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원자 인터뷰[인터뷰] 가만히 있으면 안된다 / 이동석

[인터뷰] 가만히 있으면 안된다
- 후원회원 이동석 - 


늘 아쉽다. 평화기행 진행자로서 한 가지 큰 아쉬움은 일정 진행에 많은 여력을 쏟아 참가자들과의 소통에 나도 모르게 소홀해진다는 점이다. 지난 2월에 있었던 하미학살 55주기 위령제 평화기행 때도 그랬다. 정말 다양한 참가자들이 일정을 함께하여 그들 한명 한명의 이야기가 궁금했는데, 먼저 말을 걸거나 이야기를 잘 청해 듣지 못해 지금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평화기행 참가자였던 이동석 선생님에 대한 아쉬움을 이번 후원회원 인터뷰로 대신한다. 재일조선인인 이동석 선생님은 베트남전쟁 문제와 관련하여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국인들과 분명 다른 시선과 감성을 갖고 있었다. 그는 또한 한국에서 유학 중이던 1975년에 ‘재일교포 간첩단 사건’으로 구속되어 고문 피해를 겪었고 이후 5년간 수감생활을 한 가슴 아픈 역사를 가진 분이기도 하다. 

재일조선인으로서 그리고 국가폭력의 피해자로서 이번 베트남전쟁 문제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어떠한 마음으로 베트남 평화기행을 함께 했는지 등을 그에게 물었다. 평화기행을 함께 하면서도 느낀 것이지만 일흔이 넘은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밝고 순수한 에너지를 인터뷰 내내 이동석 선생님에게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고통과 아픔의 경험을 성찰한 언어를 바탕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동석 선생님의 삶에서 평화의 아름다운 반짝임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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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노] 일본에서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냈을 때 그리고 한국에서 유학을 하면서 각각 베트남전쟁과 관련하여 어떠한 기억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동석] 베트남전쟁과 관련된 일본에서의 기억은 중학생 때가 떠오르네요. 당시 일본은 ‘베헤이렌(베트남에 평화를! 시민연합)’ 등의 베트남전 반전 평화운동이 있었어요. 제가 중학생 때였는데 선생님이 자전거 앞에 당당히 반전구호를 붙여놓고 출퇴근을 하는 모습을 봤던 게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대학교 때 반전운동에 참여했던 젊은 교사들이 사회인이 된 이후에도 그렇게 자기 목소리를 냈던 거죠. 그때 일본에서는 미국 가수의 반전 가요 등이 유행해서 저도 노래를 즐겨 들었고 일본 가수들도 사회비판적인 메시지를 담은 노래들을 많이 불렀던 시기이기도 했어요. 

1971년에 한국에 왔는데 도시에 군인들이 많아서 놀랐어요. 제가 살던 오사카는 군인들을 볼 수 없었고 일본의 어디든 군사 기지가 아니면 군인들을 보기 힘들었거든요. 1971년에 대통령 선거가 있어서 박정희, 김대중 두 사람이 대선 후보로 경쟁을 했었는데 군인들이 기관총을 교문 앞에 세워놓고 있어서 그야말로 공포감을 느꼈어요. 대학에 입학한 후 학교에서 베트남전쟁과 한국군 참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어요. 당시 교련수업이 있어서 일주일에 4시간 수업을 들었는데 저는 재일교포라 면제였어요. 교련 수업을 받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며 한국 사회의 병영문화를 느꼈고, 만약 내가 입대를 한다면 베트남에 가게 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고요. 저는 병역 면제자여서 한국의 친구들에게 미안한 감정도 있었고, 그러한 전쟁터에 휘몰릴 수 있는 군대에 가고 싶지 않았던 마음도 있었고요. 

저는 1975년에 구속되어 대전교도소에 5년 있었는데 베트남전쟁 관련 재미있는 일화가 있었어요. 그곳에 영사기가 있어서 영화를 보여주곤 했는데 1979년 즈음이었고 당시 대전 시내에서 상영되었던 <디어헌터>라는 영화를 교도소에서 보여줬어요. 그 영화가 대히트한 작품이어서 수감자인 우리도 보게 된 것 같은데 수년간 교도소에 살면서 반공영화를 지겹게 봐왔던 장기수들이 반전 메시지가 담긴 디어헌터를 보면서 이걸 왜 우리에게 보여주는 거냐며 어리둥절해 했었죠(하하).


