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P-17 | 월간말 | 2000.1월 | 오연호 | 베트남전쟁 참가 전투소대장들 35년 만에 입 열다 15) | 인터뷰 (참전군인) | 청룡부대 2연대의 정00 소대장, 최00 소대장의 증언에 대한 심층취재로, 부대원들의 강간과 민간인 사살에 대한 증언이 포함됨. |
투이호아(1-1) 16) | 청룡부대 2대대 5중대 3소대장 정00(59)의 증언. 1966년 1월 20일 정전협정을 위반하며 마을에 포를 쏘아 설을 준비하던 민간인을 살해한 사건, 소대원의 민간인 여성 강간 사건, 베트콩 ‘용의자’였던 두 청년 살해 사건에 대해 전함. “우리가 작전수행중에 본의 아니게 했던 잔혹한 행위에 대해선 백번사죄해도 모자라겠지만 의도적으로 그러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
청룡부대 2대대 6중대 1소대장 최00의 증언(59). 1965년 12월경 소대원의 민간인 여성 강간 사건(회고록과 교차확인), 1966년 5월 14일경 발생한 아군피해에 대한 보복으로 1소대와 3소대가 퓨헵 마을을 공격하여 20여명(회고록에는 53명)을 학살한 사건에 대해 전함. 5월 14일경의 사건으로 3소대장이 상부에 불려갔으나 특별한 조치는 없었다고 함. 최우식은 베트남전은 게릴라전으로 노근리 사건과는 양상이 달랐으므로 민간인 피해자들에게 사과하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말함. |
확인취재 | 투이호아 퓨헵 마을(1-1) | 퓨엔성의 바쿠앙 주석에 따르면(1999년 12월 16일 연락), 1966년 5월 14일 마을 주민 46명이 숨지고 3명이 살아남은 사건이 실재로 존재하였음. 생존자 3명 중 브이티찐과 브이티농이 현재 생존해 있으며 당시 사건을 기억함. 기사는 브이티농의 전화인터뷰 내용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전달하고 있음. |
KP-18 | 한겨레21 (292호) | 2000.01.20. | 고경태 | 월남에서 돌아간 새까만 김중사… | 인터뷰 | 칸호아성 닌호아현(5) 17) | 1968년 9월 23일 한국군 백마부대의 마을 수색으로 미군소속의 비엔즈응(당시 25)이 사망. 그 아내로서 강간미수 피해자인 쩜티 육(55)의 증언. |
KP-19 | 한겨레21 (294호) | 2000.02.03. | ? | “총성 소리만 듣고도 보복” | 공식자료, 인터뷰 (모두 인용) | 다이앤 존스와 마이클 존스는 1972년 5-8월 사이에 채록한 증언과 자료를 바탕으로 1975년에 <한국군이라 불린 동맹군1>이라는 보고서를 미국 필라델피아의 퀘이커 봉사단 자료에 실었는데, 해당 보고서를 소개하는 보도. 295호의 “사람들을 모아놓고 쏘았다” 보도에서 이어짐. |
쿠앙응아이 디엔니엔촌, 안토촌 18) (3-2) | 1966년 11월 9일, 청룡부대의 작전으로 인해 디엔니엔 촌에서 50-100명, 안토촌에서 5명이 사망. 디엔니엔 촌 주민인 안하이(당시 15)의 증언 |
KP-20 | 추적60분 (KBS2 TV) | 2000.02.10. | ? | 베트남 위령탑의 진실 | 인터뷰 (참전군인) | - 해당 영상을 찾을 수 없었음. - 뉴스위크의 2000년 4월 12일자 기사에 따르면, 참전군인의 인터뷰에 관한 다큐멘터리이며 정당한 이유 없는 살해행위에 대한 증언이 포함되었다고 함. |
KP-21 | 한겨레21 (295호) | 2000.02.17. | ? | 사람들을 모아놓고 쏘았다 | 공식자료, 인터뷰 (모두 인용) | 쿠앙응아이성 선틴현(3-2) 19) | 선록사 푹빈촌에서 온 바하이의 푹빈학살에 대한 증언. 1966년 11월 9일 아침 7시에 푹빈에 들어온 한국군은 11월 11일 학살을 벌였다고 함. |
쿠앙응아이성 빈선현 빈키사 20) 롱빈촌(3-1) | 쿠앙응아이성 병원에 있던 안사우(35)의 롱빈학살에 대한 증언. 1966년 12월 6일 새벽 4시쯤, 민리엔촌과 고롱초소의 한국군이 롱빈촌으로 내려와 30여명의 사람들을 폭탄구덩이에서 학살. |
쿠앙응아이성 빈선현 빈키사 락선촌(푹선)(3-1) | 안베이(30)의 증언. 1966년 12월 6일 오전 10시경, 쩌우레언덕의 초소에서 내려온 한국군들이 락선촌 커우마을의 주민을 모아서 학살함. |
쿠앙남성 디엔반현 탄퐁사 퐁니촌(4-1) | 1968년 2월 12일의 학살에 대한 <뉴욕 타임스>(1972년 2월 13일 보도)가 인용됨. |
쿠앙남성 유이쑤옌현 쑤옌쩌우사(4-2) | 쑤옌쩌우의 위령식에 대한 존스 부부의 목격담과 더불어 한 남성의 1969년 3월 15일 학살에 대한 증언. 존스 부부는 이런 사건이 한국군의 주둔기간동안 흔했으며, 쿠앙남성 책임자가 “한국군들이 너무 자주 사람들을 죽였”다고 말한 이야기를 전함. |
쑤옌쯩사, 찜선촌(4-2) | 쑤옌쯩의 마을사람들의 증언. 1968년 쑤옌쯩사의 홍방언덕 초소에 주둔하던 6중대 청룡부대원들이 총 300명의 주민을 죽였음. 더불어 찜선촌에서도 여러 학살사건이 발생했다는 증언. |
쑤옌푹사(4-2) | 사이공 정부 소속 ‘귀향마을’ 캠프 부소장의 증언(마을 사람들의 제지, 첨가, 교정이 곁들여짐). 1968년 후반, 노인과 임산부 등 몸이 불편해서 피신하지 못했던 51명의 주민에 대한 청룡부대의 학살. |
KP-22 | 한겨레21 (296호) | 2000.02.24. | ? | “누가 그들에게 돈을 지불했는가” | 공식기록 | 존스부부 보고서의 마지막 연재. 존스부부는 그들이 45건 이상의 사건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였으며, 100명 이상의 양민을 학살한 사건도 13건에 달한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한국군의 학살에서 발견되는 공통적인 특징을 정리함. |
KP-23 | 한겨레21 (296호) | 2000.02.24. | 황상철 | “아군의 머리에 총을 들이댄 이유” | 인터뷰 (참전군인) | 1966년 베트남전 당시 청룡부대 2대대6중대3소대장을 지냈던 유00(61)의 증언. “ 비전투원을 쏜 것은 잘못됐습니다. 내 총에 맞지 않기를 바랐지만 군인으로서 나는 또 쏘지 않으면 안 됐습니다. 간접적으로 내 부하들에 의해 희생된 사람도 있을 것이고….” |
푸옌성 투이호아현(1-1) | 1966년 5월 14일 토럼마을에서 청룡부대2대대6중대1소대, 그리고 10월경 한 마을에서 2소대와 3소대의 민간인들에 대한 보복공격 |
쿠앙응아이성 선틴현 일대(3-2) | 66년 11월 청룡부대의 용안작전 시 민간인 이용 및 살해 |
KP-24 | 한겨레21 (297호) | 2000.03.02. | ? | 양민학살 숫자는 9천명 이상 | 공식기록 | 한겨레의 9월 중부지역 취재결과와 전범조사위 자료, 존스부부의 보고서의 종합한 결과, “남부 베트남 5개성에서 80여건의 학살이 이뤄졌고 모두 9천여명이 희생됐다”는 구수정 통신원의 분석을 전함. |
KP-25 | 한겨레21 (301호) | 2000.03.30. | ? | “한국군에 대한 증오 남아있다” | 인터뷰 | 쿠앙응아이성 응이얀현(3) 21) | 학살 생존자 응엔 티 쿠앙(53)의 증언. ‘베트콩기가 걸려’ 있던 집을 한국군이 공격하여 그의 오빠 1명, 동생 2명이 사망함. |
KP-26 | 뉴스위크 | 2000.04.12. | 이병종 | 전쟁 영웅들의 ‘어두운 상처’ | 인터뷰 (참전군인) | 참고) 2월 KBS <추적60분>의 ‘베트남 위령탑의 진실’에 등장한 참전용사의 증언 네 마디가 인용됨. 마을 수색 중 발견된 7-8살 소녀를 중대장이 사살해버렸다는 내용. |
푸엔성 톨람 마을(1) 22) | 1966년 3월 14일, 수류탄 폭발로 대원 4명이 사망한 뒤 이어진 총격전(안00) 혹은 보복(최00)으로 민간인 46명이 살해되었던 일에 대한 이야기를 재구성, 당시 소대장 최00과 부상당한 그의 대리로 지휘를 맡았던 안00 병장의 증언을 전함 . |
KP-27 | 뉴스위크 | 2000.04.12. | Ron Moreau | “진실은 은폐할 수 없다” | 인터뷰 | 푸엔성 안린 군(1-2) 23) | - 1967년 4월 1일 안 린군 빈 수안 마을에서 발생한 학살의 생존자 구엔 반 토이(사진)와 그의 딸 디엠의 증언. 한국군 순찰대가 주민들을 한데 모아 죽였으며, 15구가 넘는 시신이 발견됨. - 거의 같은 시각, 인근 마을에서 총 23명가량의 주민이 방공호 안팎에 모아져 학살된 사건에 대해 생존자 구엔 훙 토아이(46)의 증언도 함께 전함. - 토이에 따르면, 당시 안린 군 주민들은 한국군의 강제이주 정책에 저항하고 있었다고 함. 필자는 빈딘, 쾅가이, 푸옌 3개 성에서 이주작전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조직적으로 살해되었다고 설명함(출처:‘베트남의 지방 공무원(지역 미상)’) - 1967년, 안 린에서 한국군 병사가 집을 불태우고 70세 노인을 방공호에서 살해한 일에 대한 아들 부이 탄 트람의 목격 증언을 전함. 그는 이후 베트콩이 되었음. |
푸엔성 호아 동(1-1) 24) | 1967년 5월 22일의 학살로 8명의 가족을 잃은 구엔 곡 차우(83)의 증언. 13명의 부녀자와 아이들을 우물에 넣고 수류탄으로 학살함. |
KP-28 | 한겨레21 (305호) | 2000.04.27. | 황상철 | 엄청난 일들, 34년만에 말한다 | 인터뷰 (참전군인) | 쿠앙응아이성 선틴현(안투엣, 빈록마을 서쪽, 서부지역 폭탄구덩이)(3-2) | 청룡여단 제2대대 7중대장이던 김00(31, 당시 대위)가 1966년 11월 9일부터 27일까지 실시된 ‘용안작전’ 중 그의 대대가 진행한 11월 9-14일 간의 작전에 대해 증언함. 주민을 ‘모아 놓고’ 죽였다고 인정한 첫 증언. 구체적으로 안투엣 마을, 빈록 마을의 서쪽 마을, 그리고 '서부지역 야산아래 논바닥'의 폭탄구덩이(66.11.14)에서의 학살을 설명함. |
KP-29 | 한겨레21 (305호) | 2000.04.27. | 황상철 | ‘바늘자국’을 기억하고 있었다 | 확인취재, 인터뷰 | 쿠앙응아이성 푹빈촌(구 안뚜엣(1))(3-2) | 김00의 증언에 기초한 대조취재. 푹빈촌에서 음력 1966년 9월 27일에 일어난 학살 사건에 대한 생존자 레 티 티엣(65), 보우 통(69), 응웬 탄 레(46), 응웬 리(75)의 증언, 그리고 푹빈촌 내 빈따이 마을 학살의 생존자 팜 티 퐁(54) 25) 의 증언 보도. 김00의 증언과 푹빈 촌의 학살 사실이 일치함을 확인. |
KP-30 | 한겨레21 (305호) | 2000.04.27. | ? | 중대장도 모르는 또다른 ‘싹쓸이’ | 인터뷰 | 쿠앙응아이성 하따이촌(3-2) | 음력 1966년 9월 26일, 푹빈촌 학살 하루 전에 발생한 학살. 그 유일한 생존자인 쩐 티 따이(44)의 증언과 위령비의 보도. 더불어 <파월한국군전사> 및 김00의 증언과의 교차확인. |
