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 겁쟁이가 됩시다
가라연(활동가)
평화, 라는 말이 어려운 때다. 언제는 그렇지 않은 때가 있었냐만은. 그래도 무엇이라도 말하고 싶다가도 들려오는 소식에 언어가 굳어 구렁텅이에 빠진 것처럼 말문이 막힌다. 사실 이 글의 시작도 이스라엘에 억류되어있다 돌아온 팔레스타인인의 시신에 장기가 적출되어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렇지만 적다가 그만두었다. 내가 알지도 못하는, 참혹하게 살해당하고 모욕당한 사람들의 시신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말해야 한다.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모른다면, 모든 이야기에서 돌아와 내 이야기로 시작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여성의 날 특집으로 원고를 청탁받았을 때 사실 얼떨떨했다. 일단 나는 여성이 아니고, 페미니즘을 잘 안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물론 보고 들은 것이 있으니 평균 이상은 알 것이다. 트랜스여성은 여성이고, 변희수 하사는 사명감 있는 여성 군인이었다는 것 정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이루는 가장 큰 근간 중 하나는 페미니즘이다.

서울시립미술관의 계엄 비판 비평글 검열을 규탄하는 1인 피켓팅에 참여한 가라연 님
2015년 말, 나는 한겨레에서 연재되던 〈D.P 개의 날〉을 읽으며 원가정에서 겪은 폭력을 비로소 이해하기 시작했다. 흔히 가정폭력이라고 하면 술에 취해 술병을 휘두르는 부모, 혹은 다짜고짜 손과 발로 맞는 장면을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내 부모는 술을 한 모금도 하지 않았고, 내가 겪은 대부분의 폭력은 손과 발이 아니라 골프채나 등산용 지팡이, 걸레 밀대 봉 같은 도구를 통해 이루어졌다. 때로는 가까운 초등학교 운동장을 100바퀴 뛰거나, 숨이 차 쓰러지고 싶을 때까지 운동을 해야 하기도 했다.
쇼크가 올 정도의 폭력이었지만, 언제나 내부에서 통용되는 ‘정당한’ 이유가 있었기에 나는 그것을 가정폭력이 아닌 ‘정당한 체벌’로 받아들이며 자랐다. 그러나 〈D.P. 개의 날〉 속에서 나와 닮은 장면들을 마주하며, 그것을 ‘폭력’이라고 불러도 되는 일이었음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다음은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따라왔다. 왜 내가 겪은 폭력과 군대 안의 폭력은 그토록 닮아 있을까. 군대에는 우리 아빠도 없는데.
위계와 복종을 중심으로 작동하는 군사주의는 내부에서는 병사를, 외부에서는 민간인을 손쉽게 대상화한다. 상명하복의 규율을 따르지 않는 이는 곧바로 폭력의 표적이 되고, 그렇게 길들여진 군인들은 자신이 학습한 폭력을 전쟁터에서 하나의 규범으로 행사하게 된다. 그 규율은 집단 밖의 사람들을 적으로 규정하고, 그들을 거리낌 없이 살해할 수 있도록 만든다. 대상만 달라질 뿐, 타자를 비인간화하고 폭력을 정당화하는 방식은 서로 닮아 있다. 가부장제 역시 마찬가지다. 복종하지 않는 자를 폭력으로 길들이고, 그 폭력에 언제나 정당한 이름을 붙인다 — 사랑이나 훈육 따위의.

가라연 님이 참여한 한베평화재단 평화워크숍 <피해자 애도하기>
그 질문의 끝에서 내가 발견한 것은 가부장제와 군사주의의 공통점이었다. 그렇게 나는 페미니즘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페미니즘은 내게 실천과 두려움을 가르쳤다.
페미니즘의 언어는 내가 겪은 폭력을 비참할 정도로 낱낱이 톺아보게 했고, 그 어떤 순간도 정당화하지 못하게 했다. 나는 집을 나올 결심을 했고, 두 번의 시도 끝에 성공했다. 집을 나와서는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청소년들과 퀴어 친구들을 자주 떠올렸고, 손이 닿는 한 그들과 자주 만나며 밥을 사주려 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서 퀴어 페미니즘 독서 모임에서 만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사회에서 마주하는 억압과 폭력에 늘 지쳐있었음에도 내 고통에 언제나 돌봄으로 응답했다. 잠자리를 내어주었고, 밥을 해먹이고 사먹이고 이사를 돕고 때로는 복지제도를 함께 찾아봐주었다. 오랫동안 고립된 환경에 놓여 있던 나는 처음으로 혼자가 아니었다.
그때 나는 두려움을 배웠다. 내가 그토록 쉽게 무너질 수 있는 존재였다는 것. 타인의 돌봄이 나를 끝끝내 살렸다는 것. 그리고 그 돌봄의 힘이 내 안에도 있을지 모른다는 것. 내가 누군가와 연결될 때 그를 살릴 수도 있다는 사실이, 기쁨보다 먼저 두려움으로 왔다.
