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읽기[평화의 mat] 사과를 주고받는다는 것 / 장윤석

2026-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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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를 주고받는다는 것


장윤석(연구활동가)



몇 달 전 후쿠시마로 가는 길, 도쿄 우에노역 근처의 한 카페에서 있었던 일이다. 


핵사고 현장에서 불교생태학자 조아나 메이시(Joanna Macy)의 재연결 작업(reconnect workshop, つながり ワークショップ)을 해왔다는 여러 분들을 만났다. 이들은 같이 빵을 나눈다는 뜻의 캄파니아(Campania)라는 공동체를 만들어 3S(Soul, Soil, Society) 철학에 기대 이런저런 활동을 한다고 했다.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하던 중이었다. 갑자기 한 분이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눈물을 흘렸다. 많아 봐야 마흔 초반의 젊은 아버지 울이었다. 울은 일본이 한국에게 가한 역사에 대해 사과했고, 통역을 한 유는 이 말을 ‘용서받을 수 없다(unforgiveness)’라는 표현으로 번역했다. “우리는 그렇기에 여기서 만나고 다시 걷기 시작해야 한다”고 덧붙이며. 


예기치 못한 사과를 받으며 너무나 당황했고, 너무나 마음이 아팠고, 너무나 괜찮다는 말을 건네고 싶었다. 처음에는 내가 사과를 받는 게 너무나 이상하게 여겨졌다. 적어도 여기 내 눈앞에 있는 당신은 나에게 어떤 잘못도 저지른 적 없지 않나. 당신이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말을 건넸지만, 그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베트남 친구들을 만나면 나도 약간 그 마음이 된다. 나의 한 선생님은 베트남에서 열리는 학회에 참석했다가 민간인 학살과 삼성의 행패에 대한 질문을 듣고는 고개 숙여 사과를 전하고 왔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한동안은 선생님이 왜 사과를 했을까 의문이었다. 당신이 한 잘못이 아닌데. 당신은 오히려 삼성과 소송을 하고도 있으면서.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내게도 그 마음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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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다큐 <물의 요정이 바다를 떠날 때> 의 한 장면 

북부 하띤성에 건립된 붕앙1 석탄화력발전소를 중심으로 베트남의 석탄화력발전소 문제를 다루고 있다. 



2020년 한국 정부와 기업들은 탈석탄을 선언했지만 베트남 하띤성에 붕앙-2 석탄발전소까지만 마지막으로 짓겠다는 발표를 이었다. 기후도 기후지만, 문제는 이 지역이 이미 포르모사 독성 화학물질 사고로 환경재난에 처했고, 주민들의 강제이주 문제도 심각했다는 것이다. 어느 인터뷰에서 본 “당신들 나라(한국)라면 돈벌이가 된다고 ‘죽음의 땅’에 석탄발전소를 짓겠느냐?”는 끼러이 마을 주민의 말 한마디가 마음에 와서 콕 박혔다. 


당시 한 여론조사는 대부분의 시민이 국내에 짓는 석탄발전소를 반대하는데, 그만큼의 시민들이 ‘국익’이 된다면 해외석탄발전소 수출은 괜찮다는 모순적인 응답결과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동료들과 그 마지막 발전소 하나만 막아보자며 민·형사 재판을 포함해 이런저런 연구와 활동을 이어왔다. 그 사이에서 간혹 붕앙 근처에 살거나, 생태환경 쪽 일을 하는 베트남 분들을 만날 때면……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는 마음이 되곤 했다. 


몇 년간 여차저차 활동을 하면서 우리는 유해한 구조에서 무해한 개인일 수 없다는 생각이 계속 일었다. 처음에는 한국의 국가와 기업을 세게 비판하면서 거리를 두려고 했지만 들여다보면 볼수록 내가 비판하는 대상과 나는 어찌나 가깝던지. 이를테면 나의 고모부는 한국전력에 다녔고, 나의 외삼촌은 해직됐지만 두산그룹에 다녔었다. 내가 명절마다 받아 나의 피와 살이 되었던 용돈봉투는 누군가의 피와 살에 알게 모르게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그 무서운 연결됨을 느낄 때 우리에게 이 사과의 마음이 찾아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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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석탄화력발전소 건설 참여 비판을 위해 청년기후긴급행동 활동가들이 2021년 두산중공업(현 두산에너빌리티) 사옥 앞 조형물에 녹색 수성 스프레이를 뿌리고 시위를 진행했다. ⓒ청년기후긴급행동



그렇다 하더라도 이 사과의 문제는 너무나 애매하고 어렵다. 다소 극단적으로 “일본인은 한국인에게 사과해야 하고, 한국인은 베트남인에게 사과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한다면, 분명한 국경을 상정하고 역사를 가볍게 환원하는 일종의 연좌죄(緣坐制)가 되어버린다. 하지만 우리는 ― 그 누구도 선택해서 태어난 적 없음에도 ― 우리의 역사와 조상, 국가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것이 속죄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지만(속죄는 그 당사자에서 그쳐야 한다.) 그 누구도 사과하고 사과받지 못한 비극의 실타래가 엄연히 존재하는 한, 쉽사리 그 얽힘을 무관한 것으로 만들어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이와 같은 만남의 장에서 우리가 이 얽힘을 알아차리고 ‘있는 그대로’ 살펴보았으면 한다. 이 마주함을 통해 찾아오는 연결됨이 지난 역사에서 으레 보아온 적대로서의 연결됨이 아닌, 다음 세대의 해원(解冤)으로서의 연결됨일 때 평화라는 이야기책의 다음 장을 써 내려갈 수 있지 않을까.




[평화의 mat]

'mắt'은 베트남어로 '눈(目)'을 뜻하는 단어로 '평화의 mat'은 평화의 눈으로 '맛 본' 세상 이야기를 나누는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