KP-31 | 한겨레21 (305호) | 2000.04.27. | 고경태, 황상철 | “그들의 증오심이 덜어진다면...” | 인터뷰 (참전군인) | | 베트남 대조취재를 전후하여 김00에 대한 추가 인터뷰를 보도. |
KP-32 | 한겨레21 (306호) | 2000.05.04. | 고경태,황상철 | 양민학살, 중앙정보부에서 조사했다. | 인터뷰 (참전군인) | 쿠앙남성 디엔반현 디엔안사 퐁니촌(4-1) | 1968년 2월 12일(음력 1월 14일), 퐁니촌에서 직접 작전을 진행하던 청룡여단 제1대대 1중대 1소대장 최00(58), 2소대장 이00(57), 3소대장 김00(59), 1중대장 김00의 증언을 통해 퐁니학살의 전모를 재구성함. 더하여 김00 중대장이 3개월 만에 조기귀국했다는 사실과, ‘안전마을을 싹쓸이’ 했다는 당시 소문에 대한 선배장교의 증언도 전함. |
KP-33 | 한겨레21 (306호) | 2000.05.04. | ? | 아이들 주검은 바구니에 담아 | 교차확인 | 디엔반현 퐁니촌(4-1) | 이00와 응웬한쭝, 현지 생존자와 피해자가족들의 증언, 그리고 <파월한국군전사> 등의 공식기록에 드러나는 퐁니촌 학살을 교차확인하는 보도. |
KP-34 | 한겨레21 (306호) | 2000.05.04. | 구수정 | 베트남의 진심은 무엇일까 | 인터뷰 | 푸옌성 뚜이호아현 호아히엡사 붕따우 마을(1-1) | 1966년 1월 2일(음력) 붕따우 학살 생존자 릉티퍼이(66)의 증언. |
KP-35 | 한겨레21 (307호) | 2000.05.11. | 고경태 | “학살을 자랑할 때 견딜 수 없었다” | 인터뷰 (참전군인) | | 1969년 6월부터 73년 3월까지 십자성부대에서 통역관으로 근무했던 이00(50)의 증언. 당시 베트남 사람들 사이에 학살 이야기가 많이 돌고 있었으며, 베트남 정부 및 칸호아성 공무원들이 항의를 하고 시민들의 데모가 있었던 사실에 대해 전함. |
KP-36 | 한겨레21 (308호) | 2000.05.18. | ? | “너무너무 고마워” | 인터뷰 | 하미(4-1) | 1968년 2월 25일 하미 학살 생존자 팜티 호아(72, 사진)의 이야기 및 인터뷰. |
KP-37 | 한겨레21 (309호) | 2000.05.25. | 고경태 | “와야 해, 그때 그 군인들이…” | 인터뷰 | 쿠앙응아이성 선틴현 틴선사 푹빈촌 | 김00의 증언(한겨레21 305호)을 기초로 푹빈촌에서 이루어진 확인취재를 보도. 1966년 11월 학살의 생존자 및 유가족인 쩐 라이(72), 레티티엣(65), 응웬 리(75), 하 티 호이(76), 팜티 퐁(51)의 증언 및 인터뷰와 사진 |
KP-38 | 한겨레21 (309호) | 2000.05.25. | ? | “사는 게 다 한이야 한…” | 인터뷰 | 쿠앙응아성 푹빈촌(3-2) | 학살 생존자 응웬 판(78, 사진)과 타 티 타오(73, 사진)의 증언 |
KP-39 | 한겨레21 (310호) | 2000.06.01.. | 황상철 | 한 킬러중대원의 참회 | 인터뷰 (참전군인) | 쿠앙응아이성 야산(4) | 청룡여단 제2대대5중대 전령으로 일한 정씨(55)의 증언. 1966년 10월 저녁 25여명의 사람들을 구덩이에서 학살한 사실, 그 이후에도 비슷한 학살이 벌어졌으며 그 구체적인 양상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전함. |
KP-40 | 한겨레21 (310호) | 2000.06.01. | 황상철 | “청룡여단서 양민학살 조작은폐” | 인터뷰 (참전군인) | | 청룡여대 헌병대 수사계장이던 성씨(63)의 증언. 학살 생존자의 청원으로 진상조사의 지시가 청룡여단에 하달되었으나, 여단에서 자체적으로 사건을 은폐했던 전말을 전함. 조사가 아니라 지침에 따른 조서가 작성되었음. |
KP-41 | 한겨레21 (310호) | 2000.06.01. | 고경태 | 남베트남 정부군 응웬 싸의 아픔 | 인터뷰 | 퐁니촌(4-1) | 1968년 2월 12일, 퐁니촌 근방 1km의 초소에 있었으며 학살로 가족을 잃은 남베트남 정부군 응웬 싸(64)의 증언. 26) |
KP-42 | 한겨레21 (310호) | 2000.06.01. | ? | 1대대 1중대 2소대 3분대원의 증언 | 인터뷰 | | 306호의 참전군인 인터뷰(“양민학살, 중앙정보부에서 조사했다”)에 대한 1중대2소대3분대 소속 김형팔의 동조증언. 3소대장의 증언에 의문 제기. |
KP-43 | 한겨레21 (312호) | 2000.06.15. | 고경태 | ‘땅굴의 악몽’을 지울 수 있을까 | 인터뷰 | 쿠앙남성 디엔반현 디엔터사 투이보촌(4-1) | 1967년 12월 21일(음력) 오전 10시, 청룡부대 1개 소대의 마을수색작전으로 발생한 학살의 생존자 응웬 티니(85), 쯩 티 마이(71), 쯩 티 죽(63), 쩐 티 념(86), 레 티용(72)의 증언과 사진. |
KP-44 | 동아일보 | 2000.07.14. | 이수형·신석호 | 베트남戰 ‘민간인사살’ 인정…대법, 31년만에 첫확인 | 공식기록 (판례) | 1968년 7월 15일 베트남전 당시, 민간인 5명을 사살하도록 지휘한 혐의로 한국군 화기소대장 김모씨(59)에게 무기징역이 선고된 대법원 판결(1969년 4월 29일)을 보도함. 판결문에 적힌 범죄 상황과 함께, 김씨가 2000년 봄 재심과 진상조사를 요구하고 있음을 전함. |
KP-45 | 동아일보 | 2000.07.14. | 이수형 | [베트남戰 '민간인사살' 판결]논란 증폭 예상 | 인터뷰 (참전군인) | 판결에 반박하는 김씨의 주장을 간략하게나마 전하는 보도. 김씨는 그들을 베트콩으로밖에 볼 수 없었던 이유와 더불어 베트남 주민의 항의를 수습하기 위해 조사 시 사실과 다른 진술을 했다고 주장했음. |
KP-46 | 동아일보 | 2000.07.14. | 신석호 | [베트남戰 '양민학살'판결]당시 주심 유재방씨 | 인터뷰 (재판관) | 1969년 4월 대법원 재판 당시 대법관을 맡았던 유 변호사와 방 변호사의 인터뷰내용을 간략하게 보도. 유 변호사는 재판과정에서 ‘외압’은 없었다고 답함. |
KP-47 | 동아일보 | 2000.07.16. | 이수형 | [베트남戰 '양민사살']인터뷰/채명신예비역중장 | 인터뷰 (참전군인) | 김00 사건의 관할관으로서 최종 서명했던 전 파월 한국군 총사령관 채명신의 인터뷰. 그는 비록 ‘수천명의 양민학살’과는 전혀 다르나 김 씨 이에도 민간인을 사살한 군인이 10여명 더 있었으며, 명령 위반에 대해 엄정하게 처벌하도록 지시했다고 답함. 김00의 경우, 그가 주장하는 것처럼 주민의 심각한 항위 시위는 없었으며, 조작 없는 철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고 증언함. |
KP-48 | 한겨레21 (321호) | 2000.08.09. | 고경태 | 죄의식이 평생을 따라다녔다 | 인터뷰 (참전군인) | 쿠앙응아이성(3) 짜빈동 마을 | 해병 중박격포 중대 2소대 김영만(55)의 증언. 해병11중대 짜빈동 진지에 배속되어 짜빈동 전투 이틀 전 베트콩 ‘용의자’를 죽인 경험에 대한 고백. 더하여 마을 입구에서 부비트랩이 폭발하자, 해당 마을에 무차별 포사격을 가한 일에 대한 증언. |
KP-49 | 한겨레21 (324호) | 2000.08.29. | 황상철 | [캠페인] 하필 경찰관 부인을 살려보내... | 인터뷰 (참전군인) | 푸옌성 뚜이안현(1-2) 27) | 맹호사단 1연대 2대대 8중대 1소대 1분대 소속으로 일했던 박씨(59, 1분대장), 이씨(54, 1분대원), 이씨(56, 1분대원)에 대한 취재보도. 1967년 4월 12일, ‘오작교 작전’ 진행 중 비무장의 젊은 남녀 12-13명을 사살한 일에 대한 분대장과 분대원들 간에 엇갈리는 증언을 전함. 생존자의 고발로 방첩대의 조사가 이루어졌고, 1분대원 8명은 사형선고(후에 감형)를 받아 11-16년의 징역살이를 했음. |
KP-50 | 오마이뉴스 | 2000.09.01. | 이병한 | 김정길 법무장관님, 31년 전 고등군법회의를 기억하십니까 | 공식기록(판례) | “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사살이 법원의 판결에 의해 인정된 유일한 사례”로서 <동아일보>에 보도되었던 1969년 4월 대법원의 판결문을 직접 취재보도함. 2월의 국방부고등군법회의에서 피고인 김종수의 죄를 추궁했던 김정길 검찰관이 현 법무부 장관임을 강조하며, 양민학살의 존재를 ‘대한민국은 인정하고 있는 셈’이라고 주장하고 정부의 적극적인 진상조사를 촉구함. |
KP-51 | 한겨레21 (334호) | 2000.11.15. | 고경태 | 잠자던 진실, 30년만에 깨어나다 28) | 공식기록 |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소에서 같은 해 비밀 해제된 공식문건의 최초공개. 이에 따르면, 1969년 12월부터 세 차례에 걸쳐 ‘한국군 해병에 의한 잔혹행위 의혹’이라는 이름의 보고서 세 건이 주월미군사령부에 제출되었음. 주월 한국군 자체조사와 더불어 미국-남베트남-한국군의 합동조사가 실시되었는데, 합동조사반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며 ‘보상’과 책임자들에 대한 ‘징계처분’을 권고하였음. 이후 1970년 1월 <뉴욕타임스>에 한국군의 학살 사실이 알려졌고, 미국 측은 ‘보고서가 절대로 언론에 알려지지 않도록 할 것’을 강조했다고 함. 이하는 1969년에 보고된 세 개의 사건. |
쿠앙남성 디엔반현 퐁니·퐁넛(4-1) | 1968년 2월 12일, 79명의 베트남 여성과 어린이들이 사망. (추가정리) |
쿠앙남성 지쑤옌현(4-2) 푹미 사 29) | 1969년 4월 15일, 민간인 4명 사망, 12명 부상, 7명 구타. |
쿠앙남성(4) 호앙쩌우 30) | 1968년 10월 22일, 민간인 22명 사망, 16명 부상. |
KP-52 | 한겨레21 (334호) | 2000.11.15. | 한홍구 | 미국의 관심은 ‘학살은폐 책임’ | 공식기록 | 한겨레가 입수한 자료와 더불어 필자가 입수한 새로운 자료들을 분석하여, 미국이 한국군의 학살여부에 대해 조사하게 된 전말(사이밍턴 청문회 및 밀라이사건 폭로)과 미국이 학살의 책임소재와 사실은폐에만 집중했다는 사실에 대해 보다 심도 있게 분석함. |
KP-53 | 한겨레21 (334호) | 2000.11.15. | 고경태 | “양민학살 현지조사, 불발로 끝나” | 공식기록 | 미군의 비밀보고서에 등장하는 한국군과 한국 정부관계자를 추적한 확인작업의 결과를 보도. 대부분의 요인들은 보고서에 기재된 사실을 부인하였으며, 합동조사반에 직접 참여했던 이00(70)만이 합동조사반의 구성 사실을 인정하였으나, 그마저도 조사결과에 대해서는 부인. |
KP-54 | 한겨레21 (334호) | 2000.11.15. | 김창석 | “한국군도 많이 당했다” | 인터뷰 (참전군인) | 주월한국군 초대사령관 채명신(74)의 인터뷰(11/11). 이 보도에서 그는 미군이 학살의혹과 관련해 여러 차례 조사요청을 했다는 것, ‘민간인 사살 범죄’가 분명 존재했다는 것을 인정하였으며, 동시에 조직적이고 의도적인 ‘양민학살’과는 달랐다고 구분함. |