한베평화재단 사무실에서 진행된 인터뷰. 진지함과 유쾌함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이동석 선생님의 화법이 참으로 매력적이었다 © 한베평화재단




[짜노] 베트남전쟁은 1975년 4월 30일에 종전되었는데, 이동석 선생님은 같은 해에 간첩단 사건으로 구속되어 5년간 수감생활을 했습니다. 베트남전 종전과 함께 한국 정부의 반공주의 정책이 강화된 흐름 속에서 이동석 선생님 개인도 피해를 겪은 것 같아요. 

[동석] 당시에는 베트남전 종전과 제가 겪은 사건의 연관성을 몰랐어요. 베트남전쟁이 끝나자 학교에서도 학도호국단이라던가 수업 중의 군사 훈련 등이 강화되었어요. 패망한 남베트남 다음이 대한민국이 될 수 있다, 남한도 자칫 잘못하면 북한에 넘어갈 수 있다 등의 위기의식, 긴장감을 정부가 많이 강화했어요. 그런 상황 속에서 한국 정부가 간첩을 만들어내려고 했고 일본에서 온 재일교포 유학생들을 표적으로 삼았죠. 당시 일본은 독재정권인 남한보다 사회주의를 지향한 북한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터라 일본에서 온 사람들을 반공분자로, 죄인으로 만들기 쉬운 형국도 있었고요. 1980년에 석방된 이후 1979년에 있었던 박정희 시해 사건 등과 더불어 내가 어째서 이러한 고통을 겪은 것인가 생각하다가, 베트남전 종전이 제 삶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도 깨닫게 되었죠. 

[짜노] 2023년 2월에 한베평화재단과 베트남 평화기행을 다녀왔습니다. 평화기행 참석을 고려할 때 고민이 있었다고 들었는데요. 

[동석] 평화기행 참가자 모집 공고를 보고 일단 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베트남전쟁에 대해 자세히는 몰랐지만 한국군 민간인학살이 있었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어요. 일본에 있을 때에도 보도를 통해 접할 수 있었죠. 보통 일본 우익들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룰 때 한국의 베트남전쟁 문제, 라이따이한 문제를 함께 다루기 때문에 알게 되거든요. 일단 저는 평화기행을 통해 당시 한국군 민간인학살 사건이 어떠한 문제였고 한국 사람들이 어떠한 평화운동을 했는지 알고 싶었어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내가 그러한 평화기행에 관광하는 듯한 기분으로 따라가도 될까, 내 마음가짐이 그 정도에 불과하다면 동행하는 한국 사람들과 베트남의 피해자들에게 미안한 일이다, 그런 고민을 잠깐 했었죠. 그러던 중 평소 친했던 <소박한자유인>의 김창섭 씨가 신청을 했다고 해서 저도 참가를 결정했고요. 평화기행 신청을 하고 일본에 돌아가 2개월간 머물며 베트남전쟁 관련 책을 찾았는데 구하기가 어려워 아쉬웠어요. 일본은 베트남전쟁에 직접 참전을 하지 않아 그런 것 같은데 베트남전쟁 문제가 유행이 지났는지 관련 책들 대부분이 도서관에만 있을 뿐 대중 서점에는 거의 없더라고요. 


퐁니·퐁녓 위령비 참배 후 마을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고 있는 이동석 © 김창섭(이코노미 21)




[짜노] 보통의 평화기행 참가자들과 달리 이동석 선생님이 평화기행에서 보고 느낀 점은 좀 달랐을 것 같아요. 

