나’ 반성이 들었죠. 동시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처럼 피상적으로 알고 있거나 그마저도 모르고 있을까 싶었고요.
<2017 아시아문학창작워크숍>에서 자응언 선생과 대담할 때, “베트남과의 교류에 앞서 사과가 필요하고, 작가로서 할 수 있는 사과의 방법은 소설을 쓰는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그래서 <하미 연꽃>에 이어 <퐁니>까지 작품을 쓰게 되었죠. 사실을 알리고 싶다는 마음에 ‘재현’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었어요. 새로운 전망을 제시한다거나 뾰족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런 이야기가 있다는 것은 남겨야 한다. 그것에 집중하다 보니 다소 세밀하고 정교한, 때로는 불편하기도 하고 읽기 힘들 수도 있는 재현을 하게 되었네요.
Q. 증언을 듣고 글로 쓰는 과정이 심적으로 힘들지 않았나요? 활동가들도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는 과정에서 깊은 고민과 갈등을 자주 경험하거든요.
글을 쓸 때는 무척 힘들었죠. 묘사가 굉장히 적나라하잖아요. 지금까지 이렇게 사실 묘사와 재현에 가까운 방식으로 소설을 쓴 적이 없어요. 진저리나게 끔찍하고 쓰기 싫은 장면들도 물론 있었죠. 그럴 때에는 더 오랜 시간이 필요했어요. 감정적으로 거리감이 좀 생기면 그제야 글을 썼고요. 어렵게 소설을 완성하긴 했는데, 끝내고 나니까 더 읽기 싫더라고요. 사실 다른 작품은 종종 다시 읽곤 하는데, <하미 연꽃>과 <퐁니>는 손이 잘 안가요. 증언과 몇 가지 자료에 기반을 두고 상상력을 더해 소설을 썼어요. 그러니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내용이 ‘사실’이라 할 순 없어요. 그렇게 읽는 사람들을 경계하기도 하고요. 그럼에도 진실을 알리려 애쓰긴 했어요.
Q. 베트남 피해자인 ‘나’의 시점으로 내용이 전개되는 <퐁니>와는 달리, <하미 연꽃>에는 세 명의 화자(베트남 피해자, 한국 참전군인과 그의 딸)가 등장합니다. 특히 참전군인을 하나의 집단으로 묶어 표현하지 않고, 다양한 상황과 입장으로 표현한 점이 인상 깊었어요. 복합적이고 다층적이면서 동시에 지극히 개별적이기도 한 참전군인의 정체성을 담으려 많이 고민하신 것 같다고 느꼈고요.
베트남전쟁 이후 평생 트라우마를 겪는 참전군인 이야기는 제 전작인 <유령의 시간>에도 등장해요. 참전군인의 삶에 대해 이전부터 고민이 있었어요. 저는 전쟁 속에서는 어느 한쪽의 피해자만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전쟁이라는 것 자체가 누구든 원치 않는 피해나 가해의 상황에 놓이도록 만들잖아요. 그런 인식 위에서 참전군인의 입장을 헤아려 본 거예요. 군대라는 상명하복의 체계에서, 더군다나 일반 사병들은 명령을 거부하기 쉽지 않았겠죠. 가끔 언론에 비춰지는 태극기 시위 속 참전 군인을 볼 때는 “안 그러셨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기도 해요. 하지만 동시에 그게 상처의 다른 표현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죠. 기본적으로 전쟁은 그 시간을 산 모두에게 트라우마를 남길 수밖에 없으니까요.
‘서하사’라는 가공의 인물을 만들어 등장시키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어요. 현재적 의미를 고민하다보니 그의 딸도 등장했죠. 아, 그런데 최근에 2쇄를 찍고 보니 큰 오류가 있더라고요? 서하사의 딸이 ‘아들’이라고 표기된 곳이 한 군데 있어요. 이런 결정적인 오타를 뒤늦게 발견하다니…. 새로 책을 찍기 전에 잡지 못한 게 너무 안타까워요.