KP-55 | 한겨레21 (334호) | 2000.11.15. | 김창석 | 편견인가, 꿰뚫어 본 것인가 | 공식기록 | 퐁니, 디엔반현(4-1) | 1968년 2월 12일부터 1969년 4월 15일까지 다낭에 파견됐던 미 정치고문 제임스 맥의 장문 보고서에 대한 보도.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쿠앙남성에 주둔했던 한국군 해병 제2여단에 대한 평가 속에 민간인에 대한 잔혹행위가 빈번하게 등장하며, 1968년 2월 12일의 퐁니 학살, 디엔반현 학살이 구체적으로 언급됨. 학살 외에도 무원칙한 피난민 처리, 암시장 운영 등 각종 부정적 행태들이 존재했음을 전함. |
KP-56 | 한겨레21 (334호) | 2000.11.15. | ? | “광분된 행위는 변명 여지 없어” | 공식기록 | 푹미(4-2) 31) | 1969년 4월 15일 푹미사건에 대하여 한-미-월 합동조사반이 5월 10일에 올린 극비보고서 중에서 ‘의견’과 ‘권고사항’의 전문을 전하는 보도. “피할 수도 있었던 비극을 초래했다”, “한국 해병 여단은 푹미마을 민간인들에게 발생한 사망, 부상, 상해, 재산피해에 대한 보상금을 ... 지급할 것” |
KP-57 | 한겨레21 (334호) | 2000.11.15. | 고경태 | 끝없이 벗겨지는 ‘제2의 밀라이’ | 공식기록 및 인터뷰 | 퐁니·퐁넛(4-1) | 지금까지의 공식자료 및 인터뷰 보도를 종합하여 퐁니·퐁넛 학살의 전말을 밝히고 채명신의 주장을 반박함. 더하여 학살 당시 마을에 진입하여 사진기록을 남겼던 미군 본 상병의 설명(출처:미군보고서)도 함께 전함. |
KP-58 | 한겨레21 (339호) | 2000.12.20. | ? | ‘700명 학살’논란, 형식적 조사 | 인터뷰 (인용), 공식기록 | 빈꾸앙, 빈치에우, 빈호아, 빈다오, 빈장 등 5개 마을(4-3) |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응웬 티 빈은 1970년 1월 22일 제51차 파리 평화협상회담에서 “1969년 11월 11일과 12일 이틀간 700명의 민간인이 학살”되었다고 증언했고, 이어서 2월에 실시된 미군의 조사에 따르면 실제로 문제의 날짜와 장소에서 ‘승룡작전’이 진행되었으나 민간인 학살의 증거는 없음. 그러나 해당 보도는 이 조사가 형식적인 것에 그쳤다며 의문을 제기함. |
KP-59 | 한겨레21 (356호) | 2001.04.24. | 고경태 | “그날의 주검을 어찌 잊으랴” | 인터뷰 | 퐁니, 퐁넛 마을(4-1) | 유일하게 한국군 학살 사진이 남아있는 것이 퐁니, 퐁넛 학살. 사진 속 희생자들에 대한 마을 주민, 생존자의 증언을 취록하여 보도한 자료. 11장 사진으로부터 거의 모든 인물들의 신상명세가 확인되었다고 함. |
언급되는 희생자 | 찐 쩌(13, 사진), 응웬 티 쫑(11, 사진), 응웬 득 퉁(6, 사진), 판 티 응우(32, 사진), 도안 쩨 민(5), 응웬 딕 상(15), 응웬 티 탄(21, 사진), 32) 레 티 탄(70)의 시아버지, 레 딘 묵의 어머니 호아 타 지엔(사진) |
증언한 생존자 | 쩐 티득(74), 응웬 티 탄(41, 사진), 응웬 티 호아(46, 사진), 쩐 티 투언(42, 사진), 레 딘 묵(당시 8살, 사진), 그 외 ‘주민들’ |
KP-60 | 오마이뉴스 | 2004.06.17. | 강연배 | 베트남에 한국군 민간인 학살 추모비 세운다 | 인터뷰 (인용) | 쿠앙남성 디엔반현 퐁니·퐁넛(4-1) | ‘나와우리’ 뉴스레터 2004년 6일자의 인터뷰를 인용하여, 학살 생존자 응웬수의 증언의 일부를 그대로 전함. |
KP-61 | 오마이뉴스 | 2007.04.07. | 김효성 | 1966년 베트남 고자이 마을의 비극 | 공식기록 | 빈딩성 떠이선현 떠이빈사 빈안(구 안빈) 고자이(2-1) | 빈딩성 통합박물관에 보관된 ‘빈안 지역 민간인 참살 보고서’의 내용에 대한 보도. 특히 현, 성 인민위원회의 인증을 거친 정부기록으로서 고자이 학살(1966년 2월 26일)의 정보를 상세히 담고 있으며, 공식적으로 빈딩성 내에서 총 8차례의 민간인 학살로 총 1581명이 희생되었음을 전함. |
KP-62 | 오마이뉴스 | 2007.05.22. | 김효성 | 총 쏘고 칼로 찌르고 독약 먹이고 1시간 만에 380명 살육한 한국군 | 인터뷰 | 빈딩성 떠이선현 떠이빈사 빈안(구 안빈) 고자이, ‘쯩진 할아버지의 마당’(2-1) | 고자이 마을에 대한 현장취재를 통해 학살 생존자 호지에우(86)의 증언을 전함. 동시에 같은 빈안에 속하면서 고자이로부터 2km 떨어진 곳으로 1966년 2월 23일에 90명이 학살된 마을을 방문, 생존자인 쩐남(82)의 증언과 위령비 사진도 함께 보도함. |
KP-63 | 오마이뉴스 | 2013.09.08. | 송필경 | “한국군이 우리 마을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 인터뷰 | 빈딘성 떠이손현 따이빈사(2-1) | 따이빈사 답사를 다녀온 ‘베트남평화의료연대’ 시민기자의 기사로, ‘런 아저씨(응우옌떤런, 62)’의 학살 증언 전문과 함께 고자이 학살의 위령비와 벽화 사진을 전함. |
KP-64 | 오마이뉴스 | 2014.03.02. | 황윤희 | “아가야, 한국군이 우릴 폭탄 구덩이에 넣고...” | 인터뷰 | 빈딩성 따이빈사(2-1) | (송필경의 기사와 유사하게 따이빈사 답사 이후 작성된 시민기사) 빈딩성 따이빈사 학살에 대한 설명 및 위령비 사진과 함께, 생존자인 ‘런 아저씨(63)’의 증언 전문을 전함. |
KP-65 | 한겨레21 (1016호) | 2014.06.19. | | 심각한 사건…최종조처를 통지해주시오 33) | 공식기록 | | 1968년 2월 ‘퐁니‧퐁넛촌에서 발생한 일’에 대하여 동년 4월 주월미국사령관이 채명신에게 ‘최종 조처’를 촉구하던 편지 전문을 보도하며, 당시 채명신의 입장을 그의 회고록을 참고하여 이야기로 재구성한 글. |
KP-66 | 위클리포유 | 2014.08.08. | 박진관 | 골수에 사무친 원한…마을회관앞 ‘한국군증오비’에 ‘恨과 복수’ 새겨놓아 | 인터뷰 | 푸옌성 동호아현(1-1) 호아히엡남사 붕따우, 토럼 | ‘한홍구와 함께 떠나는 베트남평화기행단’에 동행하여 방문한 한국군 민간인 학살지들에서 붕따우 마을(1966년 1월 2일)의 생존자 응웬끼뚜엔(57), 토럼마을의 생존자 팜딘타오(59, 당시 10살)의 증언을 기록하여 전함. |
KP-67 | 한겨레21 (1030호) | 2014.10.02. | 고경태 | 박정희는 왜 특명을 내렸나 | 공식기록 | 꽝남성 디엔반현 퐁니, 퐁넛 마을(4-1) | 학살 1주기이던 1969년 2월, 학살 유가족들이 남베트남 하원의회 의장에게 보낸 탄원서의 내용을 보도함. 이 탄원서는 기밀해제된 미군 내부자료에 첨부되어 있던 자료로서, 한국군의 야만적 행위로 67명이 곤충취급을 받았다고 고발하며, ‘배상’을 요구하고 있음. 더하여 이 보도에서는 밀라이 사건과 관련한 재판이 국내보도되던 1969년 11월, 퐁니퐁넛촌에 진입한 소대의 지휘관이던 최중위가 특명수사의 대상이 되었음을 밝히며 관련성을 시사하고 있음. |
KP-68 | 한겨레21 (1032호) | 2014.10.16. | 고경태 | 태풍의 냄새, 박정희는 미리 맡았나 | 공식기록 | | 1970년 2월 17일, 동맹국에 대한 미국 지원금의 사용처를 조사하는 사이밍턴 청문회를 앞두고, 외무부 장관이 국방부 장관 앞으로 ‘주월한국군의 불상사에 관한 문의사항’이라는 전문을 보냄. |
푸옌성(1) | 이 보도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지는 않으나, 1968년 7월에 제출되었던 이른바 ‘랜드 보고서’에서 1966년 중반 베트남 푸옌성에서 벌어진 한국군 학살 내용이 기재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밝힘. (-> 1969년 ‘한국군 해병에 의한 잔혹행위 의혹’ 보고서가 작성된 배경) |
KP-69 | 오마이뉴스 | 2015.04.06. | 유성호 | “50년 흘렀지만 학살 생생... 기억 전하는 게 소임” 34) | 인터뷰 | 퐁니 마을(4-1), 빈딩성 따이손현 따이빈사 안빈마을(2-1) | 당일, 학살 생존자인 응우옌 떤 런과 응우옌 티 탄의 국회 기자회견에 대한 기사로, 생존자들의 증언 내용과 더불어 학살에 관한 공식기록에 대해 전하고 있음. |
KP-70 | 오마이뉴스 | 2015.04.07. | 이희훈 |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을 다 죽여버릴 수 있나요” 35) | 인터뷰 | | 응우옌 떤 런(64)과 응우옌 티 탄(57)의 학살 증언과 참전단체들의 반응에 대한 심경을 전하는 보도. |
KP-71 | 프레시안 | 2015.04.07. | 윤효원 | “여자는 ‘한 끼’ 식사, 남자는 바로 쏴 죽였다” | 인터뷰 (참전군인) | | 필자가 베트남 출장에서 만난 익명의 ‘운전사’36) 와의 대화를 전함. 참전군인이었던 그는 매복 시 남자를 발견하면 즉시 사살, 여자를 발견하면 “집단으로 윤간”한 뒤 증거인멸을 위해 사살했다고 증언하였음. |
KP-72 | 프레시안 | 2015.04.13. | 김영화 | 한국군 베트남 ‘민간인 학살’ 증언... “평화를 위해” 37) | 인터뷰 | | 응우옌 떤 런(64)과 응우옌 티 탄(57)이 대구의 강연에서 한 학살 증언을 기록하여 전하는 보도. |
KP-73 | 시사IN (396호) | 2015.04.18. | 정희상 | 여덟 살 아이를 향한 한국군의 총구 | 인터뷰 | | 4월 6일 오전, 학살 생존자 응우옌떤런, 응우옌티탄, 그리고 호찌민 시 전쟁증적박물관 후인응옥번 관장과 직접 인터뷰한 내용을 전함. 학살사건의 전말과 부상 후유증, 참전단체의 주장에 대한 심경 및 반박, 베트남 정부의 지원 실태 등이 그 내용. |
KP-74 | 한겨레 | 2015.04.24. | 고경태 | 할머니의 어떤 기억 | 인터뷰 | 빈딘성 안년시(옛 안년현)(2-4), 뚜이프억현(2-2), 푸깟현(2-3) 일대 | 정대협은 빈딘성 인민위원회로부터 받은(2월) 한국군 성폭력 피해자 26명의 명단 중 10명의 생존자를 만나 인터뷰를 진행하였음(3-4월). 생존자들이 피해를 입은 지역은 1965년 10월부터 1973년 2월까지 맹호부대가 주둔했던 지역. 이 기사는 인터뷰한 10명 중 8명의 증언을 전하는 보도이며, 증언 중에는 주민 30-40명이 함께 기지로 잡혀갔다는 내용, 일정기간 기지에 감금되어 여러 명에게 수 차례 성폭행을 당했다는 내용 등이 포함됨. |
안년시 | 레티히에우(1935), 하티낌응옥(1935), 하티찐(1929), 응우옌티카인(1936), 응우옌티떰(1954), 응우옌티바이(1948), 팜티언(1951) |
푸깟현 | 팜티하인(1951) |
