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한베평화재단 평화 아카데미 기획강좌 연꽃을 기억하는 법>
빈 의자에 앉을, 모호하지 않은 존재
2강 <베트남전쟁의 재현 대상들: 한국군, 베트콩, 난민> 후기
이소정
한베평화재단에서 열린 <연꽃을 기억하는 법>의 2번째 강연 “베트남전쟁의 재현 대상들: 한국군, 베트콩, 난민”의 강연이 시작되고, PPT 사용으로 인해 강연자 김주현 님이 중앙에서 빗겨 난 노트북 앞에 착석하셨다. 덩그러니 중앙의 의자가 비어 있는 상태로 강연이 진행됐다. 의도된 상황은 아니었다.
마주한 ‘빈 의자’는 강연을 들으러 온 이들에게 꽤 많은 물음을 던지고 있었다. 1강 “불편한 진실을 연극으로 자유롭게 말하다”의 연극 ‘별들의 전쟁’의 무대에는 빈자리가 하나 있다. 피고인 대한민국의 자리. 연극은 가해자의 좌석에 앉을 대상을 끊임없이 호명한다. 강연의 중심인 책 「전쟁 자본주의의 시간」에도 ‘별들의 전쟁’에 대한 분석이 자세하게 서술돼 있다. 5장 ‘평화를 위하여’에서 저자는 연극의 토대가 되는 ‘시민평화법정’을 “시민사회 진영이 참전군인단체에게 건네는 공개적인 초대장(344)”이라고 칭한다. 이 부분에 관한 논의를 읽다 보면 독자는 ‘빈 의자’에 대한민국을 앉히게 된다.
증인과 배심원들이 국가에 대한 책임 추궁에 소극적이 되는 것은 우리 역사에서 국가가 이해관계의 조정자라기보다 시민적 권리와 자유를 제한하는 통치 권력이었던 탓이다. (「전쟁 자본주의의 시간」, 353쪽)
‘통치 권력’ 태도의 군부 정권이 끝난 1991년, 참전 군인단체는 더 많은 혜택과 복지를 추구하며 “피해자의 자리를 독점”했다. 그러나 강의가 진행되는 동안 내가 마주한 ‘빈 의자’는 가해자만의 지정석은 아니었다. 그곳에 앉은 주체를 누구로 상정하고 이야기를 듣느냐에 따라 다양한 시각 형성이 가능하다. 강의에 참석한 다른 사람들은 역시 다각의 시점을 품고 돌아갔을 것이다. 강연의 제목처럼 “재현의 대상” 그 누구도 빈 의자에 자리할 수 있다. 공적 기억에서 의도적으로 누락된 존재들이 강연 시간 동안 그 자리에 앉아 함께했다.
특파원들이 베트콩의 정체를 놓고 난상토론을 벌이다가 공통적으로 동의한 지성 없는 농민이 아니었다. 그는 모호하지 않았다. (...) 한국의 지적 담론에서 사회주의(자)가 금지된 사상(가)으로 위축되면서도 지켜왔던 속성-이지와 냉철-이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반지성적이고 감정적 복수심에 찬 폭도와 빨갱이로 변질되었다면, 베트남전쟁기 사살된 베트콩들은 수습되지도 못하고 방치된 시체로 물화되어 사회주의를 비체화했다. (...) 이후 한국 문학사에서 사회주의자가 다시 인간이 되기까지 이들은 공동체의 기억 속에 혼령, 시신으로 존재했다. 베트콩 표상이 한국 문학사의 사회주의(자) 표상에 직접 개입했다는 증거는 없으나 적어도 공산주의를 하찮게 만든 효과는 있었다. 베트콩이 하찮아질수록 황색 거인은 대단해졌다. (「전쟁 자본주의의 시간」, 290-292쪽)
의자에 앉을 인물은 김주현 님이 강연 중 설명한 반공 문학에서 존재해 왔던 어리숙하고 불쌍한 소년 인민군과 악역의 중공군도, 하찮고 지성 없는 농민 베트콩도 아니다. 이들은 파월의 명분을 위해 베트남전쟁의 ‘내전’의 성격을 지우고 ‘냉전’임을 강조하기 위해 형성된 존재들이다. 형으로서 베트남 문제에 개입할 수밖에 없다는 파병의 당위성을 가져다준 ‘아시아·아프리카 민족적 민주주의’ 유행 속에 만들어진 형상이다.
2023 한베평화재단 베트남전쟁 시민평화기록전 <기억 그 이후 당신은>에 전시되었던 ‘서 하사의 자리’
의자에 앉을 대상은 결코 ‘모호하지 않은 존재’들이다. ‘빈 의자’에 자리할 존재는 김주현 님이 언급한 “생환했으나 귀환할 수 없었던, 이전의 존재로 돌아갈 수 없는 파월 군인”이다. 황석영 소설에서 재현된 「이웃 사람」이다. 한편으로 그는 ‘질의응답 시간에 질문자에게서 언급된 진통제로 동질성을 느끼는 사람’이다. 강연자와 질문자 사이에서 파병에서 「돌아온 사람」과 매춘여성이 같은 진통제를 처방받아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가는 동안 빈 의자는 이야기 속에 재현된 존재의 것이 됐다.