그 두려움이 나를 시민사회로 이끌었다. 퀴어 예술단체에서 피해자들에게 요청받아 공론화를 진행했고, 국가폭력에 맞서는 재난피해자들 곁에 섰다. 홈리스로 살았던 기억은 아랫마을 야학에서 영어수업을 잠시나마 할 수 있게 했고, 지금은 주거권을 고민하는 자리로 나를 데려왔다.
이 두려움을 잃으면 어떻게 될까. 무감각해진다. 팔레스타인인의 시신에서 장기가 불법으로 적출되었다는 소식을 들어도 화면을 넘기게 된다. 내 옆의 군인이 맞고 있어도 군대 내의 일이니 넘어가게 된다. 겁이 없는 사람은 잔인해지는 게 아니라, 먼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그 구조의 일부가 된다.
두려움은 연결에서 온다.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내가 무언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뜻이고, 동시에 그 가능성을 쓰지 못할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기 때문에 겁이 나는 것이다.
언제나 사람들은 죽고 살해당하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겁쟁이가 되어야 한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코스피 지수가 떨어졌다며 유튜브 방송을 하는 이 시대의 덕목은 황금만능주의와 타인을 극도로 배제하는 자기보전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가, 가보지 못할 땅에서 살해당할 때, 우리의 영혼은 분명히 크게 상한다.
그러니 “내가 먼저 살아야 남을 도울 수 있다”는 말이 무기력과 혼자 살아남기의 변명이 되지 않게 하자. 재충전은 다시 연결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나도 잘 못한다. 소식을 듣다가 창을 닫을 때가 있고,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이 너무 무거워 잠시 외면하고 싶을 때가 있다. 이 글은 다 해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다. 아직 겁쟁이가 되는 법을 배우는 중인 사람이, 같이 겁쟁이가 되자고 말을 거는 것이다.
같이 겁을 먹자. 서로가 연결되어 있음을 두려워하고,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자. 이미 겁쟁이라면, 조금 더 겁쟁이가 되자.
[평화의 mat]
'mắt'은 베트남어로 '눈(目)'을 뜻하는 단어로 '평화의 mat'은 평화의 눈으로 '맛 본' 세상 이야기를 나누는 칼럼입니다.
우리 모두 겁쟁이가 됩시다
가라연(활동가)
평화, 라는 말이 어려운 때다. 언제는 그렇지 않은 때가 있었냐만은. 그래도 무엇이라도 말하고 싶다가도 들려오는 소식에 언어가 굳어 구렁텅이에 빠진 것처럼 말문이 막힌다. 사실 이 글의 시작도 이스라엘에 억류되어있다 돌아온 팔레스타인인의 시신에 장기가 적출되어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렇지만 적다가 그만두었다. 내가 알지도 못하는, 참혹하게 살해당하고 모욕당한 사람들의 시신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말해야 한다.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모른다면, 모든 이야기에서 돌아와 내 이야기로 시작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여성의 날 특집으로 원고를 청탁받았을 때 사실 얼떨떨했다. 일단 나는 여성이 아니고, 페미니즘을 잘 안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물론 보고 들은 것이 있으니 평균 이상은 알 것이다. 트랜스여성은 여성이고, 변희수 하사는 사명감 있는 여성 군인이었다는 것 정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이루는 가장 큰 근간 중 하나는 페미니즘이다.
서울시립미술관의 계엄 비판 비평글 검열을 규탄하는 1인 피켓팅에 참여한 가라연 님
2015년 말, 나는 한겨레에서 연재되던 〈D.P 개의 날〉을 읽으며 원가정에서 겪은 폭력을 비로소 이해하기 시작했다. 흔히 가정폭력이라고 하면 술에 취해 술병을 휘두르는 부모, 혹은 다짜고짜 손과 발로 맞는 장면을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내 부모는 술을 한 모금도 하지 않았고, 내가 겪은 대부분의 폭력은 손과 발이 아니라 골프채나 등산용 지팡이, 걸레 밀대 봉 같은 도구를 통해 이루어졌다. 때로는 가까운 초등학교 운동장을 100바퀴 뛰거나, 숨이 차 쓰러지고 싶을 때까지 운동을 해야 하기도 했다.
쇼크가 올 정도의 폭력이었지만, 언제나 내부에서 통용되는 ‘정당한’ 이유가 있었기에 나는 그것을 가정폭력이 아닌 ‘정당한 체벌’로 받아들이며 자랐다. 그러나 〈D.P. 개의 날〉 속에서 나와 닮은 장면들을 마주하며, 그것을 ‘폭력’이라고 불러도 되는 일이었음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다음은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따라왔다. 왜 내가 겪은 폭력과 군대 안의 폭력은 그토록 닮아 있을까. 군대에는 우리 아빠도 없는데.