KP-75 | 오마이뉴스 | 2015.08.27. | 고상만 | 베트남전 무용담, 실상 듣고는 충격 | 인터뷰 | | ‘베트콩 참전군인’ 싸우 탄(70)의 증언. “남자는 보이는대로 다 죽였고 여자들은 집단으로 윤간했다.”, “시신을 깔아 뭉갰다. 증거를 없애기 위한 의도였을 것이다.” |
KP-76 | 오마이뉴스 | 2016.01.27. | 김형배 | 어린아이들까지 모조리 죽여야 했단 말인가 | 공식기록 (+분석) | 디엔반현 퐁니·퐁넛, 하미(4-1) | 퐁니·퐁넛 마을과 하미 마을의 위령비에 적힌 정보를 성별, 연령에 따라 분석함. 전투능력이 있는 젊은 남성비율이 매우 희박하며, 희생자의 절반 이상이 어린아이였던 반인륜적 범죄임을 강조하고 비판함. |
KP-77 | 한겨레 | 2016.03.04. | 박기용 | 한국군 베트남 민간인 학살 50주년 위령제, 한국인 사죄의 첫걸음 | 인터뷰 | 빈딘성 깟띠엔사 쯔엉탄의 이웃마을(2-3) 38) | 생존자 판딘라인의 증언. 1966년, 생후 3일째 날 마을에 학살이 벌어짐. |
떠이빈 사(구 빈안 사) 깐븜마을 | 빈안학살의 대표적 생존자 응우옌떤런(65)의 증언. |
KP-78 | 뉴스민 | 2016.03.06. | 김규현 | [빈안학살 50주년 평화기행➂] “카이, 카이, 카이(말 좀 하게 해 주세요)” | 인터뷰 | 빈딘성 푸깟현 깟띠엔사 쯔엉탄(2-3), 깟흥사 미룡촌 | 1966년 9월 24일 쯔엉탄 학살의 유가족 후옌 티엔 타오에 대한 이야기와 사진, 그리고 1966년 미룡촌 학살의 생존자 판 딘 란의 증언을 전함. (한겨레뉴스 3월 4일자에 실린 것과 동일한 기행에 대한 취재이나, 이 기사에는 판 딘 란의 마을명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었음) |
KP-79 | 한겨레21 (1102호) | 2016.03.09. | 조우혜 | 살아남은자들의 슬픔 | 인터뷰 | 디엔반 퐁니(4-1) | 생존자 응우옌 럭(64)의 사진과 증언 |
디엔반 하미(4-1) | 생존자 응우옌 럽(62)의 사진과 증언 |
KP-80 | 뉴스타파 목격자들(영상) 39) | 2016.05.20. | | 전쟁 1부, 두 개의 기억 | 현장취재 | 빈딘성 떠이빈사(2-1) | - 빈안학살 50주년 위령제 방문현장 취재 - 1966년 2월 26일 380명이 학살된 고자이 마을 위령비 취재 - 빈딘성 박물관, 민간인학살 증거자료들 및 박물관 설명 취재 |
인터뷰 | 빈딘성(2-1) | 학살 생존자 응우옌 떤 런 증언 |
인터뷰 (참전군인) | | - 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회장 우용락 증언, “나오라고 해서 안 나오면 전쟁이 붙어버리는데 어린 애라고 쏘는 건 아니지. 쏘다 보면 전쟁하다 보면 어린 애도 맞을 수 있는 거고. 안 나오는 사람들, 안 나온 사람들은 99%는 전부 다 ‘사상이 안 좋은 사람들이다.’ 베트콩들이다. (당시에?) 예. 그런데 지금 북베트남이 베트콩들이 이겨버리고 나니까 자기들이 전부 다 민간인이었던 것처럼 해서 ‘피해를 봤다.’ 이렇게 뻥튀기를 해서 이야기하는 게 있어요.”(간접인정) - 베트남전 참전군인 김영만 증언 (1966년 10월 해병 청룡부대 소속으로 꽝응아이성 짜빈동에 주둔한 병사) “수색 정찰을 나가서 기습을 당하는 경우가 매우 많았어요. 아주 자주 있었어요. 그러면 기습을 당하고 오면 반드시 보복을 하러 또 나가고.”, “복수를 해야 할 때,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는 복수의 대상이 베트콩이죠. 베트콩이라는 개념을 완전히 마을전체에 확장을 해버리니까 노인이고 애들이고 할 것 없이 막 그냥... 무차별적으로... 그래서 그런 민간인 학살이 생긴 거죠” |
KP-81 | 뉴스타파 목격자들(영상) | 2016.05.27. | | 전쟁 2부, 책임없는 전쟁 | 인터뷰 | 빈딘성 깟띠엔사 쯔엉탄(2-3) | 1966년 9월 24일 학살에 대해 피해자 후잉티 다오의 증언 |
꽝남성 디엔반현 디엔안면 퐁니(4-1) | 1968년 2월 12일의 퐁니학살 생존자 응우옌 티 탄의 증언 |
쯔엉탄 이웃마을(2-3) | 1966년 출생 3일 후 학살을 경험했던 생존자 판 딘 란의 증언 |
정부입장 | - 국방부군사편찬 연구소의 조사문건, “베트남 현지신문 보도에 대한 당시 주월한국군 사령부 조사 결과” : “학살은 사실이 아니며, 베트콩에 의해 조작된 음모였다”는 내용 - 국방부 관계자와의 전화 인터뷰 “이걸 저희가 입장이 나와야 하나 잘 모르겠네요” |
순번
언론사
일시
작성자
제목
정보 항목
학살지역(매칭번호)
내용요약
KP-1
월간말
1990.7월
김민웅
한국군의 월남전 참전, 그 역사적 진실
공식자료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에 대해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한편, 마이클 존스 부부의 『Allies Called Koreans-A Report from Vietnam』에서 두 사례를 인용하며, 한국군의 잔혹한 작전수행 방식이 어떠했는지와 더불어 마을에 초토화작전이 행해진 맥락에 대해 밝히고 있음.
푸옥 빈
1966년 11월, 푸옥 빈 마을에서 140여 명 학살
빈 키
1966년 12월 빈 키 지역의 룽 빈 마을에서 330여 명 학살.
KP-2
월간조선
1992.04.01.
유용원
全斗煥 연대에서의 「월남인 학살사건」
인터뷰
(참전군인)
- 전두환은 1970년 말부터 1971년 말까지 백마부대 29연대 연대장으로 참전한 바 있으며, 이 보도는 29연대 장교들의 인터뷰를 통해 “월남전에서 전두환연대가 양민 수십명을 학살”했다는 ‘소문’의 진위를 밝히는 보도임. 29연대의 핵심참모와 중대장이었던 이에 따르면, 소문은 과장된 것이나 29연대 1대대 2중대의 ‘소대장’이 반닌 마을에서 71년 초에 민간인 두 명을 오인사살한 뒤 전과로서 허위보고한 일은 실제로 존재했다고 함. 당시 명령을 내린 소대장은 5년형을 받았음.
- 이 기사는 전두환을 두둔하는 논조의 글인데, 이 사건의 ‘사소함’을 강조하고자 한 맥락에서 일본 언론에서 대여섯 차례 보도됐던 한국군의 월남 양민 29-2백명 학살설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음.
KP-3
한겨레21
(256호)
1999.05.06.
구수정
아, 몸서리쳐지는 한국군!
인터뷰
남부 판랑지역 린선사(5) 1)
푸(78) 스님과 목격자 응웬티유엔한(45). 1969년 10월 14일, 남한 군인의 총기난사에 의해 4명의 승려가 살해된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
비공식기록
빈딘성 퀴년시 투이픅 군 픅호아 사 턴지앙 촌(2-2) 2)
‘필자가 가지고 있는 기록’에 따르면, 1965년 12월 22일, 2개 대대가 50여명이 넘는 양민을 학살했다고 함(무슨 기록인지는 제시되지 않음).
정부보고
(인용)
빈딘성(2-1) 3)
당시 따이선 현 인민위원회 주석이었던 응웬탄퐁이 ‘베트남 중부 각 성의 전쟁범죄조사회의’에서 보고한 내용이 일부 인용됨. 1966년 1월 23일부터 26일까지 1200명의 주민이 학살되었음.
KP-4
한겨레21
(273호)
1999.09.02.
구수정
베트남의 원혼을 기억하라
인터뷰
베트남 정치국의 <전쟁범죄조사서-남부 베트남에서 남조선 군대의 죄악>에 소개된 지역을 바탕으로 베트남 중부 5개 성, 9개 현, 13개 사, 수십개 마을을 직접 돌아본 필자가 100여 명의 증언을 토대로 작성함. 기사 전체에 걸쳐 생존자들의 증언이 직접 인용되어 있으나 증언자가 누구인지는 드러나지 않음. 생존자 레티티엣, 팜티호아(<쿠앙남성디엔증사> 출처), 빈딩성 푸캇현의 응웬년의 사진 수록.
KP-5
한겨레21
(273호)
1999.09.02.
구수정
미국보다 잔인했던 ‘용병’
인터뷰
푸옌성 투이호아현 남호아히엡사(1-1)
1966년부터 백마부대 28연대의 주둔지였던 투이호아 지역. 전략촌 주민들이 낮에는 마을로 내려와 일을 했는데, 그들에 대한 학살이 잦았다고 함. 집단 양민학살은 총 세 차례로 66년 1월 1일(음력 65년 12월 10일) 다응우촌, 붕타우 마을에서 45명 학살, 4) 66년 6월 18일(음력) 붕타우 마을에서 35명 학살, 5) 66년 12월 26일(음력) 푸락 마을에서 42명 학살 6)등이었음.
당시 다응우 전략촌에 있었던 후이엔수언(79), 응웬탄쭝(50), 응웬흐찐(62)의 증언. 붕타우마을의 1월(양력) 학살에서 가족 5명을 잃은 쩐반호아(63), 같은 학살에서 어머니를, 66년 푸락 마을에서 또다시 가족을 잃은 보티흥, 익명의 할머니의 증언.
KP-6
한겨레21
(273호)
1999.09.02.
구수정
영국·일본인이 달래준 상처
인터뷰
쿠앙응아이 성, 빈선 현, 빈호아 사 9개마을(커우, 롱빈, 응옥흥, 안 등)(3-1)
커우마을 7) 학살의 생존자 도안응이아(34)의 증언. 부주석의 설명. 더불어 학살 이후 마을에 설치된 지뢰로 하반신을 잃은 팜쭉의 사진도 함께 수록.
쿠앙남 성 투이보 촌(4-1)
생존자 응웬티니(85)의 이야기
KP-7
한겨레
(273호)
1999.09.02.
구수정
“전쟁 뒤 한국인 한번도 안왔다”
인터뷰
빈호아 사(3-1)
목격자이자 유가족으로, 현재 빈호아 사 퇴역군인회 집행위원인 팜반쿡(67)의 증언. 쯔옹딘 폭탄구덩이, 안 마을, 커우 마을에서의 학살 목격담을 전함.
KP-8
한겨레
(273호)
1999.09.02.
구수정
저주의 욕설, 화해의 술잔
빈딘성, 타이선현, 타이빈사(구 빈안사) 15개 지점(안빈, 푸퐁, 푸캇, 고자이, 안칸 등)(2-1)
1966년 음력 1월 23일, 안빈촌에서의 첫 학살을 시작으로 음력 2월 26일까지 맹호부대 3개 중대에 의해 15개 지점에서 발생한 집단 학살로 1200여명의 주민 학살.
안빈 촌
학살 생존자로서 현재 타이빈사 당서기장인 응웬턴런의 증언. 그의 어머니 응웬티킴흥(당시 41)과 여동생이 학살에 의해 사망. (인민위원회 사무실에 존재하는 빈안 학살의 희생자 및 생존자 명단)
안칸 마을
생존자 판티부이(76)와 그의 사위 응웬반져(62)의 증언. 생존자 레반호아(39)에 대한 짧은 이야기.
KP-9
한겨레21
(280호)
1999.10.28.
구수정
역사발굴/단명의 길, 디엔반의 비명
인터뷰
쿠앙남성 디엔반현 디엔안사
퐁니촌(럽남 마을), 풍넛촌(4-1)
1968년 1월 발생한 학살의 생존자 쩐티득(72), 응웬수(71)의 증언과 사진. 당시 희생자인 찐쩌, 응웬티탄 등의 이야기와 함께 생존자 응웬티퉁의 사진도 함께 보도.
KP-10
한겨레
1999.11.13.
김현수
한국군 베트남 양민 학살 의혹 ‘한겨레’ 통신원 르포
인터뷰
빈딘성 뇨럼(2-2) 8)
1966년 3월 23일, 143명이 살해되고 8명만 살아남은 사건의 생존자 쩐반바이(42, 당시 15살), 당티즈(49)의 증언
KP-11
한겨레21
(283호)
1999.11.18.