또한 빈 의자는 ‘특집 다큐멘터리가 방영될 때만 재현되는 윈티민윅의 7식구와 같은 난민’과 ‘그 영상에서조차 등장하지 않는, 지워진 한국인 아버지’의 자리이기도 하다. 「전쟁 자본주의의 시간」에는 ‘보트피플’에 관한 내용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개인적으로 익숙한 베트남전쟁 소설 분석이 아닌 접해본 적 없는 영상자료에 관한 설명을 읽는 것이 생소하여 흥미로웠다. 4장의 중반부에 이르러 난민인 <윈티민윅의 7식구>(1982)를 취재한 다큐멘터리에 관한 분석이 진행된다.
윈티민윅이 베트남인 전남편이 죽자 ‘살아남기 위해’ 한국인 남편을 만나 일곱 남매의 어머니가 되었다는 것이다. 순결한 베트남 처녀와 한국인 남성의 결합에 익숙한 시청자들은 윈티민윅의 혼종적 모성이 낯설법하다. 그래서 인지 카메라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열심히 살아가는 한국인 남편의 세 딸을 담는다. (...) 한국인 아버지를 둔 아이들은 “깊은 인연에 매달려 우리 땅에 온 사람들”이므로 우리가 무언가를 해줘야 한다. (...) 아버지가 베트남인인 윈티민윅의 아이들은 아예 보이지 않고, 그녀 또한 한국인 아이들의 어머니로만 조명된다. (...) 이들은 월남 패망일에 맞춰 골방에서 잠시 판매대로 옮겨진 기념품처럼 ‘측은하게’ 조명되었다가 이내 사라졌다. (「전쟁 자본주의의 시간」, 324-327쪽)
영상 속에는 윈티민윅의 식구 ‘모두’가 등장하지 않는다. 강연의 마지막에 이르러 김주현 님은 “묻혀있는 이야기 어떻게 발굴해 들을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을 던졌을 때, 나는 이 영상에 관한 문구를 떠올렸다. 재현되지 않은 자리에 존재하는 망자(忘子)에 관한 논의의 필요성을 제기한 강연자의 물음에 답하기 위해 빈 의자에 앉을, 모호하지 않은 존재를 바라보며 스케치를 마친다.
사진 |한베평화재단
<2024 한베평화재단 평화 아카데미 기획강좌 연꽃을 기억하는 법>
빈 의자에 앉을, 모호하지 않은 존재
2강 <베트남전쟁의 재현 대상들: 한국군, 베트콩, 난민> 후기
이소정
한베평화재단에서 열린 <연꽃을 기억하는 법>의 2번째 강연 “베트남전쟁의 재현 대상들: 한국군, 베트콩, 난민”의 강연이 시작되고, PPT 사용으로 인해 강연자 김주현 님이 중앙에서 빗겨 난 노트북 앞에 착석하셨다. 덩그러니 중앙의 의자가 비어 있는 상태로 강연이 진행됐다. 의도된 상황은 아니었다.
마주한 ‘빈 의자’는 강연을 들으러 온 이들에게 꽤 많은 물음을 던지고 있었다. 1강 “불편한 진실을 연극으로 자유롭게 말하다”의 연극 ‘별들의 전쟁’의 무대에는 빈자리가 하나 있다. 피고인 대한민국의 자리. 연극은 가해자의 좌석에 앉을 대상을 끊임없이 호명한다. 강연의 중심인 책 「전쟁 자본주의의 시간」에도 ‘별들의 전쟁’에 대한 분석이 자세하게 서술돼 있다. 5장 ‘평화를 위하여’에서 저자는 연극의 토대가 되는 ‘시민평화법정’을 “시민사회 진영이 참전군인단체에게 건네는 공개적인 초대장(344)”이라고 칭한다. 이 부분에 관한 논의를 읽다 보면 독자는 ‘빈 의자’에 대한민국을 앉히게 된다.
증인과 배심원들이 국가에 대한 책임 추궁에 소극적이 되는 것은 우리 역사에서 국가가 이해관계의 조정자라기보다 시민적 권리와 자유를 제한하는 통치 권력이었던 탓이다. (「전쟁 자본주의의 시간」, 353쪽)
‘통치 권력’ 태도의 군부 정권이 끝난 1991년, 참전 군인단체는 더 많은 혜택과 복지를 추구하며 “피해자의 자리를 독점”했다. 그러나 강의가 진행되는 동안 내가 마주한 ‘빈 의자’는 가해자만의 지정석은 아니었다. 그곳에 앉은 주체를 누구로 상정하고 이야기를 듣느냐에 따라 다양한 시각 형성이 가능하다. 강의에 참석한 다른 사람들은 역시 다각의 시점을 품고 돌아갔을 것이다. 강연의 제목처럼 “재현의 대상” 그 누구도 빈 의자에 자리할 수 있다. 공적 기억에서 의도적으로 누락된 존재들이 강연 시간 동안 그 자리에 앉아 함께했다.