위계와 복종을 중심으로 작동하는 군사주의는 내부에서는 병사를, 외부에서는 민간인을 손쉽게 대상화한다. 상명하복의 규율을 따르지 않는 이는 곧바로 폭력의 표적이 되고, 그렇게 길들여진 군인들은 자신이 학습한 폭력을 전쟁터에서 하나의 규범으로 행사하게 된다. 그 규율은 집단 밖의 사람들을 적으로 규정하고, 그들을 거리낌 없이 살해할 수 있도록 만든다. 대상만 달라질 뿐, 타자를 비인간화하고 폭력을 정당화하는 방식은 서로 닮아 있다. 가부장제 역시 마찬가지다. 복종하지 않는 자를 폭력으로 길들이고, 그 폭력에 언제나 정당한 이름을 붙인다 — 사랑이나 훈육 따위의.
가라연 님이 참여한 한베평화재단 평화워크숍 <피해자 애도하기>
그 질문의 끝에서 내가 발견한 것은 가부장제와 군사주의의 공통점이었다. 그렇게 나는 페미니즘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페미니즘은 내게 실천과 두려움을 가르쳤다.
페미니즘의 언어는 내가 겪은 폭력을 비참할 정도로 낱낱이 톺아보게 했고, 그 어떤 순간도 정당화하지 못하게 했다. 나는 집을 나올 결심을 했고, 두 번의 시도 끝에 성공했다. 집을 나와서는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청소년들과 퀴어 친구들을 자주 떠올렸고, 손이 닿는 한 그들과 자주 만나며 밥을 사주려 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서 퀴어 페미니즘 독서 모임에서 만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사회에서 마주하는 억압과 폭력에 늘 지쳐있었음에도 내 고통에 언제나 돌봄으로 응답했다. 잠자리를 내어주었고, 밥을 해먹이고 사먹이고 이사를 돕고 때로는 복지제도를 함께 찾아봐주었다. 오랫동안 고립된 환경에 놓여 있던 나는 처음으로 혼자가 아니었다.
그때 나는 두려움을 배웠다. 내가 그토록 쉽게 무너질 수 있는 존재였다는 것. 타인의 돌봄이 나를 끝끝내 살렸다는 것. 그리고 그 돌봄의 힘이 내 안에도 있을지 모른다는 것. 내가 누군가와 연결될 때 그를 살릴 수도 있다는 사실이, 기쁨보다 먼저 두려움으로 왔다.
그 두려움이 나를 시민사회로 이끌었다. 퀴어 예술단체에서 피해자들에게 요청받아 공론화를 진행했고, 국가폭력에 맞서는 재난피해자들 곁에 섰다. 홈리스로 살았던 기억은 아랫마을 야학에서 영어수업을 잠시나마 할 수 있게 했고, 지금은 주거권을 고민하는 자리로 나를 데려왔다.
이 두려움을 잃으면 어떻게 될까. 무감각해진다. 팔레스타인인의 시신에서 장기가 불법으로 적출되었다는 소식을 들어도 화면을 넘기게 된다. 내 옆의 군인이 맞고 있어도 군대 내의 일이니 넘어가게 된다. 겁이 없는 사람은 잔인해지는 게 아니라, 먼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그 구조의 일부가 된다.
두려움은 연결에서 온다.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내가 무언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뜻이고, 동시에 그 가능성을 쓰지 못할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기 때문에 겁이 나는 것이다.
언제나 사람들은 죽고 살해당하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겁쟁이가 되어야 한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코스피 지수가 떨어졌다며 유튜브 방송을 하는 이 시대의 덕목은 황금만능주의와 타인을 극도로 배제하는 자기보전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가, 가보지 못할 땅에서 살해당할 때, 우리의 영혼은 분명히 크게 상한다.
그러니 “내가 먼저 살아야 남을 도울 수 있다”는 말이 무기력과 혼자 살아남기의 변명이 되지 않게 하자. 재충전은 다시 연결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나도 잘 못한다. 소식을 듣다가 창을 닫을 때가 있고,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이 너무 무거워 잠시 외면하고 싶을 때가 있다. 이 글은 다 해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다. 아직 겁쟁이가 되는 법을 배우는 중인 사람이, 같이 겁쟁이가 되자고 말을 거는 것이다.
같이 겁을 먹자. 서로가 연결되어 있음을 두려워하고,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자. 이미 겁쟁이라면, 조금 더 겁쟁이가 되자.
[평화의 mat]
'mắt'은 베트남어로 '눈(目)'을 뜻하는 단어로 '평화의 mat'은 평화의 눈으로 '맛 본' 세상 이야기를 나누는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