정창권
“평화로운 강물이 맛있는 술을 빚는다”
인터뷰
디엔 니엔(3-2) 9)
1966년 64명이 학살된 양민학살의 생존자 팜티메오(85)의 증언.
KP-12
당대비평
1999.12월
구수정
‘떤장’ 마을 가는 길: 베트남에서 온 편지
인터뷰
빈딘 성 따이선 현 따이빈 사(2-1)
1966년 1월 23일-2월 26일(음력)의 빈안 학살 생존자 응웬런떤(48) 10)의 증언
뚜이픅 현 떤장(2-2) 11)
1965년 11월 29일(음력)의 떤장 학살 생존자 당반푹(70), 응웬반숭(36)의 증언
빈딘 성 푸캇 현 쯩탄 촌 남 마을(2-3)
응웬년(73), 부이티헌(74)의 이야기
꽝아이 성 투이보 마을(4-1)
응웬티니(85)의 이야기
KP-13
한겨레21
(285호)
1999.12.02.
구수정
베트남 소설가가 본 ‘학살’
수기
응웬한쭝 : 쿠앙남성, 디엔반 현, 디엔안 사 양민학살 피해자의 유가족으로서, 한국군 양민학살을 <한국으로부터의 편지>라는 단편소설로 다룬 작가. 작가 소개와 함께 그가 보낸 편지(수기)의 전문을 실은 보도. 이하는 수기 내용.
쿠앙남성 디엔안사 퐁니촌 럽남마을(4-1)
학살에 대한 설명과 함께, 생존자 릉씨, 레딘먼에 대한 이야기를 전함.
KP-14
한겨레21
(287호)
1999.12.16.
고경태
“제발 와서 사실을 알아라”
인터뷰
푸옌성 투이호아(1-1)
전쟁 당시 북베트남군 제5사단 20연대장으로 투이안 지역을 담당했던 레 치 투언(72)의 인터뷰. 푸옌성 투이호아의 학살을 설명하는 한편, 전쟁 당시 파악하고 있던 한국군의 작전특징을 전함.
KP-15
한겨레21
(289호)
1999.12.30.
고경태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죽였다”12)
인터뷰
(참전군인)
남부 판랑지역(5) 13)
1967년 3월부터 2년 6개월간 백마부대 30연대 소속으로 판랑지역에 복무한 김00(53)의 증언 : “베트콩 저격병들이 쏜 거지요. 한번 그러면 그 인근의 마을을 무차별 공격해 버리지요. 아예 불살라 버립니다.” 판랑, 까두, 동바틴, 혼바산, 동보산 등에서 작전.
퀴논의 떤장마을 부근(2-2) 14)
69년 3월부터 70년 5월까지 맹호부대 해산진 10중대 소속의 첨병으로 퀴논 부근에서 주로 작전을 수행했던 권00(54)의 증언. : “제가 베트콩에 당한 줄 알고 후퇴했던 아군 병력들이 다시 돌아와 할머니와 아가씨를 죽였습니다.” 특히 69년 8월 떤장 부근에서 매복 중, 30여명의 사람들을 “애들부터 어른까지” 공격했다고 증언.
투이호아(1-1)
70년 6월부터 71년 7월까지 백마부대 28연대 본부 범죄수사대 소속으로 투이호아지역에서 복무했던 김00(53)의 증언 : “양민학살? 그건 뭐 사실이지요.”
KP-16
한겨레21
(289호)
1999.12.30.
“우리는 사죄할 수도 있다”
참전군인 성명서
<한겨레21>의 캠페인에 대한 사단법인 월남참전전우 사회복지 지원회의 성명서. “사실 우리로서는 베트콩인지 양민인지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동료 전우들의 죽음의 고통을 참지 못해 마을 전체를 베트콩 소굴로 여겨 무차별 공격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우리로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고 그때에 만에 하나 베트콩에 동조하지 않은 양민이 학살됐다면 27만의 참전용사를 대표해서 진심으로 사죄를 드린다.” 등
KP-17
월간말
2000.1월
오연호
베트남전쟁 참가 전투소대장들 35년 만에 입 열다 15)
인터뷰
(참전군인)
청룡부대 2연대의 정00 소대장, 최00 소대장의 증언에 대한 심층취재로, 부대원들의 강간과 민간인 사살에 대한 증언이 포함됨.
투이호아(1-1) 16)
청룡부대 2대대 5중대 3소대장 정00(59)의 증언. 1966년 1월 20일 정전협정을 위반하며 마을에 포를 쏘아 설을 준비하던 민간인을 살해한 사건, 소대원의 민간인 여성 강간 사건, 베트콩 ‘용의자’였던 두 청년 살해 사건에 대해 전함. “우리가 작전수행중에 본의 아니게 했던 잔혹한 행위에 대해선 백번사죄해도 모자라겠지만 의도적으로 그러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청룡부대 2대대 6중대 1소대장 최00의 증언(59). 1965년 12월경 소대원의 민간인 여성 강간 사건(회고록과 교차확인), 1966년 5월 14일경 발생한 아군피해에 대한 보복으로 1소대와 3소대가 퓨헵 마을을 공격하여 20여명(회고록에는 53명)을 학살한 사건에 대해 전함. 5월 14일경의 사건으로 3소대장이 상부에 불려갔으나 특별한 조치는 없었다고 함. 최우식은 베트남전은 게릴라전으로 노근리 사건과는 양상이 달랐으므로 민간인 피해자들에게 사과하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말함.
확인취재
투이호아 퓨헵 마을(1-1)
퓨엔성의 바쿠앙 주석에 따르면(1999년 12월 16일 연락), 1966년 5월 14일 마을 주민 46명이 숨지고 3명이 살아남은 사건이 실재로 존재하였음. 생존자 3명 중 브이티찐과 브이티농이 현재 생존해 있으며 당시 사건을 기억함. 기사는 브이티농의 전화인터뷰 내용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전달하고 있음.
KP-18
한겨레21
(292호)
2000.01.20.
고경태
월남에서 돌아간 새까만 김중사…
인터뷰
칸호아성 닌호아현(5) 17)
1968년 9월 23일 한국군 백마부대의 마을 수색으로 미군소속의 비엔즈응(당시 25)이 사망. 그 아내로서 강간미수 피해자인 쩜티 육(55)의 증언.
KP-19
한겨레21
(294호)
2000.02.03.
?
“총성 소리만 듣고도 보복”
공식자료, 인터뷰
(모두 인용)
다이앤 존스와 마이클 존스는 1972년 5-8월 사이에 채록한 증언과 자료를 바탕으로 1975년에 <한국군이라 불린 동맹군1>이라는 보고서를 미국 필라델피아의 퀘이커 봉사단 자료에 실었는데, 해당 보고서를 소개하는 보도. 295호의 “사람들을 모아놓고 쏘았다” 보도에서 이어짐.
쿠앙응아이 디엔니엔촌, 안토촌 18) (3-2)
1966년 11월 9일, 청룡부대의 작전으로 인해 디엔니엔 촌에서 50-100명, 안토촌에서 5명이 사망. 디엔니엔 촌 주민인 안하이(당시 15)의 증언
KP-20
추적60분
(KBS2 TV)
2000.02.10.
?
베트남 위령탑의 진실
인터뷰
(참전군인)
- 해당 영상을 찾을 수 없었음.
- 뉴스위크의 2000년 4월 12일자 기사에 따르면, 참전군인의 인터뷰에 관한 다큐멘터리이며 정당한 이유 없는 살해행위에 대한 증언이 포함되었다고 함.
KP-21
한겨레21
(295호)
2000.02.17.
?
사람들을 모아놓고 쏘았다
공식자료,
인터뷰
(모두 인용)
쿠앙응아이성 선틴현(3-2) 19)
선록사 푹빈촌에서 온 바하이의 푹빈학살에 대한 증언. 1966년 11월 9일 아침 7시에 푹빈에 들어온 한국군은 11월 11일 학살을 벌였다고 함.
쿠앙응아이성 빈선현 빈키사 20) 롱빈촌(3-1)
쿠앙응아이성 병원에 있던 안사우(35)의 롱빈학살에 대한 증언. 1966년 12월 6일 새벽 4시쯤, 민리엔촌과 고롱초소의 한국군이 롱빈촌으로 내려와 30여명의 사람들을 폭탄구덩이에서 학살.
쿠앙응아이성 빈선현 빈키사 락선촌(푹선)(3-1)
안베이(30)의 증언. 1966년 12월 6일 오전 10시경, 쩌우레언덕의 초소에서 내려온 한국군들이 락선촌 커우마을의 주민을 모아서 학살함.
쿠앙남성 디엔반현 탄퐁사 퐁니촌(4-1)
1968년 2월 12일의 학살에 대한 <뉴욕 타임스>(1972년 2월 13일 보도)가 인용됨.
쿠앙남성 유이쑤옌현 쑤옌쩌우사(4-2)
쑤옌쩌우의 위령식에 대한 존스 부부의 목격담과 더불어 한 남성의 1969년 3월 15일 학살에 대한 증언. 존스 부부는 이런 사건이 한국군의 주둔기간동안 흔했으며, 쿠앙남성 책임자가 “한국군들이 너무 자주 사람들을 죽였”다고 말한 이야기를 전함.
쑤옌쯩사, 찜선촌(4-2)
쑤옌쯩의 마을사람들의 증언. 1968년 쑤옌쯩사의 홍방언덕 초소에 주둔하던 6중대 청룡부대원들이 총 300명의 주민을 죽였음. 더불어 찜선촌에서도 여러 학살사건이 발생했다는 증언.
쑤옌푹사(4-2)
사이공 정부 소속 ‘귀향마을’ 캠프 부소장의 증언(마을 사람들의 제지, 첨가, 교정이 곁들여짐). 1968년 후반, 노인과 임산부 등 몸이 불편해서 피신하지 못했던 51명의 주민에 대한 청룡부대의 학살.
KP-22
한겨레21
(296호)
2000.02.24.
?
“누가 그들에게 돈을 지불했는가”
공식기록
존스부부 보고서의 마지막 연재. 존스부부는 그들이 45건 이상의 사건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였으며, 100명 이상의 양민을 학살한 사건도 13건에 달한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한국군의 학살에서 발견되는 공통적인 특징을 정리함.
KP-23
한겨레21
(296호)
2000.02.24.
황상철
“아군의 머리에 총을 들이댄 이유”
인터뷰
(참전군인)
1966년 베트남전 당시 청룡부대 2대대6중대3소대장을 지냈던 유00(61)의 증언. “ 비전투원을 쏜 것은 잘못됐습니다. 내 총에 맞지 않기를 바랐지만 군인으로서 나는 또 쏘지 않으면 안 됐습니다. 간접적으로 내 부하들에 의해 희생된 사람도 있을 것이고….”
푸옌성 투이호아현(1-1)
1966년 5월 14일 토럼마을에서 청룡부대2대대6중대1소대, 그리고 10월경 한 마을에서 2소대와 3소대의 민간인들에 대한 보복공격
쿠앙응아이성 선틴현 일대(3-2)
66년 11월 청룡부대의 용안작전 시 민간인 이용 및 살해
KP-24
한겨레21
(297호)
2000.03.02.
?
양민학살 숫자는 9천명 이상
공식기록
한겨레의 9월 중부지역 취재결과와 전범조사위 자료, 존스부부의 보고서의 종합한 결과, “남부 베트남 5개성에서 80여건의 학살이 이뤄졌고 모두 9천여명이 희생됐다”는 구수정 통신원의 분석을 전함.
KP-25
한겨레21
(301호)
2000.03.30.
?
“한국군에 대한 증오 남아있다”
인터뷰
쿠앙응아이성 응이얀현(3) 21)
학살 생존자 응엔 티 쿠앙(53)의 증언. ‘베트콩기가 걸려’ 있던 집을 한국군이 공격하여 그의 오빠 1명, 동생 2명이 사망함.
KP-26
뉴스위크
2000.04.12.
이병종
전쟁 영웅들의 ‘어두운 상처’
인터뷰
(참전군인)
참고) 2월 KBS <추적60분>의 ‘베트남 위령탑의 진실’에 등장한 참전용사의 증언 네 마디가 인용됨. 마을 수색 중 발견된 7-8살 소녀를 중대장이 사살해버렸다는 내용.
푸엔성 톨람 마을(1) 22)
1966년 3월 14일, 수류탄 폭발로 대원 4명이 사망한 뒤 이어진 총격전(안00) 혹은 보복(최00)으로 민간인 46명이 살해되었던 일에 대한 이야기를 재구성, 당시 소대장 최00과 부상당한 그의 대리로 지휘를 맡았던 안00 병장의 증언을 전함 .