특파원들이 베트콩의 정체를 놓고 난상토론을 벌이다가 공통적으로 동의한 지성 없는 농민이 아니었다. 그는 모호하지 않았다. (...) 한국의 지적 담론에서 사회주의(자)가 금지된 사상(가)으로 위축되면서도 지켜왔던 속성-이지와 냉철-이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반지성적이고 감정적 복수심에 찬 폭도와 빨갱이로 변질되었다면, 베트남전쟁기 사살된 베트콩들은 수습되지도 못하고 방치된 시체로 물화되어 사회주의를 비체화했다. (...) 이후 한국 문학사에서 사회주의자가 다시 인간이 되기까지 이들은 공동체의 기억 속에 혼령, 시신으로 존재했다. 베트콩 표상이 한국 문학사의 사회주의(자) 표상에 직접 개입했다는 증거는 없으나 적어도 공산주의를 하찮게 만든 효과는 있었다. 베트콩이 하찮아질수록 황색 거인은 대단해졌다. (「전쟁 자본주의의 시간」, 290-292쪽)
의자에 앉을 인물은 김주현 님이 강연 중 설명한 반공 문학에서 존재해 왔던 어리숙하고 불쌍한 소년 인민군과 악역의 중공군도, 하찮고 지성 없는 농민 베트콩도 아니다. 이들은 파월의 명분을 위해 베트남전쟁의 ‘내전’의 성격을 지우고 ‘냉전’임을 강조하기 위해 형성된 존재들이다. 형으로서 베트남 문제에 개입할 수밖에 없다는 파병의 당위성을 가져다준 ‘아시아·아프리카 민족적 민주주의’ 유행 속에 만들어진 형상이다.
의자에 앉을 대상은 결코 ‘모호하지 않은 존재’들이다. ‘빈 의자’에 자리할 존재는 김주현 님이 언급한 “생환했으나 귀환할 수 없었던, 이전의 존재로 돌아갈 수 없는 파월 군인”이다. 황석영 소설에서 재현된 「이웃 사람」이다. 한편으로 그는 ‘질의응답 시간에 질문자에게서 언급된 진통제로 동질성을 느끼는 사람’이다. 강연자와 질문자 사이에서 파병에서 「돌아온 사람」과 매춘여성이 같은 진통제를 처방받아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가는 동안 빈 의자는 이야기 속에 재현된 존재의 것이 됐다.
또한 빈 의자는 ‘특집 다큐멘터리가 방영될 때만 재현되는 윈티민윅의 7식구와 같은 난민’과 ‘그 영상에서조차 등장하지 않는, 지워진 한국인 아버지’의 자리이기도 하다. 「전쟁 자본주의의 시간」에는 ‘보트피플’에 관한 내용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개인적으로 익숙한 베트남전쟁 소설 분석이 아닌 접해본 적 없는 영상자료에 관한 설명을 읽는 것이 생소하여 흥미로웠다. 4장의 중반부에 이르러 난민인 <윈티민윅의 7식구>(1982)를 취재한 다큐멘터리에 관한 분석이 진행된다.
윈티민윅이 베트남인 전남편이 죽자 ‘살아남기 위해’ 한국인 남편을 만나 일곱 남매의 어머니가 되었다는 것이다. 순결한 베트남 처녀와 한국인 남성의 결합에 익숙한 시청자들은 윈티민윅의 혼종적 모성이 낯설법하다. 그래서 인지 카메라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열심히 살아가는 한국인 남편의 세 딸을 담는다. (...) 한국인 아버지를 둔 아이들은 “깊은 인연에 매달려 우리 땅에 온 사람들”이므로 우리가 무언가를 해줘야 한다. (...) 아버지가 베트남인인 윈티민윅의 아이들은 아예 보이지 않고, 그녀 또한 한국인 아이들의 어머니로만 조명된다. (...) 이들은 월남 패망일에 맞춰 골방에서 잠시 판매대로 옮겨진 기념품처럼 ‘측은하게’ 조명되었다가 이내 사라졌다. (「전쟁 자본주의의 시간」, 324-327쪽)
영상 속에는 윈티민윅의 식구 ‘모두’가 등장하지 않는다. 강연의 마지막에 이르러 김주현 님은 “묻혀있는 이야기 어떻게 발굴해 들을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을 던졌을 때, 나는 이 영상에 관한 문구를 떠올렸다. 재현되지 않은 자리에 존재하는 망자(忘子)에 관한 논의의 필요성을 제기한 강연자의 물음에 답하기 위해 빈 의자에 앉을, 모호하지 않은 존재를 바라보며 스케치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