[동석] 좀 거칠게 말하면 일반 참가자들은 한국인으로서 미안한 마음이 있고, 한국 정부가 베트남 피해자에게 사죄를 해야한다는 입장이잖아요? 그런데 제 입장을 생각해보면 이렇습니다. 나는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이 아닌 일본에 있었는데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저지른 잘못에 과연 책임이 있는가? 한국 정부가 재일교포인 내 인권을 지켜주지도 않았고 한국 정부에게 오히려 나는 피해자인데 내가 베트남 사람들에게 사과할 이유가 있는가? 우선 그런 의구심이 처음에는 들었어요. 그런데 제가 지금은 간첩단 사건 관련 사면복권이 되었고 선거권, 피선거권 모두 갖고 있어서 대통령 선거에도 출마할 수 있거든요. 저에게 그런 권리가 있다면 그에 다른 의무도 당연히 있다고 생각해요. 때문에 한국군이 남긴 베트남전쟁 문제에 대해 저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저는 피해자로서의 경험이 있어요. 일본에서 재일교포로 차별받은 경험이 있고, 한국에서는 간첩단 사건으로 큰 고통을 받았고요. 저는 저의 경험을 사람들에게 들려주며 입장을 바꾸면 나도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자주 합니다. 제가 일본에서 3년간 장애인 인권 관련 활동을 했었는데 비장애인으로서 나도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늘 했어요. 며칠 전 장애인들의 시위가 있어서 함께 했었는데 경찰이 필요 이상의 병력으로 장애인들을 막 둘러싸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저들과 함께 해야겠다 싶어 장애인들을 위한 구호를 함께 외쳤습니다. 저는 소수자에 대한 폭력이 벌어질 수 있는 상황에 항의하지 않는다면, 나도 그러한 폭력에 가담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현재 남아 있는 베트남전쟁 문제를 그대로 방치한다면 그 문제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과 다름 없다고 생각해요. 반대를 해야한다, 소수자의 입장에서 세상을 생각하자, 가만히 있으면 안된다, 라고 생각합니다. 

[짜노] 얼마 전 베트남 평화기행 일정을 함께 하며 개인적으로 사진 촬영 작업도 했습니다. 다녀온 후 사진 보정 작업도 하셨다고 들었는데요, 사진 작업과 관련하여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었다면요?

[동석] 퐁니 마을이 떠오르네요. 우리가 퐁니 위령비에 갔는데 그날 주변 경치가 너무 화창하고 온화해서 참 좋았잖아요. 베트남을 떠오르면 보통 정글을 많이 상상하는데 위령비 주변 들판에는 벼가 자라고 있었고 너무도 평화로운 분위기의 농촌 마을이었죠. 그런데 이러한 마을에서 학살 피해가 있었다고 생각하니 믿어지지가 않더군요. 그리고 저는 피해자 분들의 표정에 많이 주목했어요. 학살 피해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으신 분들이 지금도 전쟁 피해의 고통을 말씀하시잖아요. 저는 피해생존자들이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과거의 고통을 이겨내고 초월한 모습 등이 보였던 것 같아요. 저도 고문 피해를 겪었지만 사람이 고통을 어느 정도 이겨내야만 살아갈 수 있거든요. 평화기행 첫날 증언을 하며 한국 정부에 당당히 진실을 요구했던 하미학살 피해자 응우옌티탄 님에게 그러한 표정이 보였고, 딸과 아이를 학살 피해로 잃고 자신도 한쪽 발목을 잃은 쯔엉티투 할머니가 먼 곳을 바라보던 순간의 얼굴에서도 그러한 점을 느낄 수 있었어요. 

[짜노] 선생님께서 판결문 전문을 읽고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이번 승소 판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동석] 선고일이었던 2월 7일은 제가 일본에 머물다 한국으로 돌아온 날이었어요. 판결 결과가 너무 궁금해서 공항에서 나오자마자 계속 휴대폰으로 기사를 검색했죠. 집에 도착한 이후에 송소 소식이 뜨더군요. 저는 간첩단 사건 재심 관련 판결문을 받아본 경험이 있어서 이번 판결문 내용에 대한 관심이 많았어요. 승소 소식이 뉴스에 떴는데 배상금이 3천만 100원이라고 해서 처음에는 액수가 너무 적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무리 베트남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액수가 적잖아요. 원고가 판결문을 받을 수 있는 최소 액수가 3천만 원이기 때문에 그러한 금액을 청구한 것을 나중에 이해하게 되었고요.