KP-27
뉴스위크
2000.04.12.
Ron Moreau
“진실은 은폐할 수 없다”
인터뷰
푸엔성 안린 군(1-2) 23)
- 1967년 4월 1일 안 린군 빈 수안 마을에서 발생한 학살의 생존자 구엔 반 토이(사진)와 그의 딸 디엠의 증언. 한국군 순찰대가 주민들을 한데 모아 죽였으며, 15구가 넘는 시신이 발견됨.
- 거의 같은 시각, 인근 마을에서 총 23명가량의 주민이 방공호 안팎에 모아져 학살된 사건에 대해 생존자 구엔 훙 토아이(46)의 증언도 함께 전함.
- 토이에 따르면, 당시 안린 군 주민들은 한국군의 강제이주 정책에 저항하고 있었다고 함. 필자는 빈딘, 쾅가이, 푸옌 3개 성에서 이주작전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조직적으로 살해되었다고 설명함(출처:‘베트남의 지방 공무원(지역 미상)’)
- 1967년, 안 린에서 한국군 병사가 집을 불태우고 70세 노인을 방공호에서 살해한 일에 대한 아들 부이 탄 트람의 목격 증언을 전함. 그는 이후 베트콩이 되었음.
푸엔성 호아 동(1-1) 24)
1967년 5월 22일의 학살로 8명의 가족을 잃은 구엔 곡 차우(83)의 증언. 13명의 부녀자와 아이들을 우물에 넣고 수류탄으로 학살함.
KP-28
한겨레21
(305호)
2000.04.27.
황상철
엄청난 일들, 34년만에 말한다
인터뷰
(참전군인)
쿠앙응아이성 선틴현(안투엣, 빈록마을 서쪽, 서부지역 폭탄구덩이)(3-2)
청룡여단 제2대대 7중대장이던 김00(31, 당시 대위)가 1966년 11월 9일부터 27일까지 실시된 ‘용안작전’ 중 그의 대대가 진행한 11월 9-14일 간의 작전에 대해 증언함. 주민을 ‘모아 놓고’ 죽였다고 인정한 첫 증언. 구체적으로 안투엣 마을, 빈록 마을의 서쪽 마을, 그리고 '서부지역 야산아래 논바닥'의 폭탄구덩이(66.11.14)에서의 학살을 설명함.
KP-29
한겨레21
(305호)
2000.04.27.
황상철
‘바늘자국’을 기억하고 있었다
확인취재,
인터뷰
쿠앙응아이성 푹빈촌(구 안뚜엣(1))(3-2)
김00의 증언에 기초한 대조취재. 푹빈촌에서 음력 1966년 9월 27일에 일어난 학살 사건에 대한 생존자 레 티 티엣(65), 보우 통(69), 응웬 탄 레(46), 응웬 리(75)의 증언, 그리고 푹빈촌 내 빈따이 마을 학살의 생존자 팜 티 퐁(54) 25) 의 증언 보도. 김00의 증언과 푹빈 촌의 학살 사실이 일치함을 확인.
KP-30
한겨레21
(305호)
2000.04.27.
?
중대장도 모르는 또다른 ‘싹쓸이’
인터뷰
쿠앙응아이성 하따이촌(3-2)
음력 1966년 9월 26일, 푹빈촌 학살 하루 전에 발생한 학살. 그 유일한 생존자인 쩐 티 따이(44)의 증언과 위령비의 보도. 더불어 <파월한국군전사> 및 김00의 증언과의 교차확인.
KP-31
한겨레21
(305호)
2000.04.27.
고경태,
황상철
“그들의 증오심이 덜어진다면...”
인터뷰
(참전군인)
베트남 대조취재를 전후하여 김00에 대한 추가 인터뷰를 보도.
KP-32
한겨레21
(306호)
2000.05.04.
고경태,황상철
양민학살, 중앙정보부에서 조사했다.
인터뷰
(참전군인)
쿠앙남성 디엔반현 디엔안사 퐁니촌(4-1)
1968년 2월 12일(음력 1월 14일), 퐁니촌에서 직접 작전을 진행하던 청룡여단 제1대대 1중대 1소대장 최00(58), 2소대장 이00(57), 3소대장 김00(59), 1중대장 김00의 증언을 통해 퐁니학살의 전모를 재구성함. 더하여 김00 중대장이 3개월 만에 조기귀국했다는 사실과, ‘안전마을을 싹쓸이’ 했다는 당시 소문에 대한 선배장교의 증언도 전함.
KP-33
한겨레21
(306호)
2000.05.04.
?
아이들 주검은 바구니에 담아
교차확인
디엔반현 퐁니촌(4-1)
이00와 응웬한쭝, 현지 생존자와 피해자가족들의 증언, 그리고 <파월한국군전사> 등의 공식기록에 드러나는 퐁니촌 학살을 교차확인하는 보도.
KP-34
한겨레21
(306호)
2000.05.04.
구수정
베트남의 진심은 무엇일까
인터뷰
푸옌성 뚜이호아현 호아히엡사 붕따우 마을(1-1)
1966년 1월 2일(음력) 붕따우 학살 생존자 릉티퍼이(66)의 증언.
KP-35
한겨레21
(307호)
2000.05.11.
고경태
“학살을 자랑할 때 견딜 수 없었다”
인터뷰
(참전군인)
1969년 6월부터 73년 3월까지 십자성부대에서 통역관으로 근무했던 이00(50)의 증언. 당시 베트남 사람들 사이에 학살 이야기가 많이 돌고 있었으며, 베트남 정부 및 칸호아성 공무원들이 항의를 하고 시민들의 데모가 있었던 사실에 대해 전함.
KP-36
한겨레21
(308호)
2000.05.18.
?
“너무너무 고마워”
인터뷰
하미(4-1)
1968년 2월 25일 하미 학살 생존자 팜티 호아(72, 사진)의 이야기 및 인터뷰.
KP-37
한겨레21
(309호)
2000.05.25.
고경태
“와야 해, 그때 그 군인들이…”
인터뷰
쿠앙응아이성 선틴현 틴선사 푹빈촌
김00의 증언(한겨레21 305호)을 기초로 푹빈촌에서 이루어진 확인취재를 보도. 1966년 11월 학살의 생존자 및 유가족인 쩐 라이(72), 레티티엣(65), 응웬 리(75), 하 티 호이(76), 팜티 퐁(51)의 증언 및 인터뷰와 사진
KP-38
한겨레21
(309호)
2000.05.25.
?
“사는 게 다 한이야 한…”
인터뷰
쿠앙응아성 푹빈촌(3-2)
학살 생존자 응웬 판(78, 사진)과 타 티 타오(73, 사진)의 증언
KP-39
한겨레21
(310호)
2000.06.01..
황상철
한 킬러중대원의 참회
인터뷰
(참전군인)
쿠앙응아이성 야산(4)
청룡여단 제2대대5중대 전령으로 일한 정씨(55)의 증언. 1966년 10월 저녁 25여명의 사람들을 구덩이에서 학살한 사실, 그 이후에도 비슷한 학살이 벌어졌으며 그 구체적인 양상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전함.
KP-40
한겨레21
(310호)
2000.06.01.
황상철
“청룡여단서 양민학살 조작은폐”
인터뷰
(참전군인)
청룡여대 헌병대 수사계장이던 성씨(63)의 증언. 학살 생존자의 청원으로 진상조사의 지시가 청룡여단에 하달되었으나, 여단에서 자체적으로 사건을 은폐했던 전말을 전함. 조사가 아니라 지침에 따른 조서가 작성되었음.
KP-41
한겨레21
(310호)
2000.06.01.
고경태
남베트남 정부군 응웬 싸의 아픔
인터뷰
퐁니촌(4-1)
1968년 2월 12일, 퐁니촌 근방 1km의 초소에 있었으며 학살로 가족을 잃은 남베트남 정부군 응웬 싸(64)의 증언. 26)
KP-42
한겨레21
(310호)
2000.06.01.
?
1대대 1중대 2소대 3분대원의 증언
인터뷰
306호의 참전군인 인터뷰(“양민학살, 중앙정보부에서 조사했다”)에 대한 1중대2소대3분대 소속 김형팔의 동조증언. 3소대장의 증언에 의문 제기.
KP-43
한겨레21
(312호)
2000.06.15.
고경태
‘땅굴의 악몽’을 지울 수 있을까
인터뷰
쿠앙남성 디엔반현 디엔터사 투이보촌(4-1)
1967년 12월 21일(음력) 오전 10시, 청룡부대 1개 소대의 마을수색작전으로 발생한 학살의 생존자 응웬 티니(85), 쯩 티 마이(71), 쯩 티 죽(63), 쩐 티 념(86), 레 티용(72)의 증언과 사진.
KP-44
동아일보
2000.07.14.
이수형·신석호
베트남戰 ‘민간인사살’ 인정…대법, 31년만에 첫확인
공식기록
(판례)
1968년 7월 15일 베트남전 당시, 민간인 5명을 사살하도록 지휘한 혐의로 한국군 화기소대장 김모씨(59)에게 무기징역이 선고된 대법원 판결(1969년 4월 29일)을 보도함. 판결문에 적힌 범죄 상황과 함께, 김씨가 2000년 봄 재심과 진상조사를 요구하고 있음을 전함.
KP-45
동아일보
2000.07.14.
이수형
[베트남戰 '민간인사살' 판결]논란 증폭 예상
인터뷰
(참전군인)
판결에 반박하는 김씨의 주장을 간략하게나마 전하는 보도. 김씨는 그들을 베트콩으로밖에 볼 수 없었던 이유와 더불어 베트남 주민의 항의를 수습하기 위해 조사 시 사실과 다른 진술을 했다고 주장했음.
KP-46
동아일보
2000.07.14.
신석호
[베트남戰 '양민학살'판결]당시 주심 유재방씨
인터뷰
(재판관)
1969년 4월 대법원 재판 당시 대법관을 맡았던 유 변호사와 방 변호사의 인터뷰내용을 간략하게 보도. 유 변호사는 재판과정에서 ‘외압’은 없었다고 답함.
KP-47
동아일보
2000.07.16.
이수형
[베트남戰 '양민사살']인터뷰/채명신예비역중장
인터뷰
(참전군인)
김00 사건의 관할관으로서 최종 서명했던 전 파월 한국군 총사령관 채명신의 인터뷰. 그는 비록 ‘수천명의 양민학살’과는 전혀 다르나 김 씨 이에도 민간인을 사살한 군인이 10여명 더 있었으며, 명령 위반에 대해 엄정하게 처벌하도록 지시했다고 답함. 김00의 경우, 그가 주장하는 것처럼 주민의 심각한 항위 시위는 없었으며, 조작 없는 철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고 증언함.
KP-48
한겨레21
(321호)
2000.08.09.
고경태
죄의식이 평생을 따라다녔다
인터뷰
(참전군인)
쿠앙응아이성(3) 짜빈동 마을
해병 중박격포 중대 2소대 김영만(55)의 증언. 해병11중대 짜빈동 진지에 배속되어 짜빈동 전투 이틀 전 베트콩 ‘용의자’를 죽인 경험에 대한 고백. 더하여 마을 입구에서 부비트랩이 폭발하자, 해당 마을에 무차별 포사격을 가한 일에 대한 증언.
KP-49
한겨레21
(324호)
2000.08.29.
황상철
[캠페인] 하필 경찰관 부인을 살려보내...
인터뷰
(참전군인)
푸옌성 뚜이안현(1-2) 27)
맹호사단 1연대 2대대 8중대 1소대 1분대 소속으로 일했던 박씨(59, 1분대장), 이씨(54, 1분대원), 이씨(56, 1분대원)에 대한 취재보도. 1967년 4월 12일, ‘오작교 작전’ 진행 중 비무장의 젊은 남녀 12-13명을 사살한 일에 대한 분대장과 분대원들 간에 엇갈리는 증언을 전함. 생존자의 고발로 방첩대의 조사가 이루어졌고, 1분대원 8명은 사형선고(후에 감형)를 받아 11-16년의 징역살이를 했음.
KP-50
오마이뉴스
2000.09.01.
이병한
김정길 법무장관님, 31년 전 고등군법회의를 기억하십니까
공식기록(판례)
“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사살이 법원의 판결에 의해 인정된 유일한 사례”로서 <동아일보>에 보도되었던 1969년 4월 대법원의 판결문을 직접 취재보도함. 2월의 국방부고등군법회의에서 피고인 김종수의 죄를 추궁했던 김정길 검찰관이 현 법무부 장관임을 강조하며, 양민학살의 존재를 ‘대한민국은 인정하고 있는 셈’이라고 주장하고 정부의 적극적인 진상조사를 촉구함.