Q. 그럼 오류 정정을 위해 반드시 3쇄를 찍어야하니, 제가 책을 더 열심히 홍보해야겠네요(하하). 소설 한 편을 쓰기까지 많은 비하인드가 있었군요.
하나 더 있는데, 사실 <하미 연꽃>의 마지막 문장 “메이, 할 이야기가 있어”는 최종 교정을 볼 때 덧붙인 것이에요. 2017년에 처음 소설을 썼고, 단행본이 나온 게 올해니까 4년 동안 끝말을 쓰지 못했네요. 초고 쓸 때는 미안하다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어요. 간단히 쓸 수 있는 말이 아니었고 어쩌면 그 말이 그분들을 더 모욕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했고요. 이번에 마지막 문장을 쓰고 보니, 이 말을 하기 위해 나에게 4년이라는 고민의 시간이 필요했나보다 싶었죠. 이제는 적어도 제 안에서 그 말이라도 할 용기가 생긴 것 아닐까요. <퐁니> 에필로그도 이번에 추가로 쓴 것이에요. 그전에는 도무지 쓸 수가 없던 것들이 이제는 가능해졌죠. 조금 더 솔직하게 내 마음을 드러낼 준비를 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네 눈물을 믿지 마』는 베트남전쟁 이야기를 담은 두 편의 단편을 포함해, 총 여덟 개의 이야기를 엮은 책이에요. 전쟁이나 폭력, 재난 속에서 겪는 상처, 상실, 트라우마를 담고 있죠. 누군가 “아름답고 행복한 이야기도 많은데 굳이 왜 힘들고 어두운 이야기를 읽어야 하느냐”고 묻더군요. 저는 그 질문에 소설의 자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인간의 여러 모습을 보여주고, 특히 <퐁니>처럼 상처가 몸으로 만져질 만큼 깊게 배인 인물들의 서사를 통해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싶었어요. 더할 수 없이 연약하고 잔인하지만, 동시에 한없이 강하고 아름다운 존재 역시 인간이니까요. 물음표가 계속 되는 데에서 새로운 걸음이 시작될 지도 모르죠.
Q. 어느덧 인터뷰 마지막 질문이네요. 언젠가부터 재단 인터뷰 마지막엔 항상 이 질문을 넣고 있어요. 굉장히 쉽게 말하는 분도 있고, 엄청난 고민 끝에 답하는 분도 있어요. 작가님에게 ‘평화’란 무엇인가요?
저도 질문을 처음 들었을 때 ‘이렇게 거창한 걸 어떻게 대답한단 말인가’하고 속으로 생각했는데(하하). 평화란 ‘생존’이다, 이렇게 답하고 싶네요. 생존의 기본이 평화이고, 생존의 최전선에 평화가 있는 것 아닐까요. 평화가 깨지는 순간 생존이 위태로워진다는 것은 수많은 전쟁을 통해 충분히 경험했잖아요. 우리 집안사도 한국 현대사와 얽혀 참 복잡했고, 팔레스타인 출신인 제 작가 친구는 지금도 가족의 안녕을 걱정하며 매일 전쟁을 치르고 있죠. 평화라는 건 막연하고 추상적인, 머나먼 존재가 아니라 우리 삶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것 아닐까요.
* * * * *
네 시간의 대화 끝에 인터뷰를 마무리 지었다. “저 사실…” 뱉을까, 말까 한참을 망설인 말을 용기 내어 꺼냈다. 다섯 시간 전 지하철역으로 나설 때부터 고민한 것이었다. “저 사실 국어국문학과 졸업했어요. 만나본 적 없는 회원과 인터뷰 한 것도 처음이고요. 제가 낯을 많이 가리는 편이라 걱정이었고, 그럼에도 제가 인터뷰 하겠다고 나섰는데 그 이유는…(주절주절)”
(혼자 과하게) 걱정했던 인터뷰가 무사히 끝났다는 안도감과 김이정 작가가 주는 편안함 때문이었을까? 부끄러워 밝히지 않으려 했던 것 치고는 난데없는 고백을 두서없이 우다다 많이도 쏟아냈다. “오히려 제가 임자를 만난 거였네요”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김이정 작가가 웃으며 답했다. (사실 전공에서 가장 자신이 없으면서도 제일 좋아했던 수업이 ‘현대 소설’이었으며,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지만- 왠지 전공 교수님과의 상담 같은 분위기일까, 벼락치기식 인터뷰 준비가 티 날까, 조마조마 하는 마음에 밤잠을 조금 설쳤다는 말까진 그 와중에도 너무 부끄러워 밝히지 못했다.)
전쟁 없는 세계와 안전하고 따듯한 일상을 꿈꾼다는 점에서, 아픔에 깊이 공감하고 사람을 모으고 문제를 알리고 방법을 고민한다는 점에서, 소설가라는 직업과 활동가라는 직업은 닮은 점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의 방식으로 함께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기대를 해본다. 내가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밀어주기, 오류가 정정된 3쇄 『네 눈물을 믿지 마』 출간을 위해 열심히 인터뷰 기록을 남겨본다.
인터뷰·글 ㅣ 짜미 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