그런데 제 간첩단 사건 관련해서도 그랬지만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 배상을 돈으로 계산을 할 수가 없거든요. 1억? 10억? 사실 더 중요한 문제는 돈의 액수보다는 판결 내용이에요. 저는 응우옌티탄 님도 판결의 내용을 받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서 그 정도 금액을 청구한 것이라고 이해했어요. 그런데 만약 응우옌티탄 님이 최종적으로 승소하고 이후 다른 사람이 같은 차원에서 손해배상을 청구한다면 그 사람이 요구하는 만큼의 정당한 금액을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자택에서 평화기행단과 만나고 있는 하미학살 피해생존자 쯔엉티투 © 김창섭(이코노미 21)


[짜노] 간첩단 사건 고문 피해자로서 베트남의 피해자 분들과 마주하며 과거 본인의 상처가 되살아나지는 않았나요. 

[동석] 일단 저 같은 경우 처음에는 내가 그때 왜 그 정도의 고문을 견디지 못했을까 자책하는 면이 있었어요. 그런데 시간이 좀 더 흘러 생각해보니 내가 그 고문을 참아냈다면 분명 더 심한 고문을 당했을 거거든요. 그래서 고문을 견디지 못한 내 나약함을 자책하는 것이 부조리하다는 걸 깨달았죠. 

그날 짜노가 하미학살 피해자 쯔엉티투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려줬잖아요. 할머니는 본인의 육체적 피해보다 그날 학살 현장에서 자신이 어린 두 딸과 아들을 지켜내지 못한 점을 평생 자책하며 살아오셨다고요. 저는 자신을 지키지 못했다고, 할머니는 아이를 지키지 못했다고 자책하는 것이 참 비슷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짜노] 2015년 진실화해위원회를 통해 무죄를 인정받았고, 숙원이었던 한국외대 프랑스어학과를 2021년에 졸업했습니다. 이후 계속 한국에 머물고 계신데요, 가족들이 모두 일본에 있는데도 계속 한국에 머무는 이유가 있다면요? 

[동석] 저는 제 피해에 대해서 한국 정부로부터 배상금을 받았어요. 정부는 피해자에게 배상금을 주고 나면 끝인데 저는 그렇지 않거든요. 제가 무죄를 인정받고 배상금을 받은 후에는 저에게 남은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했어요. 그래서 구속 수감으로 졸업하지 못한 학교에 재입학을 했죠. 일종의 자기 회복의 차원에서 한국에 머물렀고 프랑스에도 6개월 정도 유학을 다녀왔습니다. 

그렇게 계속 한국에 머물며 지내고 코로나19 시기에는 어쩔 수 없이 계속 한국에 있었어요. 그러면서 장기수나 고문당한 사람들의 모임, 사회 운동과 인권·평화 운동을 하는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면서 저도 그들과 연대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어요. 다른 사람의 인권을 지켜줘야 내 인권도 보장받을 수 있다, 장애인에게 편한 세상이 비장애인에게도 편한 세상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일본은 젊은 층의 사회운동이 거의 쇠퇴해서 한국에서 모임이 열리면 제가 항상 나이가 가장 많은데 저는 그것도 좋더라고요(하하). 한국도 요즘은 사회운동층이 고령화되어 간다는 이야기가 조금씩 나오고 있는 것 같은데 일본과 비교해본다면 한국이 아직은 긍정적인 것 같습니다. 

[짜노] 한베평화재단 후원회원이고 최근 활동가들과 가깝게 지내고 있습니다. 한베평화재단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동석] 저는 한국과 일본을 비교하는 경우가 많아요. 한베평화재단의 활동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나 강제 징용 문제 관련 일본의 시민운동과 비교를 하게 됩니다. 한베평화재단이 베트남 평화기행을 하고 베트남 피해 마을들의 위령제에 조화를 보내는 일들을 보면서 재단이 베트남전쟁 관련 다양한 영역에서 열심히 활동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최근의 승소 판결을 밑받침으로 한국 사회에 한베평화재단이 더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습니다.


글 | 권현우 활동가(사무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