KP-51
한겨레21
(334호)
2000.11.15.
고경태
잠자던 진실, 30년만에 깨어나다 28)
공식기록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소에서 같은 해 비밀 해제된 공식문건의 최초공개. 이에 따르면, 1969년 12월부터 세 차례에 걸쳐 ‘한국군 해병에 의한 잔혹행위 의혹’이라는 이름의 보고서 세 건이 주월미군사령부에 제출되었음. 주월 한국군 자체조사와 더불어 미국-남베트남-한국군의 합동조사가 실시되었는데, 합동조사반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며 ‘보상’과 책임자들에 대한 ‘징계처분’을 권고하였음. 이후 1970년 1월 <뉴욕타임스>에 한국군의 학살 사실이 알려졌고, 미국 측은 ‘보고서가 절대로 언론에 알려지지 않도록 할 것’을 강조했다고 함. 이하는 1969년에 보고된 세 개의 사건.
쿠앙남성 디엔반현
퐁니·퐁넛(4-1)
1968년 2월 12일, 79명의 베트남 여성과 어린이들이 사망. (추가정리)
쿠앙남성 지쑤옌현(4-2)
푹미 사 29)
1969년 4월 15일, 민간인 4명 사망, 12명 부상, 7명 구타.
쿠앙남성(4) 호앙쩌우 30)
1968년 10월 22일, 민간인 22명 사망, 16명 부상.
KP-52
한겨레21
(334호)
2000.11.15.
한홍구
미국의 관심은 ‘학살은폐 책임’
공식기록
한겨레가 입수한 자료와 더불어 필자가 입수한 새로운 자료들을 분석하여, 미국이 한국군의 학살여부에 대해 조사하게 된 전말(사이밍턴 청문회 및 밀라이사건 폭로)과 미국이 학살의 책임소재와 사실은폐에만 집중했다는 사실에 대해 보다 심도 있게 분석함.
KP-53
한겨레21
(334호)
2000.11.15.
고경태
“양민학살 현지조사, 불발로 끝나”
공식기록
미군의 비밀보고서에 등장하는 한국군과 한국 정부관계자를 추적한 확인작업의 결과를 보도. 대부분의 요인들은 보고서에 기재된 사실을 부인하였으며, 합동조사반에 직접 참여했던 이00(70)만이 합동조사반의 구성 사실을 인정하였으나, 그마저도 조사결과에 대해서는 부인.
KP-54
한겨레21
(334호)
2000.11.15.
김창석
“한국군도 많이 당했다”
인터뷰
(참전군인)
주월한국군 초대사령관 채명신(74)의 인터뷰(11/11). 이 보도에서 그는 미군이 학살의혹과 관련해 여러 차례 조사요청을 했다는 것, ‘민간인 사살 범죄’가 분명 존재했다는 것을 인정하였으며, 동시에 조직적이고 의도적인 ‘양민학살’과는 달랐다고 구분함.
KP-55
한겨레21
(334호)
2000.11.15.
김창석
편견인가, 꿰뚫어 본 것인가
공식기록
퐁니, 디엔반현(4-1)
1968년 2월 12일부터 1969년 4월 15일까지 다낭에 파견됐던 미 정치고문 제임스 맥의 장문 보고서에 대한 보도.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쿠앙남성에 주둔했던 한국군 해병 제2여단에 대한 평가 속에 민간인에 대한 잔혹행위가 빈번하게 등장하며, 1968년 2월 12일의 퐁니 학살, 디엔반현 학살이 구체적으로 언급됨. 학살 외에도 무원칙한 피난민 처리, 암시장 운영 등 각종 부정적 행태들이 존재했음을 전함.
KP-56
한겨레21
(334호)
2000.11.15.
?
“광분된 행위는 변명 여지 없어”
공식기록
푹미(4-2) 31)
1969년 4월 15일 푹미사건에 대하여 한-미-월 합동조사반이 5월 10일에 올린 극비보고서 중에서 ‘의견’과 ‘권고사항’의 전문을 전하는 보도. “피할 수도 있었던 비극을 초래했다”, “한국 해병 여단은 푹미마을 민간인들에게 발생한 사망, 부상, 상해, 재산피해에 대한 보상금을 ... 지급할 것”
KP-57
한겨레21
(334호)
2000.11.15.
고경태
끝없이 벗겨지는 ‘제2의 밀라이’
공식기록 및 인터뷰
퐁니·퐁넛(4-1)
지금까지의 공식자료 및 인터뷰 보도를 종합하여 퐁니·퐁넛 학살의 전말을 밝히고 채명신의 주장을 반박함. 더하여 학살 당시 마을에 진입하여 사진기록을 남겼던 미군 본 상병의 설명(출처:미군보고서)도 함께 전함.
KP-58
한겨레21
(339호)
2000.12.20.
?
‘700명 학살’논란,
형식적 조사
인터뷰
(인용),
공식기록
빈꾸앙, 빈치에우, 빈호아, 빈다오, 빈장 등 5개 마을(4-3)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응웬 티 빈은 1970년 1월 22일 제51차 파리 평화협상회담에서 “1969년 11월 11일과 12일 이틀간 700명의 민간인이 학살”되었다고 증언했고, 이어서 2월에 실시된 미군의 조사에 따르면 실제로 문제의 날짜와 장소에서 ‘승룡작전’이 진행되었으나 민간인 학살의 증거는 없음. 그러나 해당 보도는 이 조사가 형식적인 것에 그쳤다며 의문을 제기함.
KP-59
한겨레21
(356호)
2001.04.24.
고경태
“그날의 주검을 어찌 잊으랴”
인터뷰
퐁니, 퐁넛 마을(4-1)
유일하게 한국군 학살 사진이 남아있는 것이 퐁니, 퐁넛 학살. 사진 속 희생자들에 대한 마을 주민, 생존자의 증언을 취록하여 보도한 자료. 11장 사진으로부터 거의 모든 인물들의 신상명세가 확인되었다고 함.
언급되는 희생자
찐 쩌(13, 사진), 응웬 티 쫑(11, 사진), 응웬 득 퉁(6, 사진), 판 티 응우(32, 사진), 도안 쩨 민(5), 응웬 딕 상(15), 응웬 티 탄(21, 사진), 32) 레 티 탄(70)의 시아버지, 레 딘 묵의 어머니 호아 타 지엔(사진)
증언한 생존자
쩐 티득(74), 응웬 티 탄(41, 사진), 응웬 티 호아(46, 사진), 쩐 티 투언(42, 사진), 레 딘 묵(당시 8살, 사진), 그 외 ‘주민들’
KP-60
오마이뉴스
2004.06.17.
강연배
베트남에 한국군 민간인 학살 추모비 세운다
인터뷰
(인용)
쿠앙남성 디엔반현 퐁니·퐁넛(4-1)
‘나와우리’ 뉴스레터 2004년 6일자의 인터뷰를 인용하여, 학살 생존자 응웬수의 증언의 일부를 그대로 전함.
KP-61
오마이뉴스
2007.04.07.
김효성
1966년 베트남 고자이 마을의 비극
공식기록
빈딩성 떠이선현 떠이빈사 빈안(구 안빈) 고자이(2-1)
빈딩성 통합박물관에 보관된 ‘빈안 지역 민간인 참살 보고서’의 내용에 대한 보도. 특히 현, 성 인민위원회의 인증을 거친 정부기록으로서 고자이 학살(1966년 2월 26일)의 정보를 상세히 담고 있으며, 공식적으로 빈딩성 내에서 총 8차례의 민간인 학살로 총 1581명이 희생되었음을 전함.
KP-62
오마이뉴스
2007.05.22.
김효성
총 쏘고 칼로 찌르고 독약 먹이고 1시간 만에 380명 살육한 한국군
인터뷰
빈딩성 떠이선현 떠이빈사 빈안(구 안빈) 고자이, ‘쯩진 할아버지의 마당’(2-1)
고자이 마을에 대한 현장취재를 통해 학살 생존자 호지에우(86)의 증언을 전함. 동시에 같은 빈안에 속하면서 고자이로부터 2km 떨어진 곳으로 1966년 2월 23일에 90명이 학살된 마을을 방문, 생존자인 쩐남(82)의 증언과 위령비 사진도 함께 보도함.
KP-63
오마이뉴스
2013.09.08.
송필경
“한국군이 우리 마을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인터뷰
빈딘성 떠이손현 따이빈사(2-1)
따이빈사 답사를 다녀온 ‘베트남평화의료연대’ 시민기자의 기사로, ‘런 아저씨(응우옌떤런, 62)’의 학살 증언 전문과 함께 고자이 학살의 위령비와 벽화 사진을 전함.
KP-64
오마이뉴스
2014.03.02.
황윤희
“아가야, 한국군이 우릴 폭탄 구덩이에 넣고...”
인터뷰
빈딩성 따이빈사(2-1)
(송필경의 기사와 유사하게 따이빈사 답사 이후 작성된 시민기사) 빈딩성 따이빈사 학살에 대한 설명 및 위령비 사진과 함께, 생존자인 ‘런 아저씨(63)’의 증언 전문을 전함.
KP-65
한겨레21
(1016호)
2014.06.19.
심각한 사건…최종조처를 통지해주시오 33)
공식기록
1968년 2월 ‘퐁니‧퐁넛촌에서 발생한 일’에 대하여 동년 4월 주월미국사령관이 채명신에게 ‘최종 조처’를 촉구하던 편지 전문을 보도하며, 당시 채명신의 입장을 그의 회고록을 참고하여 이야기로 재구성한 글.
KP-66
위클리포유
2014.08.08.
박진관
골수에 사무친 원한…마을회관앞 ‘한국군증오비’에 ‘恨과 복수’ 새겨놓아
인터뷰
푸옌성 동호아현(1-1) 호아히엡남사 붕따우, 토럼
‘한홍구와 함께 떠나는 베트남평화기행단’에 동행하여 방문한 한국군 민간인 학살지들에서 붕따우 마을(1966년 1월 2일)의 생존자 응웬끼뚜엔(57), 토럼마을의 생존자 팜딘타오(59, 당시 10살)의 증언을 기록하여 전함.
KP-67
한겨레21
(1030호)
2014.10.02.
고경태
박정희는 왜 특명을 내렸나
공식기록
꽝남성 디엔반현 퐁니, 퐁넛 마을(4-1)
학살 1주기이던 1969년 2월, 학살 유가족들이 남베트남 하원의회 의장에게 보낸 탄원서의 내용을 보도함. 이 탄원서는 기밀해제된 미군 내부자료에 첨부되어 있던 자료로서, 한국군의 야만적 행위로 67명이 곤충취급을 받았다고 고발하며, ‘배상’을 요구하고 있음. 더하여 이 보도에서는 밀라이 사건과 관련한 재판이 국내보도되던 1969년 11월, 퐁니퐁넛촌에 진입한 소대의 지휘관이던 최중위가 특명수사의 대상이 되었음을 밝히며 관련성을 시사하고 있음.
KP-68
한겨레21
(1032호)
2014.10.16.
고경태
태풍의 냄새, 박정희는 미리 맡았나
공식기록
1970년 2월 17일, 동맹국에 대한 미국 지원금의 사용처를 조사하는 사이밍턴 청문회를 앞두고, 외무부 장관이 국방부 장관 앞으로 ‘주월한국군의 불상사에 관한 문의사항’이라는 전문을 보냄.
푸옌성(1)
이 보도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지는 않으나, 1968년 7월에 제출되었던 이른바 ‘랜드 보고서’에서 1966년 중반 베트남 푸옌성에서 벌어진 한국군 학살 내용이 기재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밝힘. (-> 1969년 ‘한국군 해병에 의한 잔혹행위 의혹’ 보고서가 작성된 배경)
KP-69
오마이뉴스
2015.04.06.
유성호
“50년 흘렀지만 학살 생생... 기억 전하는 게 소임” 34)
인터뷰
퐁니 마을(4-1), 빈딩성 따이손현 따이빈사 안빈마을(2-1)
당일, 학살 생존자인 응우옌 떤 런과 응우옌 티 탄의 국회 기자회견에 대한 기사로, 생존자들의 증언 내용과 더불어 학살에 관한 공식기록에 대해 전하고 있음.
KP-70
오마이뉴스
2015.04.07.
이희훈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을 다 죽여버릴 수 있나요” 35)
인터뷰
응우옌 떤 런(64)과 응우옌 티 탄(57)의 학살 증언과 참전단체들의 반응에 대한 심경을 전하는 보도.
KP-71
프레시안
2015.04.07.
윤효원
“여자는 ‘한 끼’ 식사, 남자는 바로 쏴 죽였다”
인터뷰
(참전군인)
필자가 베트남 출장에서 만난 익명의 ‘운전사’36) 와의 대화를 전함. 참전군인이었던 그는 매복 시 남자를 발견하면 즉시 사살, 여자를 발견하면 “집단으로 윤간”한 뒤 증거인멸을 위해 사살했다고 증언하였음.
KP-72
프레시안
2015.04.13.
김영화
한국군 베트남 ‘민간인 학살’ 증언... “평화를 위해” 37)
인터뷰
응우옌 떤 런(64)과 응우옌 티 탄(57)이 대구의 강연에서 한 학살 증언을 기록하여 전하는 보도.
KP-73
시사IN
(396호)
2015.04.18.
정희상
여덟 살 아이를 향한 한국군의 총구
인터뷰
4월 6일 오전, 학살 생존자 응우옌떤런, 응우옌티탄, 그리고 호찌민 시 전쟁증적박물관 후인응옥번 관장과 직접 인터뷰한 내용을 전함. 학살사건의 전말과 부상 후유증, 참전단체의 주장에 대한 심경 및 반박, 베트남 정부의 지원 실태 등이 그 내용.
KP-74
한겨레
2015.04.24.
고경태
할머니의 어떤 기억
인터뷰
빈딘성 안년시(옛 안년현)(2-4), 뚜이프억현(2-2), 푸깟현(2-3) 일대
정대협은 빈딘성 인민위원회로부터 받은(2월) 한국군 성폭력 피해자 26명의 명단 중 10명의 생존자를 만나 인터뷰를 진행하였음(3-4월). 생존자들이 피해를 입은 지역은 1965년 10월부터 1973년 2월까지 맹호부대가 주둔했던 지역. 이 기사는 인터뷰한 10명 중 8명의 증언을 전하는 보도이며, 증언 중에는 주민 30-40명이 함께 기지로 잡혀갔다는 내용, 일정기간 기지에 감금되어 여러 명에게 수 차례 성폭행을 당했다는 내용 등이 포함됨.
안년시
레티히에우(1935), 하티낌응옥(1935), 하티찐(1929), 응우옌티카인(1936), 응우옌티떰(1954), 응우옌티바이(1948), 팜티언(1951)
푸깟현
팜티하인(1951)
KP-75
오마이뉴스
2015.08.27.
고상만
베트남전 무용담, 실상 듣고는 충격
인터뷰
‘베트콩 참전군인’ 싸우 탄(70)의 증언. “남자는 보이는대로 다 죽였고 여자들은 집단으로 윤간했다.”, “시신을 깔아 뭉갰다. 증거를 없애기 위한 의도였을 것이다.”
KP-76
오마이뉴스
2016.01.27.
김형배
어린아이들까지 모조리 죽여야 했단 말인가
공식기록
(+분석)
디엔반현 퐁니·퐁넛, 하미(4-1)
퐁니·퐁넛 마을과 하미 마을의 위령비에 적힌 정보를 성별, 연령에 따라 분석함. 전투능력이 있는 젊은 남성비율이 매우 희박하며, 희생자의 절반 이상이 어린아이였던 반인륜적 범죄임을 강조하고 비판함.
KP-77
한겨레
2016.03.04.
박기용
한국군 베트남 민간인 학살 50주년 위령제, 한국인 사죄의 첫걸음
인터뷰
빈딘성 깟띠엔사 쯔엉탄의 이웃마을(2-3) 38)
생존자 판딘라인의 증언. 1966년, 생후 3일째 날 마을에 학살이 벌어짐.
떠이빈 사(구 빈안 사) 깐븜마을
빈안학살의 대표적 생존자 응우옌떤런(65)의 증언.
KP-78
뉴스민
2016.03.06.
김규현
[빈안학살 50주년 평화기행➂] “카이, 카이, 카이(말 좀 하게 해 주세요)”
인터뷰
빈딘성 푸깟현 깟띠엔사 쯔엉탄(2-3), 깟흥사 미룡촌
1966년 9월 24일 쯔엉탄 학살의 유가족 후옌 티엔 타오에 대한 이야기와 사진, 그리고 1966년 미룡촌 학살의 생존자 판 딘 란의 증언을 전함. (한겨레뉴스 3월 4일자에 실린 것과 동일한 기행에 대한 취재이나, 이 기사에는 판 딘 란의 마을명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었음)
KP-79
한겨레21
(1102호)
2016.03.09.
조우혜
살아남은자들의 슬픔
인터뷰
디엔반 퐁니(4-1)
생존자 응우옌 럭(64)의 사진과 증언
디엔반 하미(4-1)
생존자 응우옌 럽(62)의 사진과 증언
KP-80
뉴스타파 목격자들(영상) 39)
2016.05.20.
전쟁 1부, 두 개의 기억
현장취재
빈딘성 떠이빈사(2-1)
- 빈안학살 50주년 위령제 방문현장 취재
- 1966년 2월 26일 380명이 학살된 고자이 마을 위령비 취재
- 빈딘성 박물관, 민간인학살 증거자료들 및 박물관 설명 취재
인터뷰
빈딘성(2-1)
학살 생존자 응우옌 떤 런 증언
인터뷰
(참전군인)
- 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회장 우용락 증언, “나오라고 해서 안 나오면 전쟁이 붙어버리는데 어린 애라고 쏘는 건 아니지. 쏘다 보면 전쟁하다 보면 어린 애도 맞을 수 있는 거고. 안 나오는 사람들, 안 나온 사람들은 99%는 전부 다 ‘사상이 안 좋은 사람들이다.’ 베트콩들이다. (당시에?) 예. 그런데 지금 북베트남이 베트콩들이 이겨버리고 나니까 자기들이 전부 다 민간인이었던 것처럼 해서 ‘피해를 봤다.’ 이렇게 뻥튀기를 해서 이야기하는 게 있어요.”(간접인정)
- 베트남전 참전군인 김영만 증언 (1966년 10월 해병 청룡부대 소속으로 꽝응아이성 짜빈동에 주둔한 병사) “수색 정찰을 나가서 기습을 당하는 경우가 매우 많았어요. 아주 자주 있었어요. 그러면 기습을 당하고 오면 반드시 보복을 하러 또 나가고.”, “복수를 해야 할 때,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는 복수의 대상이 베트콩이죠. 베트콩이라는 개념을 완전히 마을전체에 확장을 해버리니까 노인이고 애들이고 할 것 없이 막 그냥... 무차별적으로... 그래서 그런 민간인 학살이 생긴 거죠”
KP-81
뉴스타파 목격자들(영상)
2016.05.27.
전쟁 2부, 책임없는 전쟁
인터뷰
빈딘성 깟띠엔사 쯔엉탄(2-3)
1966년 9월 24일 학살에 대해 피해자 후잉티 다오의 증언
꽝남성 디엔반현 디엔안면 퐁니(4-1)
1968년 2월 12일의 퐁니학살 생존자 응우옌 티 탄의 증언
쯔엉탄 이웃마을(2-3)
1966년 출생 3일 후 학살을 경험했던 생존자 판 딘 란의 증언
정부입장
- 국방부군사편찬 연구소의 조사문건, “베트남 현지신문 보도에 대한 당시 주월한국군 사령부 조사 결과” : “학살은 사실이 아니며, 베트콩에 의해 조작된 음모였다”는 내용
- 국방부 관계자와의 전화 인터뷰 “이걸 저희가 입장이 나와야 하나 잘 모르겠네요”
주
1) 통계자료와 정황과 지역명이 일치하나 날짜가 다름.
2) 통계자료의 떤장촌과 지역명과 희생자 수가 유사하나 날짜가 다름.
3) 통계자료에 따르면 음력 1월 23일부터 26일까지 발생한 학살은 ‘빈안 양민학살’. 단, 통계자료와 정확한 학살 사망자 수가 다름. 통계자료는 1028명, 해당자료는 1200여명.
4) 통계자료의 붕따우 학살과 지역명이 같으나 날짜에 하루 차이가 있으며, 사망자 수도 다름.
5) 통계자료에 없는 내용. 붕따우마을에서는 학살이 2차례 있었으나 통계자료에는 1월 2일의 학살만 기록되어 있음.
6) 통계자료에 없는 내용.
7) 꾸앙응아이성 빈호아사 학살에 관해 커우마을이 자주 언급되는데, 통계자료에는 ‘커우’마을 대신 ‘썸꺼우’ 촌만이 존재함. 안 마을도 마찬가지.
8) 통계자료와 사망자 수가 다름.
9) 통계자료 상 꾸앙응아이성 선띤현 지엔니엔 학살과 이름이 비슷함. 하지만 학살된 사람 수가 통계자료가 2배 가까이 많아서 크게 차이가 남.
10) 응우옌떤런의 잘못된 표기라고 생각됨.
11) 통계자료와 날짜가 다름.(음력을 감안해도)
12) 김00과 권00은 다음날 기자에게 전화해서 “고의적인 양민학살을 한 적은 정말 없다”, “마치 민간인들을 무고하게 죽인 것처럼 이야기한 것 같다”며 신중함을 기했다.(“혹시 참전군인들의 명예가...”, <한겨레21> 289호)
13) 통계자료에는 린선사 학살만 기록되어 있음.
14) 통계자료에 없는 내용. 날짜도 다름. 자주 언급되는 떤장학살은 1965년 1월 45명의 마을주민에 대한 보복학살임.
15) 오연호 기자는 2000년 2월 14일, ‘오마이뉴스’에서 동일한 내용으로 여섯 개의 심층보도 기사를 보도하였음.
16) 토럼 양민학살과 내용이 일치.
17) 통계자료에 없는 내용. 닌호아 지역에 대해서는 나오나 날짜가 다르다.
18) 통계자료에는 언급되지 않는 마을이름.
19) 통계자료와 날짜가 다름.
20) 빈호아 사의 과거 명칭인가? 통계자료에는 빈호아사 롱빈촌이라고 기록됨.
21) 통계자료에 없는 내용.
22) 통계자료에 없는 내용.
23) 통계자료의 안린 사 양민학살과 같은 지역, 비슷한 시기. 하지만 기록된 것과는 세부 행정단위와 학살 양상이 다르며, 통계자료에 제시되지 않은 증언자가 등장.
24) 통계자료의 호아동 학살지와 같은 지역이나, 날짜가 전혀 다름.
25) 309호에서는 51세
26) 2014.05.22.의 자료, 응웬 사와 동일인물이라고 생각됨.
27) 통계자료에 없는 내용. 뚜이안현에서 학살이 일어난 1967년 3-4월 경과 시기는 일치하지만, 사건의 양상과 학살자 수는 일치하는 바가 없음.
28) 해당 보고서는 베트남 민간인학살 진실위원회가 11월 14일 공개한 것으로, 14일 오마이뉴스의 기사에서도 해당 보고서의 내용에 대해 상세히 취재보도하고 있다. 그 외에 연합뉴스 등에서도 보도됨.
29) 통계자료에 없는 내용.
30) 통계자료에 없는 내용.
31) 20)과 같은 건.
32) 다른 자료에서는 사망 당시 19살이었다고 나옴.
33) 이 보도는 <한겨레21> 제980호부터 제1034호까지 27회에 걸쳐 기획연재된 “고경태의 1968년 그날”의 일부이다. 해당 연재는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 학살을 미국과 북한, 한국, 베트남의 관계 속에서 조명하는 동시에, 지금까지의 증언 및 자료분석을 토대로 사건을 이야기로 재구성하는 내용이다.
34) 4월 10일자의 한겨레뉴스에서도 국회기자회견 당시의 증언 내용과 상황에 대해 보도하였음.(베트남전 학살 생존자와 보낸 일주일...“저희는 심장으로 얘기하고 있습니다”)
35) 같은 현장에서 프레시안도 함께 취재하여 보도하였음. (“베트남전 학살 피해자 방한...고엽제전우회 ”종북“ 반발”)
36) 인물에 대한 단서가 극히 제한적이라 증언으로서 쓸 수 있을지 우려됨...
37) 민중언론 참세상에서 같은 강연을 취재하고 증언을 보도하였다.(“세월호 리본 단 월남학살 피해자, 군홧발의 파월노인”) 5), 8)과 같은 방식으로 처리하였음.
38) 통계자료에 없는 내용. 뉴스민 김규현 기자의 기사에 따르면 깟흥사 미룡촌이라고 함.
39) 1부 https://www.youtube.com/watch?v=V8MivKODpbs 2부 https://www.youtube.com/watch?v=iHyYIEK1TAQ
제공: 민변 베트남전쟁연구모임